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7화
이귀가 나서자 그보다 앞에 선 관리들이 일제히 움찔거렸고. 주변의 신하들은 이목을 집중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
한동안 조용했던 사람이 오늘따라 존재감이 대단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물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금일은 의병을 사칭하는 도적을 소탕하였으나, 아직은 그뿐이지 죄 많은 무리는 여전히 각지에서 도사리고 있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신이 듣기로 변방의 장수와 목민관 중에 백성의 재산을 침탈하는 자가 있다고 하옵니다. 그들 역시 죽어 마땅한 도적이 아니겠사옵니까?”
해산으로 이어지던 분위기는 완전히 냉각됐다.
주변의 신하들은 과격한 주제가 부담스러운 낯빛이었으나, 오랫동안 생각해 둔 바가 있던 나로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폐주의 대에 들어 변방의 관리들이 사적으로 백성의 재물을 갈취하고 군적에서 놓아주는 폐단이 심해졌사옵니다.”
“…….”
“주상 전하께서는 도적이 권위를 빙자하여 민생을 침탈하는 것을 극구 우려하시며, 또 노적奴賊의 처단을 간절히 바라시니, 이 같은 만행은 두고 볼 수 없사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좌에 천천히 늘어졌다.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건 지금 같은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였나?
모두를 숨죽이게 하고도 이귀는 무척 태연하게 보였다.
여전히, 그의 속마음이 어떤지 나로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늦게라도 협조해 주었으니 사양할 일은 못 된다. 나는 기꺼이 제신들을 향해 말했다.
“병조참판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해묵은 폐단을 말해주니, 도적이 한양에만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안다.
현직 관리에게 형을 남발하는 건 이번 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오늘날의 신하 대부분은 선조나 광해군 때부터 관직을 지내왔다.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은 없으며, 다수에게 엄벌을 가한다면 집단적인 반발이 일어나겠지.
‘……찬탈자의 한계로군.’
그래서 인조도 변방의 관리들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능한 측근들을 대폭 배치하여, 만일의 상황을 막고자 했다.
그러고도 일어난 게 반란이다.
하지만…….
‘겁이나 먹자고 시작한 개혁이었나?’
아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당연히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앞으로도 무수한 반발이 이어지겠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적당한 타협이나 하고 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개혁을 품지도 않았을 거다.
“죄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이 땅의 정의다. 폐주 때는 이러한 정의를 저버려 끝내 나라를 망치게 되었는데, 어찌 내가 전철을 밟을 수 있겠는가?”
“…….”
“더군다나 외관들이 사적으로 방군수포하는 폐단을 서둘러 시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달병㺚兵이 강을 넘어왔을 때 대응하지 못하고 내지를 모조리 내어준 뒤에야 허둥지둥 장정들을 잡아다 전장에 던져넣게 될 것이다.”
임진왜란 때 벌어졌던 일이며, 두 차례의 호란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이는 외적을 대비하는 방법이 아니다. 가까운 날에 재상들을 불러모아 이 일을 다시 논의하고자 하니, 비변사에서는 현 상황을 상세히 파악해 두라.”
엄중히 이르고 주변을 돌아보니, 신하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해산들 하시오.”
* * *
아직 이불을 찾을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이귀나 정충신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야 산 하나 넘으면서 진이 다 빠졌는데 얼마나 더 고생하려고?
신하들도 다 쉬라고 돌려보냈는데 나도 쉬어야지. 힐링이 필요한 때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씀은 잠시 접어두고, 이 순간을 즐깁시다.”
간곡한 요청에도 부인, 인열왕후는 꼴불견이라도 본다는 눈빛이었다.
지아비가 왕이 되어서 계단에 앉아 고기를 굽고 있으면, 당연히 이상하게 보이긴 하겠지.
이해는 한다.
이해는.
……이해만.
“왕도 사람입니다!”
사람이야, 사람!
“누가 아니랍니까?”
여전한 눈빛에 싸늘한 목소리까지 들으니 오금이 저렸다.
오리지널 능양군도 이렇게 살아온 건 아니겠지?
어쩐지 인조가 괜히 쓰레기가 된 게…… 음.
그래도 인조를 옹호할 수는 없지.
나에게도 빛과 소금이 되어주는 소현세자의 가족을 파탄 냈다. 주변 사정과는 상관없이 그냥 사람이 안 된 거지.
“아니 그렇느냐?”
“예? ……예!”
거봐, 소현세자도 그렇다잖아.
나는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와서 앉아라.”
“예!”
소현세자가 풀썩 옆자리를 차지하자, 함께 온 봉림대군도 슬쩍 다가와서는 반대편에 앉았다.
처음에는 쾌락 없는 책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앉아 있으니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잘 구워지고 있던 고기를 몇 점 썰어서 앞접시에 담아주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각기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버지!”
“잘 먹겠습니다.”
두 녀석 다 작은 손으로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입을 채우는 걸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나?
나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뒷머리를 쓸어내리고는 또 하나의 앞접시를 채웠다.
그리고 맞은편에 우뚝 선 채 그림자만 드리운 인열왕후에게 내밀었다.
“중궁전 마마께서는 아니 드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곳이 예전에 살던 사삿집과는 다르다는 걸 망각하신 모양입니다.”
“하하…….”
나는 내밀었던 고기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앞접시에 나눠주었다.
본디 모친에게 돌아갔어야 할 고기여서인지, 두 아이는 젓가락부터 드는 대신 인열왕후를 의식했다.
“중궁전 마마께서도 나처럼 너희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모양이시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들어라. ……그렇지요?”
고개를 슬쩍 들어서 인열왕후를 쳐다보니, 자식들이 먹는 것만은 만류하지 못하겠는지 끄덕이는 인열왕후였다.
그제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수저를 들었다.
달그락대는 소리는 한참 이어졌다.
아마 궁궐 전체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을 즈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불어난 배를 내밀고 늘어졌다.
“포식했느냐?”
“예에! 배가 터질 것 같습니다.”
세자가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계속 구워주니, 마다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속이 깊은 것처럼 보여서 말이지.
하지만 세자가 먹어주는 만큼 나 역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 어쩌겠나? 자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봉림대군도 바라보았다.
“너도 충분히 들었느냐?”
“예, 아바마마.”
나는 봉림대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역사가 달라져 소현세자가 나의 뒤를 잇는다면, 효종이 되어야 할 봉림대군은 일개 군으로 남게 된다.
효종은 임진왜란에 이은 양 호란으로 쇠락해 버린 조선을 가까스로 건져낸 중흥 군주로 평가받는다.
‘못난 부왕이 지옥에 가기 전, 우대하라고 신신당부한 권신 김자점을 즉위와 함께 단숨에 처단해 권위를 세우지.’
그리고 그 힘으로 안으로는 대동법을 확대하고 상평통보를 유통하며, 밖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말 그대로의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다.
과연 소현세자는 이 이상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세자 때 두각을 드러냈다가, 막상 왕이 되어서 처참하게 변질한 사례는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다.
바로 폐주가 그런 경우였으니까.
‘……그렇다고 부담을 줄 필요는 없겠지.’
과한 기대나 압박은 쉽게 탈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세자라는 자리의 무게만으로도, 중압감은 넘쳐날 테지.
그리고 내가 아는 소현세자는 왕가의 적장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던 양녕대군이나 임해군과는 다른 인물이다.
‘무작정 걱정할 건 없어.’
걱정할 게 있다면 내 앞날이 먼저겠지.
국운을 걸고 세기의 영웅들과 싸우게 됐으니까.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제국의 창업자들.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옵니까?”
소현세자였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밥…… 말입니까?”
“그래. 선현들께서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니, 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호란이나 새로운 제국의 발호를 당장 소현세자가 알 필요는 없다.
그건 나의 문제니까.
“들어가서 쉬어라. 오늘 아비와 어울려 주느라 고생들 많았다.”
소현세자는 믿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캐묻지 않고 봉림대군과 함께 물러나서 인사했다.
“예, 아버지!”
“그래…….”
나는 다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그동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인열왕후에게 말했다.
“불판은 바로 치우지 않을 겁니다.”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인열왕후가 두 왕자를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번철판 위에 새로 고기를 얹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구우면서 몇 점 주워 먹긴 했지만, 이 좋은 냄새가 온 궁궐에 퍼졌을 텐데 이대로 불판을 접을 수는 없지.
바로 옆집이 대비가 사는 석어당이다.
‘솔직히, 인열왕후가 올 거라는 기대는 안 하지…….’
처음부터 석어당에도 고기를 보낼 생각으로 호오옥시나 해서 한 말이었다.
“일국의 군주가 홀로 처량하게 앉아 고기를 구워도 된답니까?”
인열왕후였다.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마음에도 없이 그냥 해본 말씀이셨다는 말입니까?”
인열왕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 아닙니다! 설마요.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싫어하시는 듯해서……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다는 뜻이었습니다.”
“고기 굽는 냄새가 그치지 않는데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
내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알았던 걸까.
대비에게 줄 고기를 굽고 있었다는 내막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와서 앉으시지요.”
“체면은 차치하더라도 치마가 거추장스럽고, 또 더러워질 수 있으니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서서 드시겠습니까?”
인열왕후는 주변을 쓰윽 돌아보았다.
왕이 머무는 처소라 마당을 지키는 호위도 있고, 그녀 자신이 대동한 궁인들도 있었다.
다들 눈치껏 고개는 숙였지만, 인열왕후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전하의 거사로 아이들의 명운이 세자와 대군으로 바뀌었는데, 부친으로서 지위에 상응하는 체면을 가르쳐 줘야지 않겠습니까?”
“눈치만 보고 살면 재미가 없습니다.”
“일국의 주인과 세자가 어찌 일신의 홍복을 바라겠습니까.”
“고기 식습니다, 중궁전 마마.”
말을 돌리자 인열왕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앞접시에 고기를 담아 젓가락과 함께 건네니, 이번에는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서서 식사하는 모습이 여간 불편해 보이는 게 아니었지만, 착석을 또 권하지는 않았다. 본전도 못 찾을 테니까.
인열왕후는 유난히 작은 조각을 입에 담고는, 씹는 티도 거의 없이 넘겼다.
달그락.
“……더 드시지요?”
“사람이 큰일을 겪고서 달라지는 일이 꽤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나 변모할 줄은 몰랐습니다.”
뜨끔.
“만약 직접 전하를 뵙지 못하고 행적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다면, 절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루아침에 왕이 되는 것이…… 작은 일은 아니지요?”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예…….”
인열왕후는 고개만 까딱이고는 휙 돌아섰다.
서릿발처럼 싸늘하군.
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지.
그동안 고기는 다 구워졌겠다, 나는 인열왕후가 남긴 것도 슬쩍 더해서 한 접시를 만들어냈다.
석어당에서는 다행히도 잘 먹었다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 * *
궐을 나선 이중로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역사에도 남을 일이 벌어졌음에도, 하늘은 평소와 다름없이 화창했다.
이중로는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전달할 물건이 있었고, 또 떠날 곳이 있었다.
여러 사람을 헤치며 한동안 발을 옮겼던 이중로는 도총부의 문간을 넘었다.
그곳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