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화
“이천부사 오셨는가?”
용상도 용포도 빼앗긴 채 후줄근한 백의만을 걸친 폐주는 도총부에 속한 여느 심부름꾼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곳으로 처음 잡혀 와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던 때와 비교하면, 차라리 지금이 나아 보였다.
이중로가 말했다.
“이제는 강화부윤입니다.”
“부윤이라! 출세하셨구려. 경하드리오.”
“그대를 임지로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폐주에게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수다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고개만을 살짝 치켜들 뿐이었다.
“…….”
“한때 이 나라의 주인이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 계속 머무르실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어졌으니까.
이중로는 들고 있던 봇짐을 내밀었다.
“전하께서 먼 길 떠나는 그대에게 내린 고기와 선온宣醞입니다.”
그제야 광해군이 입을 열었다.
“나라님께서 나를 배웅해 줄 줄은 몰랐는데?”
광해군은 흥미가 돋았다. 금상에게 자신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
이쯤에서 옛 주인을 과거로 밀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부지기수인데 반해 살려 둘 이유라곤 오직 필요밖에 없다.
결단에 필요한 건 오직 약간의 충동, 혹은 판단력의 일시적인 결여뿐이다.
과연 떠나야 한다는 먼 길이란 말 그대로일까?
누구나 알 법한 진부한 표현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미리 각오해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베풀 줄 몰랐던 은혜입니다. 하사에 예부터 표하시지요.”
“내가 부윤을 믿고 이천부사에 제수한 건 은혜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동안 그걸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려 하는군.”
장난기 다분한 말에 이중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한때의 주인을 대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중하게 말씀드리지도 않았겠지요.”
“흐음. 그건 맞는 말이군. 그대를 부사에 제수해 두어서 다행이야.”
“저를 부사에 제수한 사람이 그대여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중로가 보따리를 들었다.
그의 불평에 광해군이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고,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주상께서는 경운궁에 계신가?”
“예.”
“경운궁이면 이쪽이겠지?”
이중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광해군은 피식 웃고는 엎드렸다.
그가 하사에 대한 예를 다하자 이중로는 보따리를 건넸다.
“뜨끈뜨끈하군.”
“방금 구워서 그렇습니다.”
“식기 전에 들어야겠군.”
광해군은 마루에 앉아 보따리를 풀었다. 보자기가 흘러내리면서 찬합과 주발이 드러났고, 광해군은 이중로를 향해 손짓했다.
“자네도 같이 들지그래?”
“사양하겠습니다.”
“주상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마다하다니. 혹시 공을 세우고도 외방으로 내친다고 불만을 품은 건가?”
이중로는 코로 숨을 토해내고는, 눈을 떴다가 감으며 찬합 옆에 앉았다.
부족한 수저는 도총부의 관노를 시켜 가져왔다.
먼저 수저를 든 광해군은 찬합의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조금 탔군. 나에게 보낼 고기라고 숙수를 쓰지 않은 건가?”
“전하께서 직접 구우셨습니다.”
“……그래?”
갖은 일을 다 겪어본 광해군이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능양군, 아니, 금상이 자신에게 줄 고기를 직접 구웠다니. 동서고금을 통틀어도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을 테지.
“실로 하해 같은 은혜로군.”
“이제 아셨습니까.”
“……자네는 나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성격을 조금 죽일 필요가 있겠어. 이참에 사직을 해보는 건 어떻겠나? 가진 걸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네.”
“사양하겠습니다. 식사나 하시지요.”
“그래, 그래.”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은 광해군은 음미하듯 천천히 씹었으나, 차차 수저를 놀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도총부에서의 대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몰락한 군주의 결말이란 뻔하다.
챙겨주는 이 하나 없어 관노들에게 인정을 구걸해 겨우 끼니를 때워왔다.
강화도에서의 삶이 길지 짧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을 테니 이때 즐겨야 했다.
“나 때 숙수가 이런 고기를 가져왔다면 상부터 엎었을 텐데. 지금은 이조차 감지덕지하는 신세가 되었군.”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나?”
몇 번 수저를 더 놀리고 잔도 꺾은 뒤.
광해군은 반쯤 누워서는 눈을 감았다.
“주상이 나라 다스리는 실력은 고기 굽는 실력과는 달랐으면 좋겠군.”
“그대보다는 훨씬 잘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나보다는 잘해야지.”
그래야 자리를 빼앗긴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지지 않겠나?
기왕 가는 먼 길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가고 싶었다.
* * *
광해군은 이중로와 함께 강화도로 떠났다.
그가 나의 배웅을 마음에 들어 했을지는 모르겠다.
단지, 한때 이 나라의 희망이었으나 비참하게 몰락해 버린 자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 광해군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뿐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광해군은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대가리를 박는 꼴을 보고 과였다.
과연 그때, 광해군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속으로 조소했거나, 인조 같은 자에게 찬탈당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어떤 쪽이었건, 나는 광해군이 같은 생각을 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을 멈출 수 없었다. 진전을 이어가야 한다.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은 없애거나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이귀를 불러낸 이유였다.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일을 키웠지. ……덕분에 개혁에 많은 관심이 모이게 되었지만.’
이귀의 극적인 발언은 세간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과연 다른 사람에게 창칼을 들이대어야만 도적인가?
폐주의 연이은 실정으로 실망한 식자들도 피폐해진 백성들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더욱이 이귀가 지적한 방군수포의 문제는 모두가 공감할 정도로 만연해진 폐단.
봇물이 터지자 여론은 빠르게 확장됐다.
그리고 시정을 원하는 목소리가 한데 모여, 비변사의 재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귀는 효과적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일을 벌인 건 문제가 있었다.
‘……통제.’
비록 폐단일지언정 외관들은 이를 이용해 부정한 이익을 얻고 있다.
그마저도 권리가 되어버린 지금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이렇게 흐름을 예상치도 못하고서 좌충우돌 헤쳐나가는 건 결과와는 별개로 이롭지 못했다.
“덕분에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파격적으로 말씀하시다니요.”
은근한 추궁에 이귀는 문제라도 있냐는 듯 답했다.
“전하의 명령이지 않았습니까?”
“한동안 조용하셨던지라, 경께서 지시를 잊으신 줄로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내리신 명령이거늘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제가 기가 차다는 투였다.
신하가 왕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확실히 도발적이다. 이러니 내내 김류에게 밀렸지.
“경께서 나라를 위해 힘써주신다는 건 알지만, 나조차 모르게 일을 키운다면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신으로서는 그저 맡긴 일을 이행했을 뿐이옵니다.”
“이보세요.”
“이미 대답이 되었을 줄로 아옵니다. 신이 모두의 앞에서 발언한 건 전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사옵니다. 그런데 더 무엇을 해야 했사옵니까?”
한숨이 흘러내렸다.
“경께서 이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야 그 방대한 재주를 과연 펼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신일 뿐이옵고, 사람을 쓰는 것은 전적으로 전하께 달린 일이니 무엇을 우려하겠사옵니까.”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당당했던지라,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글쎄? 경은 최기崔沂가 무고를 당해 죽은 뒤로 폐주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던가?”
“…….”
“진정 신하를 쓰고 마는 것을 왕의 권한으로 여겼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지.”
나의 지적에 이귀는 굳은 얼굴이 되어서 답했다.
“신이 실언을 했사옵니다.”
깔끔한 수긍과는 상반된 눈빛.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군. 기왕 이렇게 모인 자리 아닌가?”
그러자 이귀는 기꺼이 어울려 주겠다는 듯 허리를 세우고서 말했다.
“예에! 그럼 솔직한 마음을 아뢰지요. 그동안 전하께서는 공신을 모욕하고, 폐주에게 충성했던 권신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셨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왕입니까, 아니면 폐주입니까?”
겁박이나 다름없는 시비였다.
물론, 고작 이런 겁박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다.
“이유는 안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은혜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귀가 씩씩거렸다.
불이 붙은 그는 언행에 주의하지도 않았으며,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게 포장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공신이니까, 막 대하는 거야. 미리 견제해 두지 않으면 자네들은 세력이 너무 커져서 나의 일을 방해할 테니까.”
“왕이 되어서, 심지어는 전하를 옹립한 공신들을 믿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무언가 하려 든다면 거기에 반대할 이유가 있고, 그래서 반대할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지!”
내가 공을 들이는 것들이 다 그러했다.
선혜법의 확대? 방납업자들과 결탁한 지역 유지들과 관리들이 반대할 거다.
백성들을 쥐어짜서 갈라 먹는 돈이 꽤 달달할 테니까.
방군수포 개혁? 역시 유지들과 변방의 관리들이 반대하겠지.
돈 있는 놈들은 자유를 사서 좋고, 권력 있는 놈들은 용돈을 버니 이 얼마나 좋나?
그 부담이 전부 돈도 권력도 없는 자들에게 가중되어서 그렇지. 물론, 어느 쪽이라도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동안 폐주의 방식으로는 실패했으니까!”
광해군은 폐단을 인지했으면서도 시정에 대한 노력은 지시에 그쳤다.
그래서 해결된 문제가 뭐가 있던가?
왕의 지지세력이었던 북인들은 들은 체 만 체 배꼽이나 긁으면서 계속 재미나 봤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길을 취했다.
“솔직한 여론을 감당할 수 없어서 중상모략이나 꾸미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야말로 폭군이나 할 짓이옵니다!”
“허!”
나는 능청스럽게 턱을 긁고는, 물었다.
“결론이 이상하군. 내가 정말로 폭군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피곤한 짓은 안 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두 팔을 펼쳤다.
주변을 보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눈엣가시 같았던 이귀를 은밀히 불러 독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귀 못 알아먹을 걸 각오하고서 말이다.
“문제를 해결할 이보다 간단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저걸로 경의 대가리를 후려치는 것도 좋겠지!”
나는 용상 옆에 놓인 놋쇠 촛대를 가리켰다.
“경 덕분에 손이 아주 간지러운데, 다행히 경의 두개골은 아직 터지지 않았군! 경의 말대로라면, 내가 폭군인 덕에 말이야!”
“…….”
“빌어먹게도 무식한 늙은이 같으니. 이 모든 게, 내가 경의 안위를 걱정해서라는 건 알고 있나?”
이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이 무작정 반복되면 내가 경을 또 쓸 수 없어! 욕받이도 한두 번이지, 조정의 공적으로 낙인찍히면 오히려 자네가 입을 여는 일마다 반대만 심해질걸?”
이귀의 극적인 행보로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상당한 적개심도 이귀에게 향했다. 부정한 이익을 보던 권력자들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일등 반정공신인 이귀를 능가할 수는 없겠지만, 거대한 여론이 만들어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쓴소리만 내뱉었다가 저 혼자 쓴맛만 본 조광조趙光祖처럼 될 수도 있겠지.
“이거 하나만 똑 떼어놓고 생각해 보라고. 내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경의 궁극적인 지향점인가?”
이귀는 답하지 못했다.
“경이 다른 권신이나 간신들처럼 부귀영화만을 생각한다면, 오늘 일로 두고두고 원한을 품어도 상관없어. 난 그런 쪽으로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없으니까!”
“…….”
“하지만 기왕 그 자리에 올라서 조금이라도 책임감이라는 게 있다면, 내키지는 않더라도 협조를 고민해 보는 게 어떻겠나?”
꼭 충신이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귀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말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는 나 혼자만 계속 떠들 판이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대면은 이쯤 하는 게 좋겠지.
“경이 가식은 별로 원하지 않는 듯하니 진솔하게 답했다! 조만간 거세라도 할 게 아니라면 어디 가서 이 일로 조잘대지 않았으면 좋겠군!”
남자답게 말이야.
하지만 꼭 말년에 부랄을 자르고 남성성을 포기하겠다면, 인정할 용의는 있다.
나는 서안에 놓인 간식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흥분을 가라앉히고서 말했다.
“하나 가져가세요. 원래는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대담이 급하게 진행되어서 때를 놓쳤습니다.”
이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상자에서 간식을 꺼냈다.
그러나 간식을 입에 넣지는 않고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여기서 먹고 가는 게 아니라?
설마 기분 상했다고 길바닥에 버리는 건 아니지?
옛날엔 멀쩡했던 광해군이 폭군이 된 이유는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다.
나 역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면, 오리지널 능양군을 능가하는 폭군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쉬시지요.”
나는 이귀를 순순히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간식은 눈에 보이는 곳에 버리지는 않기를 바라며…….
* * *
별당을 나선 이귀는 왕이 내린 간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가 고개를 들었을 즈음,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만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속단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마저도 기만에 불과할 뿐인가.
이미 최악의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귀였다. 그는 지금 결론을 내리는 것 역시 속단이라는 생각에, 왕의 후의를 버리지 않았으나 삼키지도 않았다.
대신 손에 꽉 쥐기만 한 채로 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