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화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부문이 어디인가?”
“가장 피폐해진 것인 수십 년간 조도사調度使에 시달린 백성들의 삶이겠으나, 나라가 그들 모두의 삶을 일일이 이전처럼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오직 국가의 정상화만이 모든 민생을 되살릴 방법이다.”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하오나 방법이 없지는 않사옵니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다.
“……마술처럼 민생이 살아날 방법이 있다면, 진즉 선왕들이 시행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일은 다르옵니다.”
“말해보세요.”
“신은 전하께서 거의하신 시기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사료하옵니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춘분春分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이광정이 절기를, 그것도 춘분을 언급하자 그가 말하려는 비책이 무엇인지 대강 감이 왔다.
그런 기색을 이광정도 눈치챘는지,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곧장 설명을 이어나갔다.
“농사는 춘분부터 시작하옵니다. 지금은 대사大事가 안정되어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없는데 한양에는 의거한 군병들이 여전히 머물고 있으니, 이는 민심에 이롭지 못할뿐더러 의병들을 치하하는 일도 되지 못하옵니다.”
절기는 농사를 위해서 존재하고, 춘분은 이광정이 말했듯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는 절기다.
이 직전에는 민생에 대해서 말했으니 둘을 합쳐서 살펴본다면 처음부터 나올 말은 정해져 있었다.
군병의 해산.
‘북방에서 근무하는 한명련과 정충신은 변방에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치는데…….’
재무부에서는 지금 있는 군사들마저 해산시키라고 한다.
얼핏, 서로 대치되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게 살펴본다면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방군수포하는 제도가 문란해진 오늘날에는 가장 빈한하고 위태로운 가정에만 군역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물을 바치고 이탈한 자들의 공백마저 채우느라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면, 다음 해에는 굶어 죽거나 도적이 될 수밖에 없겠지.
일선의 인력 부족은 더욱 심각해질 테고, 소수에게만 의무가 가중되면서 사회 기반의 몰락은 가속될 것이다.
‘파멸의 내리막길이로군. 정묘호란이 언제 일어날지는 알고 있으니 그때까지만 최대한 배를 째볼까?’
전략 게임에서 쓰는 용어로, 배를 짼다는 건 방어나 공격에 쓸 군사의 생산을 포기하고 모든 자원을 일꾼의 양산과 2차 자원 거점 확보에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상에 불과한 게임의 전략을 무턱대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건 너무 안이한 발상이다.
세기의 영웅이자 대청제국의 국부인 누르하치가 잠재적 적국의 군사력이 과도하게 약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날로 나라는 엎어지고 나는 원산폭격을 박을 테니까.
‘제기랄.’
머리 아프네.
이광정은 판단을 오롯이 내게 맡기겠다는 것인지 더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경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지금 이광정이 제안한 건 도성을 점거한 의병의 해산이었다.
그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애초에 의병은 오래 붙들고 있을 병력은 아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각지에서 갑작스레 징발되어 내전에 투입된 불쌍한 사람들이다.
“군병 모두가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뼈에 새길 것이옵니다.”
“다만 거의한 공로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으니, 회수한 분호조의 재물로 호궤犒饋와 시상을 베푼 다음 돌려보내겠습니다.”
재물이 아깝긴 하지만, 팔자에도 없이 반란군이 되어 목숨 걸고 싸웠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끝까지 반란군으로 남는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광정도 아는지 반대하지 않았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대강 합의된 관계로 나는 이광정을 치하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의 의견을 채용한 것이니까.
“경의 고견 덕에 이제라도 급선무를 이행하였으니, 중용한 보람이 넘칩니다.”
“허물과 논핵論劾을 입었음에도 중용해 주신 성상 전하의 은혜에 비할 수야 있겠사옵니까. 끝까지 견마지로를 다 하겠사옵니다.”
“그래요. 오늘은 고생하셨습니다.”
“예. 신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이광정은 오해도 풀고, 자신의 제안도 받아들여졌겠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한없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깨까지 살짝 들썩이며 어전을 나섰다.
‘……사실, 군역과 재정을 둘 다 잡을 방법이 있지.’
호포제戶布制.
군역을 면제받는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제도다.
특권을 부여해서 식자층의 발전과 배양을 권장하는 건 좋지만…….
모든 양반이 전부 나랏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민간의 자산 대부분을 점유한 채로 면세 혜택을 누리는 게 오늘날 양반이다.
그런데 호포제가 말만 치트키지, 현실성이 없다.
‘조정을 구성하는 게 모조리 양반인데 이놈들에게서 특권을 회수하려 든다면 누가 찬동하겠어?’
찬동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괜히 호포제가 흥선대원군 때나 되어서야 겨우 시행된 게 아니다.
애초에 호포론戶布論 자체는 한참 전부터 있었고, 정신 똑바로 박힌 몇 사람만 옳은 소리 하다가 번번이 묻혀 버렸을 뿐이다.
오늘따라 이 말이 참 깊게 와닿는군.
‘예산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국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400년 전부터 승리해 있던 어록이었다.
* * *
한성부 북촌의 한 저택.
보름 전까지만 해도 광해군 치세의 실세가 머물렀던 이곳은, 그새 한 반정공신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방군放軍할 때 포납布納하는 수량을 올려서 급료와 예산에 보탠다……. 으으음!”
이괄은 거슬거슬한 턱수염을 문질러 대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중앙이 물건값을 올려놓고 우리에게는 푼돈만 던져주겠다는 뜻 아닌가?”
적어도 이괄에게는 그렇게 해석됐다.
임진년의 참혹한 전란 이후 군역을 지는 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자들의 우행愚行으로 전락했다.
덕분에 백성 대부분이 마소馬牛나 논밭, 심지어는 집을 팔아 바쳐서라도 지방관에게 방군을 애걸하게 됐다.
덕분에 형식에 불과한 아록전衙祿田으로는 호주머니가 영 허전한 이들에게 그나마 외방 근무의 보람이 되어주었다.
그런 방군수포에 중앙이 끼다니?
“이런 식의 행패는 용납하기 힘들지.”
고작 열세 살 나이로 실직에 올라 변방의 수령직을 꽤 오랫동안 전전한 이괄이다.
북병사의 신분으로 반정에 공을 세웠고, 외방을 도는 일도 슬슬 질렸겠다, 한양에서의 입신양명을 생각하는 그로서도 정충신의 제안은 내키지 않았다.
“바깥에서 찬바람 맞아가며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인가?”
“소관이 외관(外官)의 어려움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정충신도 천민의 신분으로 시작하여 멸시와 질시 속에서 무관직을 전전했던 사람.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과도한 사욕으로 방군수포를 남용하고 권장하며, 때로는 강제하니 변방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유방留防하는 군졸도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최북단이자, 임진왜란 이후로는 다시 최전방이 되어버린 만포滿浦에서 첨절제사를 지냈던 정충신이다.
군사적 가치를 쉬이 재단할 수 없을 임지마저 파탄이 난 꼴을 보았는데, 그다음에는 선주先主의 명을 받고 적의 수뇌부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왔으니 당연히 경각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노추奴酋가 창대를 돌린다면 과연 반 각이라도 버틸 수나 있겠는가?’
본디 출신부터가 누리기보다는 부려졌던 쪽이다.
방군수포의 폐단만이 아니라 온갖 극악한 부정들이 그와 그 주변을 무수히 할퀴어왔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천운을 얻었답시고 똑같은 패악을 저지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물며 나라가 망할 판에야?
정충신은 금상을 도와 거의했다는 장수가, 그것도 본디 노적奴賊을 대면해야 했을 북병사가 어찌 이리도 안일한지 의아했다.
“외관外官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사가 다 그렇듯 경중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일단은 변방의 방비부터 튼튼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심란해진 정충신은 저도 모르게 말이 조금 빨라졌지만, 그런 동요에도 이괄은 조소만 지을 따름이다.
“허, 그래서 첨사 말대로 하면 만사형통이고 노추는 거꾸러져 죽는다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금상께서는 이제 즉위하였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변방을 함부로 긁었다가 환란이라도 벌어진다면 목숨 하나로는 책임질 수 없을 것이야.”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이괄은 철부지 보는 듯한 시선으로 덧붙였다.
“성명이 그래서 그런가 본데, 이 세상에 충신이 첨사만 있는 게 아닐세. 당치 않은 소리는 이쯤하고 한양에 잠시 지내는 동안에는 조용히 쉬다 가게. 여기서 쓸데없이 힘 빼 봐야 부임하는 길에 후회만 들 테니.”
타이르듯이 말한 이괄은 정충신의 정수리 너머 바깥을 보며 손을 저었다.
축객 이외의 해석은 존재할 수 없는 신호였다.
“…….”
정충신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가, 욕지기처럼 올라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가봐.”
“예.”
정충신은 차마 빈말로라도 다시 인사드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푹 고개를 숙인 채로 일어나 발을 돌렸다.
그리고 호화로운 저택의 마당을 지나 솟을대문을 넘은 뒤, 쿵 닫히는 소리가 나자 허공에 숨결을 흩뿌렸다.
한양의 봄은 생각보다 추웠다.
* * *
이괄의 거처를 나선 정충신은 곧바로 성저십리 외곽의 한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다음 목적지를 정하는 건 무척 빨랐지만, 막상 근처에 도착하고도 저택에 들어서지는 못했는데 집이 숨어 있는 탓이었다.
산어귀 즈음에 세워져서는 주변 나무도 베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한참 헤매고서 입구 앞에선 정충신은 조금 지친 채로 대문을 두드렸다.
퉁! 퉁!
“게 아무도 없는가?”
반응은 빨랐다.
정충신이 물어보기도 전에 오고 있었다는 듯,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솟을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문지기와 내부의 전경이 드러났다.
녹색이라곤 산밖에 없어 삭막했던 한양과 달리 담장을 넘어온 가지와 그 아래 뻗친 음영이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바로 맞은편 사랑채에는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막 집주인이 일어서던 참이었다.
“첨제사 오셨소이까?”
“예. 이 고즈넉한 곳에 너무 큰 소란을 일으킨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하물며 불청객도 아니고, 첨제사의 방문이라면야.”
정충신은 비밀스러운 거처의 위치와 사연이 느껴지는 환대에 묘한 애환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환란患亂이자 재변災變으로 일컬어지는 왜란 중에 악착같이 싸우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천민의 신분에도 당상堂上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
그러나 주변에는 이런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기에, 더욱 깊게 동질감을 느꼈다.
“들어오시오. 어차피 엿들을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말해도 되지만.”
한명련은 실소하고는 두 팔을 펼쳤다가, 떨어뜨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편한 대로 하시오.”
한명련은 상관없다는 듯 안쪽을 향해 팔을 쳤다.
두 사람은 나뭇잎의 그림자가 드리운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사랑방에 들어섰다.
상석에는 집주인이자 순변사로서 품계가 높은 한명련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정충신이 방석을 깔고 자리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조판서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반정 때 장단부사로서 참여한 이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무인인 그였지만, 임지로부터 많은 군사를 데려와 의거 실현에 크게 보탠 공으로 판서직에 오른 참이었다.
한명련과 정충신 두 사람으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원래는 호조판서에 올랐을 이.
하지만 이광정을 대신 호조판서에 올린 왕의 조율로 형조판서가 됐다.
“으음…….”
한명련은 대답에 앞서 침음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겠으나, 한명련은 마저 답했다.
“형판께서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이셨소이다.”
“국가의 법을 관장하는 형조의 수장이 되었거늘, 설마 한마디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북병사 이괄에게 비웃음만 당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정충신의 목소리에는 금세 흥분이 어렸고, 이에 한명련은 진정하라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평생 활대와 말고삐만 잡아 오신 분인데 형판에 제수되었다고 하루아침에 형법과 시국을 두고 능변이 되겠소이까.”
“순변사께서나 소관이 문과에 합격했다고 전하의 일을 맡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문관이 아니라, 장수이기 때문에 전하께서 적임자로 여기고 중임을 맡긴 것 아닌가.
만약 중앙에서 멋대로 이러한 일을 처리하고 처분을 강요했다면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을 일이다.
“오히려 무인이셨기 때문에 고견을 청하려던 것인데…….”
북병사라는 요직에 있음에도 마음은 중앙에 둔 이괄이나, 이미 판서직에 오른 이서나 다들 과거와는 선을 그어버린 듯했다.
한양에 머물면 다들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아니면 두 사람 원래 방군수포라는 폐단에는 별 관심이 없을 뿐인가.
“…….”
정충신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은 애써 참았지만, 비통함은 도저히 금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깊고 밝은 혜안으로 변방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고, 평판이 어지러운 신들을 친히 불러 중임을 맡기셨거늘 조금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합니다.”
정충신이 심정을 드러내자 한명련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어쩌겠소이까? 다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그렇다고 두 분을 제외하고서 군무를 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괄의 위치야 말할 필요도 없고, 문반으로 변신한 이서도 이괄과 마찬가지로 한양에서 의군을 통솔하고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이 왕에게 신임도 받고 중대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
이들에게 어떠한 의견도 듣지 못한 채로 여론을 파악하겠다는 건 결국 겉핥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나 첨제사가 두 분에게 의견을 강요할 위치는 아니잖소? 할 수 있는 만큼만 합시다.”
“전하께서 신들을 친히 불러서 일을 맡기신 이유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뜻은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정충신의 진지한 열의에 한명련은 다시 한번 쓰게 웃었다.
실상, 한명련도 방군수포의 폐단은 뼛속까지 파고들어 아예 조선군의 본질이 되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가벼이 흔들어도 되는 것일까?
정충신이 왕에게 진언했을 때도 반대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아니…….’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다.
만약 이 일로 자신이 개정의 선봉장이 되어버린다면, 폐단을 이용해서 부정하게 축재해오던 무수한 관리들에게 표적이 된다.
이미 비루한 출신 하나만으로 여론의 모진 뭇매를 당해왔다.
선주先主의 과분한 성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변방의 한 섬에 갇혀 있겠지.
‘질타당하는 일이라면 질색이다. 하물며 선주를 쫓아내고 왕이 된 사람에게 선주와 같은 은혜를 기대할 수야 있겠느냐?’
설령 그런 은혜가 보장되어 있어도 겁이 나는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 정충신은 자신과 솔직하게 현황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정 첨사는 주변을 너무 멀리서 보는구나.’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일을 맡았으니 마냥 적극적으로 임하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쪽은 동료 이전에 뭇매가 겁이 나고 금상을 믿지 못하는 인간 한명련이다.
참으로 곤란한 오해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외다.”
“아닙니다. 형판이 전하께서 이 폐단을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지 모르는 탓이지, 순변사께서 미안하게 여기실 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한명련은 떫게 헛기침했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뜻이오.”
“……예?”
정충신의 당황에도 한명련은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아니, 대감!”
“…….”
“대감께서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북병사도 좋은 대답은 주지 못한 것 같은데, 우리 둘이서 어쩔 수 있겠소?”
“우리 둘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원하시고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가볍게 처리할 일은 아닌 듯하오.”
“전하의 의향이 그러시거늘, 가볍다니요?!”
한명련은 재차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첨사께서 너무 흥분하신 듯하오. 일단 마음부터 가라앉힌 다음에, 다시 차분히 이야기합시다.”
“…….”
정충신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침묵이 있고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뒤.
한명련도 닫히다 만 방문을 밀치고 나와, 멀어지는 정충신의 등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