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화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밤.
한성에 적막이 내려앉은 이때 북촌 어딘가에서는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막 거처로 돌아온 아귀의 집이었다.
따닥, 따닥, 따닥…….
병풍을 뒤로한 채로 이귀는 연신 서안을 두들겼다.
왕의 부름을 받아 집을 나설 때는 최대한 빨리 돌아와 다시 잠들 생각이었다.
왕은 자신을 실망하게 했고, 그와 어떤 말이 오가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문을 나설 때의 바람과 달리 짧은 만남은 이귀를 혼란하게 했다.
‘이건 밀명密命이라고 봐야겠지?’
사관도 대동하지 않고서 내시를 통해 비밀스럽게 만든 자리였다.
‘왕이 내게 일을 맡긴 저의가 무엇일까.’
그는 대업의 달성을 위해 해묵은 폐단의 시정을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금상은 용상을 차치하기 무섭게 자신을 추대한 은인을 모욕하고 모독했던 사람이다.
덕분에 많은 사람 앞에서 몇 번이나 망신당하지 않았던가.
“…….”
이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떠올리기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귀는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 왕은 자신에게 밀명을 내렸으니까.
‘나를 견제하기 위해?’
이귀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무식한 칼잡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적이 될 수 있겠나.
공멸도 수준이 비슷해야 가능한 법이다. 배우지 못해 서반西班에 구속된 자들이 자신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공멸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로 폐단의 시정을 원해서라는 말인가?’
밀명을 내렸다는 건 신용의 증거다.
그렇다면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준 건 가식에 불과했다는 걸까?
뒤늦게 깨달았지만, 금상에게는 보기보다 간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동안 범부凡夫를 연기하다가, 길일이 되어서는 순식간에 반정을 휘어잡지 않았던가.
대비의 처분을 두고 김류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혔으며, 자신은 왕의 의도대로 놀아나야만 했다.
‘사특邪慝한 심성이야. 나를 속이려는 건 확실하지만, 밀명이 가식인지 망신을 준 일이 가식인지는 분간하기 어렵구나.’
그것이 이귀의 판단이었다.
능양군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으니까.
안면몰수하듯 달라진 왕의 태도를 해석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건 인정해야겠군.’
금상의 위험도는 폐주를 능가한다.
하지만 폐주처럼 실정을 일삼아서 위험한 군주인 것이 아니라, 음흉한 속내에 얼마나 많은 뱀이 도사린지 모르기에 위험했다.
‘영의정도 멋대로 임명하고, 또 중대사를 위임했지.’
어쩌면 이것도 비슷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 외에 또 누군가가 왕에 의해 비밀스럽게 놀아나고 있을지 몰랐다.
“…….”
서안을 두드리던 손끝도 어느새 멈춘 채.
이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옛일을 떠올렸다.
한때 세자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이귀가 폐주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극형을 앞둔 친우를 배웅했고, 그 일이 적발되자 유배를 당했다.
부왕의 모진 핍박으로 지쳐 있던 세자에게 바친 충정은, 죄인이 되었다곤 하나 먼 길 떠나는 친우를 위한 인사조차 불허하는 배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유배지로 떠나는 날, 이귀는 배신감에 떨었다.
그리고 배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원한을 곱씹으며 한때 자신이 충성했던 자를 원수로 되새겼다.
“…….”
오래전 일을 상기한 이귀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고민했다.
과연, 지금의 주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좀처럼 잠들기 힘든 밤이었다.
* * *
“옛말로 군사 10만을 동원하면 날마다 천금을 소비한다고 하였사옵니다. 민심이 이미 안정되어서 걱정할 것이 없으니, 호위군을 모두 해산해 돌려보내소서.”
형조판서 이서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호조판서 이광정의 의견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려던 참이었다.
호궤와 공적의 시상도 마쳤으니 더 기다릴 필요가 없지.
그래도 이렇게 먼저 말해주니 고마웠다.
‘방군수포 건도 이런 태도로 도와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이조참판 김류도 이서의 말을 거들었다.
“한양의 백성 중 앞다투어 호위군에 응모한 자들이 있는데, 이는 남의 재물을 탈취하기 위함이니 속히 해산하는 것이 가합니다.”
그런 놈들이 있었어?
“듣지 못한 일입니다. 폐단이 얼마나 심하길래 그렇습니까?”
이서가 대신 답했다.
“기강이 해이한 탓으로 다소간의 분란은 발생하였으나, 대개는 작은 일이옵니다.”
“대가라는 것은 작지 않은 일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지적에 이서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을 아꼈다.
그런 이서를 대신해 김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황한 즈음에 군민軍民이 죄인과 여염의 가택을 훼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진정되었으니 우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의병이 되어서 소란을 틈타 간사한 무리와 함께 도적질을 자행하였다는데, 어찌 지난 일이라고 우려할 필요가 없겠습니까.”
“호위군을 해산한다면 작폐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옵니다.”
그러니 서둘러서 해산하자는 소리겠지만, 해산 이전에 거쳐야 할 절차가 생겼다.
“죄지은 자들을 처벌하지도 않고 일단 놓아줄 수는 없습니다.”
이에 김류가 간했다.
“반정에 참여한 공로가 있는 자들이니 용서하시옵소서.”
“내가 지켜보는 한양에서도 버젓이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인데, 그냥 놓아준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같은 만행을 반복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형판께서 의병을 거두어 각기의 죄상을 분별한 뒤, 무고한 사람들만 놓아주세요.”
“예에.”
“죄 있는 사람들은 형법에 따라서 벌을 주되, 여염을 침탈한 자는 따로 가둬두세요. 내가 일거에 처단하겠습니다.”
“……처단이라 하시면?”
“반정의 대의명분을 훼손한 극악한 종자들이니 모조리 바위에 묶어 강에 던져 버릴 생각입니다.”
여러 신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동안 조용했던 영의정 이원익이 질문했다.
“수장하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예.”
“만세의 법이 있거늘,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도 율 이외의 방식으로 치죄하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나, 내가 오롯이 대의로써 대통을 이었거늘 도적들은 감히 의병을 빙자하고 나의 이름을 팔아 불궤不軌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나를 만고의 죄인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피를 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들을 털어먹은 자들은, 극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
살려서 돌려보낸다고 착하게 살 놈들이 아니니까.
목숨을 붙여놓으면 원래 살던 동네에서도 내 이름과 반정군 경력을 팔아 당당하게 도적질을 이어갈 놈들이다.
“내가 저들의 삼족을 멸하는 대신 본보기만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영상의 말씀대로 하자면 더 많은 자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대뜸 봉변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냐고.
“도적들을 엄하게 징벌하여 기강을 바로 세워야만, 백성들이 나나 경들이 도적들과 한 패거리로서 부와 권세나 누리고자 할거했다 오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신하들이 새겨들었으면 하는 하교를 내린 뒤, 좌의정 박홍구와 우의정 조정에게도 말했다.
“두 의정께서는 형조판서를 도와주세요. 죄가 없는 무고한 의병들은 빠르게 돌려보내고 싶습니다.”
또, 두 사람은 공적을 쌓아야 할 때이기도 하고.
“예에.”
박홍구와 조정은 어찌 사양하겠냐는 듯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의병 해산에 대한 논의는 이렇게 종결되었고, 나는 그동안 조용히 입을 닫고만 있는 이귀를 바라보았다.
성격상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절대로 참지 않는 인간이다.
하지만 맡겨놓은 일을 진행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이런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니 이상했다.
‘……꼴에 보이콧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속내가 궁금했지만, 물어본다고 곧이곧대로 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이귀라면 예외적으로 답할지도?
아무튼, 그가 반정 2회차라도 꾸미는 게 아닌 한에야 일일이 신경 써주는 것도 우스운 짓이었다.
* * *
두 의정대신이 물비린내 진하게 풍기는 마포나루를 방문했다.
죄인들을 강에 수장하기 위해서는 일단 배가 필요했고, 또 배를 띄울 나루도 필요했으니까.
한양과 곧바로 이어지는 마포나루는 어부와 인부들로 북적였다.
나라님이 바뀌는 초유의 사건이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대사가 아니겠는가?
그건 짐승도 마찬가지라는 듯 날짐승과 고양이들도 길가마다 앉아서 호시탐탐 어물을 노려댔다.
“편의는 구할 수 있겠지만 형을 집행하기엔 통제가 어려워 보이오.”
좌의정, 박홍구의 판단에 우의정 조정이 끄덕였다.
“더 넓고 장애물이 없는 곳을 찾아봅시다. 어차피, 더 멀어지더라도 소문만 퍼지면 발 디딜 틈 없어질 테지요.”
즐길 것이 부족한 시대다.
하물며 인명의 가치는 한없이 가볍고 사람들의 비위는 강했다.
박홍구와 조정은 마포나루를 벗어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확실히 전하께서는 민심을 사로잡는 법을 아시는 듯하오. 분호조를 혁파할 때도 한 놈은 내어주지 않았소이까?”
각지에 조도사를 파견하여 악착같이 재물을 갈취했던 분호조의 악명은, 기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이첨조차 능가했다.
그러니 분호조를 혁파하고 부패한 두 관리를 벌준 왕의 평가는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겠습니까? 하나는 죽여서 백성들의 한을 달래되, 하나는 살려 두어서 자잘한 공범들을 잡아들이게 하니, 이보다 더 모범적인 처분도 없지요.”
둘 다 죽였더라면 많은 불한당이 적발을 피해 흩어졌을 테지.
박홍구가 끄덕이면서 답했다.
“내가 그대와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우려한 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예. 전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신경을 써주시지 않습니까?”
박홍구와 조정이 왕을 지지하는 이유였다.
단순히 살려주겠다는 말로 끝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탐학한 자의 처분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반기는 일.
그러니 이를 주재하고 진행하는 관리는 백성들 사이에서 이름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인망을 얻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었다.
“이렇게 죄인 처단하는 일을 거듭 돕게 하시니, 하해와 같은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말이야 보조지, 조정의 내막을 모르는 대다수 백성에게 가장 먼저 들어올 이름은 의정대신인 두 사람의 이름이다.
박홍구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우상의 말씀대로 전하께서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소인배들은 성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질시와 원망만을 품으니 그게 걱정이외다.”
“참으로 동감합니다.”
“그렇지만…….”
박홍구는 말을 잇기 전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푸나루를 한참 벗어난 그들 곁에 인적은 없었다. 박홍구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가만히 당해주는 게 상책이외다.”
“그렇지요.”
“전하께서도 우리에게 이 이상의 역할은 바라지 않을 것이오.”
후의를 믿고 분란을 일으켜 봐야, 왕만 피곤해지고 자신들은 위험해지겠지.
그런 철부지 같은 짓을 하는 건 서인만으로도 족했다.
그리고 굳이 설치지 않아도, 서인에 대한 보복 겸 견제는 이뤄지고 있었다.
분명 반정을 통해 서인의 천하가 되었거늘, 몰락한 북인 잔당이자 퇴물로 전락한 두 사람이 여전히 의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도 소인배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게요!”
“우리의 자리가 당연히 저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조정의 말에 박홍구는 흥,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상이요.”
“그럴수록 우리가 더욱 악착같이 버텨야지 않겠습니까?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오래 살면 욕볼 일이 많다던데, 어디 질릴 때까지 먹어봅시다.”
“아하하!”
박홍구는 가래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근자에 조정이 살얼음판 같아진 이래로 영 웃을 일이 없었는데, 사나운 소인배들에게 엿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원로대신으로서 품위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
박홍구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버티는 이유를 이렇게 포장했다.
“이것이 다 충성이요, 충성!”
삼의정 자리가 모두 서인에게 돌아가면, 정말로 저들의 천하가 되고 만다.
넓고 깊은 뜻을 펼치려는 전하께 하나 된 신권은 입안의 가시와 같을 터.
그 역시, 단순히 온화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살려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정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우국충정이지요!”
“하하하!”
두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삼창처럼 폐주의 충신이 될 생각이 없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참으로 옳았다.
목숨만 붙어 있어도 서인 모리배들의 복장을 터뜨릴 수 있으니, 마땅히 금상의 충신이 되어 구질구질하게라도 버텨야지 않겠는가?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린 박홍구와 조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왕명에 부응할 명당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