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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화 (12/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화

“어머니.”

나의 부름에, 상석에 앉은 대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인 연유로 어울리지 않게 살갑게 부르는 것이오?”

“별다른 이유는…….”

사실, 바람이 불기는 했지.

광해군의 비자금이 달달했으니까. 양곡이 십만 섬에다 은화가 일만 냥이라니 미쳤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상께서 알려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어찌 캐물을 수 있겠소?”

에이, 정말로 별건 아닌데.

굳이 관심을 가지시니 알려드려야지.

“분호조를 혁파하고, 그곳에서 탐관들이 공공연히 도용하였던 재물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내게도 기쁜 소식이구려.”

“그렇습니까?”

의외네.

대비가 기뻐할 구석이 어디 있다고.

“분호조의 관리들은 역괴의 총신이었소. 도용한 정상이 드러났다니, 죄도 받았겠지.”

이래서 좋아하는 거였군.

폐주의 처분에 대해서는 매듭을 지었지만, 대비는 여전히 폐주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당연한 건가?

기왕 좋아하시는 김에, 더 좋아하시라고 탐관들의 처분도 밝혔다.

“한 사람은 자기가 폐주의 충신이라고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정형正刑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솔직하게 자비를 구걸하기에 직접 비리를 파헤치게 했습니다.”

“흐흠.”

“……마음에 안 드십니까?”

“두 사람 다 복주되어도 좋았겠지만, 대신 역괴의 과오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요. 이번 일은 잘하셨소.”

대비는 만족했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경사스러운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쪽이 원래 전하려고 했던 소식이다.

“무엇이오?”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명해두었습니다.”

대비의 얼굴이 인자하게 변했다.

광해군의 총신들이 벌을 받았을 때는 복수심이 충족되어 만족했다면, 이번에는 순수하게 희소식을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과연,

“역괴는 공주가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함께 가둬 버렸소. 그동안 공주가 나를 모시고 산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정명공주다.

오죽하면 선조를 그리워하는 대비를 위해, 부왕의 필적을 모사해 제 어머니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속이 깊은 사람이다.

그런 자식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자신과 함께 갇혀 살았으니 이 역시 대비에게는 한이 되었겠지.

희소식을 접한 대비가 말을 이어나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자상한 배필을 맞이하여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된다면, 내가 당장 죽더라도 한이 많지는 않을 것이오.”

“여한이 아예 없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역괴는 내 일생의 원수인데, 그가 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한이 없을 수 있겠소?”

흉흉하게 말하는 대비였으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비는 들뜬 기색이었다.

“눈을 감기 전에 귀여운 손주들을 볼 수 있다면, 또 모르지. 그러니 주상께서는 마지막까지 방심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공주가 나와 함께 지낸 세월이 많아서 부마가 쉽게 구해지지 않을 터이니.”

과한 자식 사랑으로 화를 자초했던 사람만큼 공주에 대한 사랑도 진심인 대비였다.

그런 대비가 진심모드가 되어서 보여주는 통찰력은 놀라웠다.

정명공주는 현대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무척 젊은 편에 속하지만, 지금은 조선 시대.

품위가 높은 왕족이 배필로 삼을 만한 가정들은 아이가 채 장성하기도 전에 혼약을 맺어두고, 또 혼인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정말로 부마가 안 구해지지…….’

결국, 오리지널 능양군은 양가의 혼약을 깨뜨리고 부마를 강제로 데려왔다.

정말로 개 같은 놈이지.

나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대비께서 여한이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보겠소. 내, 희소식은 공주에게 전해놓으리다.”

아예 못을 박아버릴 심산이로군.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염려치 마시오. 오늘은 주상 덕분에 푹 잘 수 있을 터이니.”

나는 대비에게 예를 올린 뒤 석어당을 나섰다.

그리고 뒤따르는 궁인의 행렬의 끝이 채 석어당을 나서기도 전에, 바로 옆집이나 마찬가지인 즉조당 뜰에 들어섰다.

“아버지!”

소현세자였다.

아이와 함께하는 내시가 곧장 허리를 숙이며 주의를 시켰지만, 소현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사옵니다!”

조금도 거리낌 없는 모습에, 나는 세자를 높이 들었다가 내려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문안하러 왔느냐?”

“예!”

“들어가자. 바람이 춥다.”

3월이라 꽃샘추위가 한창 매서울 때다.

마침 즉조당에는 두 개의 온돌방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쓰는 건 동쪽 온돌방.

서쪽 온돌방에는 한가운데 기둥이 있어서 미관이 이상하단 말이지.

소현세자를 데리고서 평소 쓰던 동쪽 온돌방으로 데려오니, 세자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었다.

“신기한가 보구나.”

“예! 이곳 전체가 온돌방이옵니까? 땔감을 많이 써야겠습니다!”

“전체는 아니고, 온돌이 깔린 방은 여기를 포함해 두 곳뿐이다. 하나, 내가 왕이 되었는데 땔감을 걱정할 일이야 있겠느냐.”

소현세자가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한양의 백성들은 직접 땔감을 구하지 못해 밖에서 들여오는 것을 비싼 값을 주고 쓰니, 궁궐에서 허투루 장작을 낭비한다면 대신 백성들이 추위에 떨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소현세자의 호기심에 어울려 주려고만 했지, 그런 호기심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랐다.

이토록 생각이 깊을 줄이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보여준 모습들이 이해가 갔다.

‘견부호자로구나.’

그리고 과분한 자식은, 때로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화가 된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가 그러했으며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가 그러했다.

내가 비록 능양군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소현세자가 과분한 자식이 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겠지.

“궐로 막 이가移家하여서 아직 주변이 어색할 터이니, 오늘은 나와 함께 자지 않겠느냐?”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디, 네 말대로 우리가 밤에 뒤척이지는 않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 * *

소현세자의 말이 옳았다.

밤에 뒤척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쉬이 잠들지는 못했는데, 세자가 밤새 쫑알쫑알 떠들어댄 탓이었다.

덕분에 나중에는 몽롱해져 최면에 빠지는 기분으로 잠들었지.

침소의 문을 여니 궁인이 맞아주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세안수 부탁하겠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사옵니다.”

잠시 후. 궁녀들이 물 대접과 소금 종지를 소반에 받쳐왔다.

그리고 방 한쪽에 이불에 반쯤 말린 채로 자는 소현세자가 신경 쓰였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 아주 전도유망해 보이지 않은가.”

“예, 아…….”

“책망하려는 게 아니니 부담 갖지 마시게.”

“망극하옵니다.”

궁녀들은 민망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끝을 적신 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 이를 문질렀다. 지금은 16세기.

21세기와 달리 지금은 소금이나 강가의 고운 모래를 치약으로 사용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치약齒藥이 아니라 치분齒粉이라고 해야겠지. 이 닦는 데 사용하는 가루라는 뜻이다.

아니면 치분을 대신해서 잘 씹은 버드나무 가지나 지푸라기를 칫솔 삼아 사용하기도 했고…….

“후!”

입을 씻어낸 물을 타구唾具에 뱉어내고 얼굴까지 닦아내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네.”

“아니옵니다.”

나는 한쪽 구석에 놓아둔 과자를 하나씩 나눠주고 복도를 나섰다.

입구 앞에는 좌우로 한 쌍의 내시가 자리해 있었는데, 나는 더 연로해 보이는 쪽에게 말했다.

“장차 세자가 될 사람이 동궁東宮에 기거하지 않고 왕에 곁에서 잠들었다니 내가 가고 나서 한소리 하고 싶겠지만, 사가私家에서의 생활을 하루아침에 떨칠 수는 없으니 자네들이 이해해 주게.”

“……예, 전하.”

나는 입을 쩝 다시고는 즉조당을 나섰다.

하늘은 한없이 높고 맑았다. 바람도 시원했고, 호위들도 신뢰감 충만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나쁘지 않아…….”

* * *

이 부분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며칠 전부터 논공행상의 건으로 계속 머리를 빠개고 있다.

반정 패거리들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나의 지지 세력인 그들을 냉대할 수는 없으니까.

동시에 공이 있다고 무능력자를 요직에 둘 수도 없었는데, 이건 내가 용납 못 해서다.

‘몇 년 안에 후금과 싸우게 된다고!’

자리 나눠 먹기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조건을 때로는 맞추고 조금은 양보하며, 환국換局이나 다름없는 변화를 일일이 조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쪽은 말이라도 잘 들어서 다행이다.’

호조판서 이광정李光庭.

원래 이조판서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광해군이 폐모를 위해 소집한 회의인 정청庭請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격을 조금 낮추어 호조의 판서로 제수했다.

이건 본인도 공론도 의문을 표할 일이 아니어서 쉽게 반영이 됐다.

그리고 이 인간을 왜 호조의 판서에 임명했냐면…….

이유는 내가 박홍구와 조정을 사류士類의 반대에도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

다루기 쉬워서지.

이런 사람을 호조의 수장으로 임명해야 내가 국가 재정의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공을 들인 보람을 빨리 봐야지.’

조회朝會를 마친 다음에 곧장 이광정을 즉조당으로 불러냈다.

미리 궁인을 시켜 붙잡아놓도록 했으므로, 나는 기다리는 일 없이 곧장 이광정을 볼 수 있었다.

“……소신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사론士論이 경에게 영 친근하지가 않지요?”

“풍문이 성총을 어지럽히니,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이광정은 옅게 한숨을 흘렸다.

“경은 본디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폐주의 강압으로 마지못해 정청에 들어선 일로 이토록 논의를 입고 있으니 보는 내가 다 안타깝습니다.”

“……망극하옵나이다.”

“요즘 세간에서 좌의정과 우의정에 대한 평판은 어떻습니까?”

조금은 달라진 화제.

그러나 이광정은 의문을 가지는 일 없이 곧장 답했다.

“전하께 아첨하고자 옛 동지들을 팔아넘긴다는 비난이 일고 있사옵니다…….”

“허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살짝, 아주 사알짝.

두 의정의 끈이 끊어질수록 내게 더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약이지요……. 선대왕 시절부터 나랏일에 몸담았던 사람들인 만큼, 사람들이 그들의 충의를 다시 믿어줄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경에게도 그렇겠지요.”

이광정은 고개만 푹 숙였다.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때를 당하여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데, 난국에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방법은 먼저 탄탄한 민심이요, 둘째가 곳간의 넉넉함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둘 다 안 되고 있지.

“내가 경을 억지로 호판으로 제수한 이유지요. 설마, 정말로 정청에 참여했다고 유감이 있다고 믿지는 않으셨겠지요?”

이광정은 조금 당황했는지 놀란 얼굴로 답했다.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오히려 죄 많은 신하를 믿어주시고 중임에 써주시니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럴 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반정이 있고서 바로 다음 날, 조회에 참석했다가 정청의 일로 ‘그 김자점’에게 일침을 당하고 쫓겨난 이광정이었다. 애가 많이 탔겠지.

“호조판서로 부임하시고 며칠이 지났는데, 적응은 되고 있습니까?”

“……예에.”

썩 시원하지는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고충을 캐묻고 일일이 들으려고 이광정을 부른 건 아니어서,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다행입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폐주 때 영건營建이 남발되고 사신에게도 막대한 뇌물을 바친 탓으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나라의 재정이 매우 긴박한 상태에 놓여 있사옵니다.”

광해군의 실책에서 남발된 공사만이 부각되곤 하지만, 실제로 이 못지않게 민생을 파탄 낸 것이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친 것이었다.

즉위를 명나라에 공인받기 위해 책봉천사冊封天使로 온 태감太監 유용劉用에게는 은화 수만 냥과 삼 수백 근을 바쳐서 당대의 호조판서 황신黃愼이 1년 동안 장만한 비용이 단 열흘 만에 다 나가게 됐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어차피 광해군은 이미 명나라에서 세자로 공인받은 사람이라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무리할 이유가 생겼을 때는 정말로 더 무리했지.’

임해군을 죽인 뒤 명나라에 해명할 때,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때, 생모 공성왕후恭聖王后를 추존할 때, 그리고 공성왕후를 기리기 위한 면복을 청할 때 등등.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즉위를 공인받고자 은화 수 만 냥을 뇌물로 허비한 바람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맛집으로 소문이 난 뒤였고, 이렇게 일이 있을 때마다 조선은 수 만 냥의 은화를 토해내야 했다.

괜히 착취와 폐단의 성지였던 분호조分戶曹가 궁궐 건설과 사신 접대의 비용 마련, 이 역할만을 가지고서 설립된 게 아니다.

‘이게 인조 대에 욕을 먹지 않았던 이유는, 이놈은 찬탈자라서 더욱 필사적으로 뇌물을 먹여댔기 때문이지…….’

이런 걸 두고 전문 용어로는 쌍으로 지랄을 한다, 고 한다.

이러니 후금의 발호를 직면하고도 두들겨 맞기나 했지. 돈이 있어도 어려운 상황에 이상한 데다 써댔으니까.

나는 이런 멍청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명나라는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이미 많이 털렸으니 그만 털려도 된다.

명나라 코인은 손절이다.

명분을 참 좋아하는 반정 패거리들이 고분고분 응할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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