인조, 명군이 되다 11화
이원익에 이어서 한명련과 정충신에게도 일을 맡겼다.
세 사람 모두 능력은 출중하니 일을 그르치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은 든다.
‘상황이 워낙 복잡하게 꼬여서 언제 좋은 결과가 나올지 미지수네.’
원체 쉬운 일들이 아니기도 하지만, 이건 내가 조심스러운 탓도 있다.
선혜법을 확대하기 전에 토지 전수조사를 통해 새로이 개간된 땅과 은결隱結을 적발하고 싶었다. 현행하는 방군수포를 무작정 뜯어고치기 전에 해당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나도 그만큼 도와야지 않을까?
잠시 후.
박홍구와 조정이 입시했다.
“……부르셨사옵니까?”
두 사람은 광해군 치세에서 각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맡은 대신들인 만큼, 북인의 거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서인으로 이뤄진 반정 패거리의 세상이 된 지금은 좋지 못한 시선을 받는 중.
실제로도 박홍구는 이괄의 난 때 사형을, 조정은 그보다 몇 년 뒤에 유배를 받아 배소配所에서 죽는다. 두 사람은 지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테지.
‘그러면 괜히 딴생각이 든단 말이야…….’
자신이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겠다, 따위의.
나는 두 사람을 살려주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되지. 뒤통수라도 맞았다간 내가 흑화하는 수가 있다.
‘정말로 인조 되어버리는 거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두 사람에게도 동아줄을 내려주어야 한다.
여차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까이 오세요.”
박홍구와 조정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고, 나는 과자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두 사람 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입에 단 게 들어가면 조금은 덜하겠지.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박홍구와 조정은 과장된 감사와 함께 과자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받치며 오물오물 먹는다.
“경들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꽤 좋지 않은 거로 압니다.”
“커흑, 컥.”
고작 말 한마디에 박홍구가 부스러기를 토해내면서 기침했다.
그러고는 사색이 되어서 가슴을 자해 수준으로 퍽퍽 치고는, 눈가가 새빨갛게 되어서 말했다.
“소, 송구하옵나이다.”
나는 다과상에 놓인 물 대접을 내어주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경들에게 유감이 없습니다. 딱히 위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물잔을 돌려 마신 박홍구와 조정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러나, 신하들이 필사적으로 경들을 벌주라고 한다면 나도 부득불 공론에 반대하기는 힘들겠지요?”
두 사람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이거, 어째 온탕과 냉탕에 번갈아 넣는 기분인데……. 나는 노인 공경을 하는 사람이지, 공격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경들이 공을 세워주었으면 합니다. 내게도 억지에 반대할 명분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다시 온탕에 들어온 박홍구와 조정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감히 채근하지는 못하겠지만, 너무 궁금하니 알려달라는 느낌적인 느낌.
그 바람에 부응해 주지.
“분호조分戶曹에서 비축한 포목과 곡물, 은화 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착취한 재물이 극도로 많다고 들었습니다.”
“……!”
분호조分戶曹란 광해군 때에 설치된 관청으로, 사신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고 보관하는 업무를 전담했다.
일종의 광해군이 만들어놓은 돼지 저금통인 셈이지.
“이 관청의 관리들이 폐주의 어명을 내세워 민간의 재물을 갈취하면서도 동시에 횡령했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이들은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박홍구가 즉각 답했다.
“성상 전하의 하교대로이옵니다. 폐주는 궁궐을 건설하고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각지에 조도관調度官을 파견하여 백성을 착취하였으니, 이들의 해악을 이루 말할 수 없었사옵니다.”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에 조정도 합류했다.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과 분호조 참의 이창정李昌庭은 막대한 재물을 단둘이서 도맡고 도용하기를 밥 먹듯이 했으니, 뇌물로 준 것이 얼마고 착복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며, 또 거두지 못했다며 백성들에게 전가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옵니다. 예전부터 두 사람을 논핵하고자 하였으나, 뇌물을 받고 비호하는 자가 많아 섣불리 나서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렇게 전하께서 하교하시니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마지막에는 아첨까지 섞어주는 게, 아주 능숙하다.
“두 분께서 분호조의 탐관들을 처단해 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박홍구가 곧장 말을 이었다.
“신들이 다음 조회에 바로 두 사람의 죄악을 규탄하겠사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절차를 따르는 것도 좋은데, 절차는 이미 다른 세 사람을 통해서 따르고 있다.
이때.
궁인이 문밖에서 아뢨다.
“전하…….”
“들라 하라.”
박홍구와 조정이 몸을 돌려 세 번째 손님을 맞이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상복喪服을 입은 구굉이었다.
반정이 있기 전부터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있었던 구굉이다.
“내가 경에게 염치없게도 부탁을 해야겠습니다.”
“……명하시옵소서.”
“판윤을 맡아주세요. 지금 판윤을 지내는 윤선尹銑은 공이 있는 사람이지만, 당분간은 피신하고 싶을 겁니다.”
기복起服하라는 뜻이다.
보통 직을 지내는 관리라도 상을 치르면 사직하고 장례에 집중하는데, 이런 사람을 다시 기용하는 것을 기복이라 한다.
기복하는 사람은 불효한다는 부담이 있고, 왕으로서는 그런 부담을 준다는 부담이 있다.
그래서 기복은 가벼이 할 수 없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정부에서도 기복의 타당성을 따지고, 예조에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명을 참고하여 공문을 올린다.
그 끝에야 기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정부의 두 의정이 이미 이 자리에 있으니…….’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굉은 전하를 근시하여 나라를 바로 세운 공로가 있으니, 아직 조정이 위태로운 이때 기복하는 것은 불례가 아니라 사료하옵니다.”
박홍구에 이어서 조정도 답했다.
“지금 한성부의 판윤은 공궤供饋가 끊기지 않게 한 공로가 있으나, 하교하신 대로 당분간은 피신하고 싶을 터이니 체직한다면 전하의 은혜에 감복할 것이옵니다.”
감복은 무슨…….
공궤供饋는 윗사람에 음식을 올리는 것을 뜻한다.
광해군이 원래는 대비를 굶겨 죽이려고 했는데, 지금 판윤인 윤선이 몰래 넣어주다가 광해군을 설득해 공궤를 이어나갔다.
꽤 괜찮은 사람이지. 다만 당적이 북인인지라 숨 돌릴 여유를 주고 싶었다.
“나와 의정부의 의견이 이러하니, 외숙께서는 부디 힘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신이 어찌 전하의 명을 거절하겠습니까?”
“원망해도 좋습니다.”
불효자라는 말이 나오면 내 탓을 하라고.
“당치도 않사옵니다! 신이 어찌…….”
나는 손을 저었다.
어쨌거나 나는 박홍구와 조정만 아니라 구굉도 함께 불렀다. 그의 도움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두 의정에게 자문하였는데, 그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옳았습니다. 그래서 의견에 따라 분호조를 혁파하고 그것에서 일하던 두 탐관은 처분하고자 하는데, 외숙께서 포도청의 군사를 이끌고 집행해 주세요.”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윤수겸과 이창정이 비축한 재물이 그렇게 많다고 들었습니다. 쌀알 한 톨 흘리지 않고 장부와 현물을 확보하기를 원합니다.”
이번에 분호조를 언급한 건 단순히 폐조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광해군이 꿍쳐놓은 저금통을 먹기 위함이지.
이렇게라도 재정에 보태야 개혁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겠나.
구굉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자, 나는 다른 두 사람에게도 명했다.
“경들도 나가서 판윤의 집행을 도와주세요. 이럴 때 얼굴을 보여주고, 공을 세워야 나도 경들을 위해 한마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에!”
박홍구와 조정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고는, 곧장 구굉을 쫓아나갔다.
“한바탕했군.”
이건 한성 안의 일이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 * *
판윤이 교체되고 두 의정이 동행해서 움직인 탓일까?
문무백관이 곧바로 들썩였다.
나는 입궐을 청하는 관리들에게 답해주지 않다가, 세 사람이 돌아왔을 때 한 번에 들여주었다.
“전하!”
병조참판 이귀가 발끈해서 외쳤다.
“말씀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그게 무슨 태도요? 전하께.”
김류였다.
이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서 몇몇 신하들이 언쟁을 시작하자, 영의정 이원익이 엄하게 말했다.
“그만들 하시게, 그만!”
고작 왕명으로만 의정을 해 먹는 게 아니라는 듯 좌중을 제압하는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에 서로를 노려보던 신하들은 헛기침하거나 시선을 회피하며 물러났다. 이원익은 그들 사이를 헤쳐 나오며 말했다.
“전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신들에게 알려주시옵소서.”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긴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직접 보시지요.”
이귀에 의해 일순 시선이 팔린 사이, 구굉이 박홍구와 조정을 대동한 채로 모두의 앞에 나섰다.
포도청의 군사들도 소수 함께였다.
누군가는 장부를 받쳐 들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사람을 붙들고 있었는데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뒤늦게 이들을 발견한 신하들은 금세 분위기가 달라져 중얼거렸다.
“아니, 저자들은?”
“분호조의 참판과 참의 아닌가!”
“언젠가는 저런 꼴이 될 줄 알았지.”
“그러면 전하께서는…….”
잡담을 헤치고 나선 구굉은 고개를 치켜들고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를 향해 보고했다.
“윤수겸이 비축해 둔 곡물이 7만여 석, 포목이 1만 5천여 필, 은화 9천여 냥, 소 삼백여 마리이옵고 이창정이 비축한 곡물은 4만 3천여 석, 포목이 1만여 필, 은화 5백 냥이옵니다!”
무지막지하구나. 이 자식들.
나랏일을 하다가 딴 주머니 차는 건 일도 아니라지만, 이건 주머니 정도가 아니다.
더군다나 모조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비축한 재물들.
수단도 결과물도 아주 사악하다.
내가 접수할 물건이 아니었다면 불부터 놓아서 정화해 버렸겠지.
……크흠.
좋은 데 써야 할 거 아니야?
백관들은 재물의 명단과 수량에 제압되어 웅성거렸고, 구굉은 그런 소란을 제압하듯 여전한 목소리로 보고해 나갔다.
“이들은 어느 고을에서 어떤 물자를 몇 석, 몇 필 거두었는지 호조에도 밝히지 않고 단독으로 장부를 작성하였는데 입출의 내역이 무척이나 수상하였사옵니다!”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신하들은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분호조의 관직을 지내는 두 사람의 평판은 오래전부터 최악이었다. 편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다들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에 윤수겸이 다급하게 항변했다.
“나는 그때의 왕에게 충성을 다했을 뿐이오!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된단 말이오?!”
여러 사람이 흠칫했다.
한때 광해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그랬고, 궁궐 공사에 협조했던 이들이 그러했으며, 또 폐모에 찬동한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이들도 가벼이 입을 열지는 못했다.
지금 왕에게 충성한다는 것.
함부로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칫 개인적인 판단으로 금상에게 불충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실언했다간 목이 달아날 주제였다.
내가 나서줘야 할 때로군.
“……아니, 너는 폐주에게도 충성하지 않았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강홍립이 명군을 도우러 갔다가 계속 보급 부족에 시달렸는데, 그건 그대와 평안감사가 작당하고 군량을 착복해서가 아닌가?”
얼마 전까지도 평안감사를 지냈던 박엽朴燁은 혹독한 형벌을 남용하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로 유명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이런 쪽으로도 능력이 있어서야 구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즉위한 당일로 선전관을 보내 참수하게 했다.
“폐주가 국가의 명예를 걸고서 대군을 징발하여 노적을 처단하고자 하였는데, 그대가 일을 망쳐서 오늘날에는 저들의 기세가 얼마나 올랐는지 아는가?”
“그, 그것이 어찌 전부 신의 잘못이겠사옵니까!”
“예로부터 작전에 실패하는 장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보급에 실패하는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지.”
예로부터가 맞나?
아무튼.
“그대는 보급에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친 것이니 더더욱 살려주기 어렵다.”
내가 목에 대고 손짓하자 윤수겸이 기겁했다.
“으헉! 안 돼!”
“뭐가 안 돼? 데리고 가서 후딱 처리해라.”
윤수겸은 포도청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면서 외쳤다.
“나 같은 유능한 신하를 죽이고도 이 나라가 얼마나 이어질 것 같으냐?! 한 해도……!”
입이 막혔는지, 윤수겸의 유언은 어중간한 부분에서 끊겼다.
딴에는 저주라도 남기고 싶었던 모양인데 딱히 귓속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대 목숨보다는 오래 가겠군.”
나는 윤수겸과 함께 끌려온 이창정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어떻게 항변할 생각인가?”
그는 그나마 윤수겸과 같은 만행은 없었으나 한때 조도관과 방납인을 겸했던 자였다.
백성들이 내야 할 공물을 대납하고 대금을 수취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현감직을 지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상도 받았고, 궁궐의 남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처음 관직에 올라서 열성적으로 직무에 임했으나 끝내 좌절하고 타락해 버린 경우인가.’
이창정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처량하게 답하는 이창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구차하게 목숨 구걸이냐며 언성을 높였지만, 내가 고개를 들어서 좌중을 돌아보자 금세 소란은 멎었다.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지 검증해야겠다. 판윤께서는 죄인을 대동하고서 분호조의 부패와 미수未收한 문서들을 검증하여 분별하라.”
“예.”
“공물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검증하고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파헤쳐야 한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성실히 임하겠나이다.”
“판윤은 일이 바쁘니 먼저 해산하라.”
구굉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이창정과 포도청 병사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당혹감이 올라오기 시작한 어전에서,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정쩡하게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내게 긴히 고하지 않았다면 나는 등잔 밑에서 이러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당연히 고해야지 않겠사옵니까.”
박홍구에 이어서 조정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죄신들이 의정의 직분을 달고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성군을 맞이하였으니 일생의 홍복입니다.”
구차하기까지 한 아부였던지라 누군가 쯧! 하고 혀를 차기도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서 답했다.
“앞으로도 분발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지금은 판윤의 일을 도와주세요.”
“명을 받들겠나이다.”
박홍구와 조정은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저들을 노리는 승냥이밖에 없는 어전을 피해 달아났다.
“이만하면 내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다들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명 취지는 좋으나……!”
이귀였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다만, 계속 떠들게 들 수는 없다. 논쟁이 길어지면 내가 지거든.
“공론화를 거쳐 문제를 해결했어도 좋겠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분호조에서 먼저 소식을 접했다간 귀중한 문서들이 처분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서운 일이지. 자칫 나의 처벌이 폭정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더 보여드릴 것은 없으니 다들 해산하세요. 이 일에 대해 더 논의할 사항이 있다면 서면으로 받겠습니다.”
무성의한 냉대에 신하들은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나의 원대한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이원익을 쳐다보다 신하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일제히 이원익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관심을 떠안게 된 이원익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는 나를 올려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무슨 말이긴?
당연히 선혜법 확대랑 양전 사업을 말하는 거지.
나는 훠이훠이 손짓했다.
“해산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물러들 나세요.”
할 말 다 했다는 듯 먼저 발을 돌리니 뒤에서 의구심 가득한 웅성거림이 번졌다.
하지만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영의정 이원익을 향한 것이었다.
도대체 왕이 말한 원대한 계획이 뭐냐는 거다.
내가 마침 말도 없이 분호조를 털어서 한 사람은 죽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의종군白衣從軍에 가까운 신세로 전락한 참이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겠지.
덕분에 나는 조용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