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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4화 (14/380)

인조, 명군이 되다 14화

“생각보다, 사람들이 왕을 마주하기를 버거워하더군요.”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몸뚱이는 아닐지라도, 내용물은 이런 분위기가 어렵다.

“살얼음판 같은 시국의 영향도 있겠습니다만…… 이래서야 피차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주한 사람에게 과자를 내주었다.

단 것이 입에 들어가면 조금이라도 긴장을 덜 수 있을까 해서.

“하지만 경은 그런 이유로 난처해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정충신은 부정하지 못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설마 내가 경을 잡아먹기라도 하겠습니까?”

농을 건네자, 정충신은 금세 지친 얼굴이 되었다. 그동안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한 차례 옅게 숨을 흘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지극히 송구하오나 개정에 대한 유의미한 의견은 수집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앓는 소리란 말입니까?”

“하오나…….”

정충신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짝 말라버린 입술만을 핥았다.

한양에서 군무에 관해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소수다.

하물며 무인인 그가 방문하여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대상은 더욱 적겠지.

애초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정충신은 여론을 충분히 확인하고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군.’

방군수포는 족히 백 년은 묵은 고질병이다. 이제는 조선군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는 누구라도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정충신 같지는 않은 법이니까. 나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한명련을 두고 혼자 온 걸 보면, 한명련도 개정에는 여전히 소극적인가 보군…….’

이서와 이괄에게도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겠지.

여론 파악이라면 확실하게 됐다.

발언력 있는 사람 중에서 개정에 동조하는 이가 있다면 세력이라도 만들어질 텐데, 이래서야 한 사람이 총대를 멜 수밖에 없다.

‘그 적임자로는 정충신이 딱인데…….’

직접 개정을 진언했고, 폐단을 시정하려는 열의도 확실했다.

하지만 정충신은 공적公敵의 굴레를 떠안기엔 너무 유능한 사람이다.

이 일을 건드리면 정충신은 여러 사람들에게 죄인이 된다. 모른 척하고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을, 왜 굳이 소란을 피워서 여럿 피곤하게 만들었냐는 핀잔과 원망이 쏟아질 테니까.

그리고 그런 소리를 내뱉는 자들이, 호란이 터졌을 때는 정충신 아래에서 지휘를 받게 될 거다.

과연 명령 체계가 똑바로 작동할까?

“……신이 중임을 맡고도 소용을 다하지 못하여 전하께 폐만 안겼으니, 부끄럽고 또 한심하옵니다. 부디 직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나는 손을 대강 저었다.

“그런 이유로 첨사의 직을 거둔다면, 한양에 나랏일 하는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마 한동안 말이 없었던 탓이겠지.

“내가 잠시 고민을 하느라 그렇습니다.”

“…….”

“하책下策은 있지만, 경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방법이니 일단은 논외지요.”

아마 정충신도 내가 말한 하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거다.

이제 즉위하여 아직 입지가 불안한 내가 대신 여론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한명련은 개정에 반대했고 일에 적극적이지도 않으니, 총대를 멜 후보란 처음부터 한 사람밖에 없다.

‘……아니야. 한 사람이 더 있다.’

나와 운명 공동체인 반정 패거리인 주제에 대놓고 까불다가 망신 여러 번 당한 인간이 있다.

이귀.

원래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김류와 직을 바꿔서 병조참판이 되었다.

군무에 정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 위치.

‘그리고 지랄맞은 성격을 보아서 무인들에게 공적으로 찍힌대도 쥐뿔 신경 안 쓸 놈이다.’

오히려 무식한 칼잡이들 따위가 함부로 기어오른다고 콧방귀나 뀌겠지.

‘설득만 되면 알아서 다 해결하겠는데?’

전제의 실현이 가장 난관이긴 한데, 그렇다고 안 찔러볼 것도 아니었다.

몇 번 바락바락 대드는 걸 보고 정말 개 같은 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냥개로 쓸 기회가 올 줄이야!

‘미리 김류와 직을 바꿔둔 것도 대단하네.’

이귀의 콧대를 꺾고 김류와 갈라놓을 생각만 있었지,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늘이 나와 첨사를 이렇게 도와주나 봅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병조참판 자리에 성질이 아주 더러운 놈이 있습니다.”

여론 조사에 앞서 달라진 조정부터 파악했던 정충신이다.

그러니 병조참판 자리에 이귀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작 그는 이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다만 하늘이 도와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책下策을 상회하는 방법이 생긴 듯하여, 왕이 일을 떠넘기기만 하지는 않음을 알았다.

“신의 역할은 무엇이옵니까?”

“일단, 그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부터 설득하고 나서 말합시다.”

“……예에.”

정충신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경이라도 나라의 미래와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니 내가 참으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아, 아니옵니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사옵니까?”

정충신의 사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으니 나와 경이 이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

* * *

늦은 밤이 되어도 왕업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좌등坐燈을 놓아두고서 남은 공문을 마저 뒤적이고 있으니, 방문 너머에서 궁인이 고했다.

“왕자 입시하였사옵니다.”

“들라 하시오.”

곧장 방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왕자는, 소현세자였다.

“아버지!”

운명의 장난으로 피는 섞였지만, 본디 인연은 아니었던 자식이다. 하지만 얼마나 애정이 가는지…….

“이리 와보거라.”

나는 소현세자를 무릎에 앉히고, 마침 서안에 놓인 공문을 보여주었다.

-예로부터 제왕이 왕위를 바룬 후에는 유사가 후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원자元子의 나이가 10세가 넘었고 타고난 기질도 숙성하다 합니다. 서연書筵을 열어 강학하는 것이 급하니, 예에 의해 책봉하소서.

예조의 직인이 찍힌 문서였다.

“신하들이 너를 세자로 만들어달라는구나.”

“세자요?”

“내가 왕이 되었으니, 맏이인 너는 세자가 되어 나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해야지 않겠느냐?”

“으응…….”

“내키지 않느냐.”

“아버지께서 계속 왕으로 지내시면 아니 되옵니까?”

“하하하!”

나는 참지 못하고 세자의 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억만년을 살더라도 왕 노릇을 그렇게 하고 싶겠느냐?”

정말로 팔자에도 없던 왕 노릇이다.

차라리 태평성대에 군주가 되어서 꿀이나 빨다 갈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았겠지.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냐?

전쟁은 코앞인데 신하들은 경각심이 없다. 개혁을 마냥 밀어붙이기도 어렵다. 정통성이 있어도 나라를 바꾸기란 쉽지 않은데, 인조는 찬탈자다.

그래도 노력은 하는 중이다.

인조를 그렇게 욕하고도 똑같이 원산폭격을 박아야 한다면, 아마 평생 술은 못 먹을 테니까.

취한 그 날로 한강에 투신해 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비는 운수가 좋지 않고 머리도 나빠서 팔자에도 없던 고생을 하는 중이니, 하루라도 네가 일찍 왕위를 이어주면 좋겠구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소현세자는 깜짝 놀라더니, 몸을 돌아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께서는 둘도 없을 성군이시옵니다. 그렇게 되실 것이옵니다.”

“설마.”

“소자가 왕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화를 낼 것이옵니다. 성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소현세자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얼굴을 묻었다. 나 역시 그런 소현세자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소리가 안 나오려면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야지 않겠느냐?”

도리도리.

“네가 장성하여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이다.”

아비를 잘못 만나서 모진 삶만 살다가 허무하게 가버린 소현세자였다.

내가 불행하게도 인조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소현세자에게는 행운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 행운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소현세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가만히 일렀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러고 싶다만, 못된 신하들이 떠넘긴 일이 많아서 오늘 문안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아니 주무시옵니까?”

“내가 푹 잔다면 일은 계속 쌓이고 나라는 어려워지지 않겠느냐?”

“그래도 잠은 제때 주무셔야 하옵니다. 어머니께서도 그래야 건강하고 키도 잘 큰다고 하셨습니다.”

“하하. 명심하마.”

나는 톡톡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소현세자는 마지못해 일어났고, 맞은편에 앉아 푹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시옵소서, 아버지.”

“그래. 잘 자거라.”

그렇게 소현세자가 인사하고 물러난 뒤.

나는 몇 개의 공문을 더 처리하고, 비답을 작성한 뒤 승전색承傳色을 불렀다.

승전색은 왕과 승문원承文院 사이를 이어주는 전담 내시.

기왕 찾아오는 김이었는지 승전색은 몇 개의 새로운 짐덩이를 내려놓았다.

“송구하옵니다.”

“나랏일인데 송구할 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처리한 공문들을 밀어내면서 덧붙였다.

“지금쯤이면 다들 잠들었겠지?”

“예에. 해가 떨어지고 족히 한 시진은 지났으니, 대부분은 저녁을 마치고 잠들었을 것이옵니다.”

“병조참판을 불러주게. 조용히.”

“……예.”

승전색은 처리가 끝난 공문들을 챙겨서 조용히 물러났다.

하지만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불청객 아닌 불청객을 기다리며, 새로운 짐덩이들을 처리했다.

병조참판 이귀는 한 식경쯤 지나 입궐했다.

자다 깼을 것이 분명함에도, 이귀의 인상은 무척 깔끔했다.

왕에게는 글을 올릴 때도 삼가 재계목욕齋戒沐浴한다는데, 직접 뵈러 올 때야 말해 무엇하겠나.

“어쩐 일로 신을 부르셨사옵니까?”

싹싹한 태도와는 다르게 불퉁한 어조였다. 자다 깨운 불만이 없지는 않다는 건가.

“내가 꾸미는 일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혜법의 확대 말이옵니까? 소란을 크게 벌이셨으니, 팔도 백성 중에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백관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예전부터 선혜법의 확대 시행을 청하는 여론이 많았던지라, 우려하는 목소리는 다소간 있으나 아예 반대하는 이는 알지 못하옵니다.”

다행이군.

그간 선혜법의 확대를 가장 저지했던 존재가 광해군이었던 만큼, 그가 축출된 현재 가장 큰 장애물은 없어진 셈이다.

물론, 조정에는 방납업자들과 결탁하여 부정하게 부를 누리던 자들이 여전히 있지만 선혜법 확대를 반대할 명분도 없고 그림도 나빴다.

자칫 광해군의 충신으로 몰려 삼창을 따라갈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목소리 낼 자는 없겠지.

‘마침 분호조 관리 두 명이 부패 혐의로 안 좋은 꼴을 당한 참이기도 하고.’

이원익에게 맡긴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될 듯했다.

다행스러운 소식이군. 이제 이귀를 부른 진짜 이유에만 집중하면 됐다.

“병조에 임명이 되었는데, 적응은 되셨습니까?”

“예.”

은근히 더 퉁명스러운 대답.

“그렇다면 오늘날 조선군의 고질적인 폐해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군요?”

“조선군의 폐해가 어디 한둘이겠사옵니까.”

“백여 년이나 뿌리 뽑히지 않은 채 미봉으로만 다스려진 폐해가 있습니다.”

“…….”

“율곡이 언젠가 지적한 문제이기도 하지요?”

이귀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헛기침했다.

율곡 이이는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

그런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던 문제를,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귀가 알지 못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놀리는 건 이쯤 해야겠군.’

오늘은 그만 까불어야 한다는 걸 이귀도 알았겠지.

“방군수포를 말하는 겁니다.”

“아, 예에. 알고 있사옵니다.”

알고 있기는 개뿔이…….

“내가 노추의 처단만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는데, 변방에서는 얼마 있지도 않은 병사마저 지방관들이 사사로이 재물을 받고서 놓아주니 과연 대업이 이룩되겠습니까?”

“당장 바로잡아야 하옵니다.”

“말이 통하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전에서 의론을 발하여도, 변방의 장수들이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속으로만 앓아온 지가 오래입니다.”

“왕명으로 시정을 명한다면 어찌 장수들이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방군수포가 해묵은 문제가 되어 오늘날에도 만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말로만 명하여서 하루아침에 고쳐지겠습니까.”

여론도 파악된 참이다.

한양에 있는 놈들만 해도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이귀 이놈도 생각이란 게 없는 듯했다.

“감히 항거하는 이가 있다면 즉각 잡아다 베어버리면 될 일이옵니다!”

이거, 이놈이 나 엿 먹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모두의 앞에서도 누구를 베어야 한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이귀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지.

그래서 부른 것이기도 했다.

“죄과가 있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거둔다면 세간이 나와 폐주를 비교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전하, 말이 통하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사옵니다! 한평생 칼자루나 쥐고 살았던 이들에게는 백 마디의 효유曉諭보다 행동이 어울릴 것이옵니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과연 그렇겠습니까?”

“과연 그러하옵니다.”

확신하고서 답하는 이귀였다.

“그렇다면, 경께서 보여주세요.”

“…….”

“설마, 그렇게 확언하시다가 발을 빼지는 않으시겠지요?”

살짝 도발해 주자 이귀가 발끈해서는 답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신은 오히려, 전하께서 오늘의 하교를 잊지는 않으실까 걱정이옵니다!”

“하하……. 내가 군주가 되어서 대업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경이 정말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마구잡이로 베어대어서 국적이 되지 않는 한에야 어떻게 오늘의 일을 잊겠습니까?”

혹시나 나를 등에 업었다는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설쳐 버리면 나도 감싸주기는 어렵지.

“경은 소신과 배포가 있으니, 걱정이 있다면 오직 열의가 과한 것뿐이지요.”

“기우이시옵니다. 어찌 열의도 없이 대업을 성사하겠습니까?”

“경의 가르침은 경과를 보고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도발 섞인 대답과 함께 손을 펼쳐서 문을 가리켰다.

이귀는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한없이 진지해진 얼굴을 보이며 물러났다.

설득이 어렵지는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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