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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9화 (19/380)

인조, 명군이 되다 19화

익선관을 털어내자 열기가 가셨다.

인간이 얼마나 독종인지, 상대하다 보면 나까지 흥분하게 된다.

인조도 이귀를 상대로 마음에 병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봤다고 하는데, 이러다간 환자가 두 명이 될 판이다.

‘별다른 일은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귀가 랄부를 자른다면 뒤에서 호박씨 까더라도 성의를 생각해 눈감아줄 수 있지만, 랄부도 자르지 않고 그런다면 곤란하다.

지방관과 변방의 장수들을 자극하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서 말이지.

중앙이 나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진짜로 곤란해지는 수가 있었다.

같은 세력이 두 번의 반정을 일으켰다간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 테니 광해군 2호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대신 발언권이 사라질 테니까.

최악의 상황이지.

‘이 타이밍에 반백 년 뒤 영국처럼 명예혁명 비슷한 짓거리를 했다간 나라가 망해 버린다고.’

호란을 막지 못할 테니까.

반정 패거리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만 다를 뿐, 하는 행동은 광해군 때의 북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죽하면 인조가 찬탈하고 몇 년 뒤, 여전히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시가 나돌았을까?

이런 놈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지.

‘그러니 줄타기를 잘해야 한단 말이야…….’

아직 나는 막 심은 나무처럼 뿌리가 얕은 상태.

중심을 잡는 데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중심이야 잡히겠지만, 그래도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전생에 죄를 잘못 지었나…….”

여기 지옥에 떨어지기 직전에 인조 상대로 일침 몇 방 날리긴 했는데, 그건 죄가 아니지.

차라리 내가 전생의 전생이 인조였다는 편이 차라리 가능성 있다.

“……그럼 나 자신을 욕해온 게 되나?”

생각해 보니 이 가설도 내키지 않았다.

전생에 지은 죄과가 있건 없건, 내가 전생의 전생에 누구였건 지금의 나는 능양군이다.

이 삶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 * *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늘어졌다.

온종일 일만 하면 사람이 쓰러진다고.

다시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쉴 때는 화끈하게 쉬어줄 필요가 있었다.

“전하…….”

내시의 부름에 나는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쉬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주 본격적으로 쉬는 중이다.

공간만은 잘 차지하는 용상을 후원으로 빼내, 모로 드러누운 채 곁에는 석빙고에 보관해 둔 탁주가 상시 대기 중.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찬 음료를 들이켜니 이것이 신선의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이것도 다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하오나 전하…….”

참으로 끈질기다.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로 아는데.

“……뭔가, 그래?”

“왕자군이 왔습니다.”

왕자?

깜짝 놀라 일어나니, 과연 후원 입구 쪽에서 소현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런 방탕한 능양군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일까…….

“크흠.”

자식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었다.

내가 알아채자 소현세자는 그제야 쪼르르 다가왔고, 밖으로 나온 용상과 이슬이 맺힌 주발들을 보고는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이건…… 그래. 심열心熱을 다스리기 위한 치료다.”

“……심열이요?”

나는 신하들을 상대하다 보면 열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솔직하게 말하려다 뒤통수만 긁었다.

자식에게 신세 한탄이라니…….

소현세자가 장성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민망했다.

“그게 말이다…… 으음.”

나는 고민 끝에 적당히 둘러댈 말을 꺼냈다.

“나에게는 저주가 있다.”

“……예에?!”

“음! 선왕께서는 고질적으로 심병을 호소하셨지. 그건 폐주도 마찬가지였다. 선왕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지.”

“……!”

“너는 선왕으로부터 피가 삼대에 이르렀으니 나 같지는 않겠지만, 선왕의 손자인 나는 이따금 이렇게 요양을 해야 심열을 덜 수 있다.”

키야, 저주받은 피라니. 소설 한 편이 뚝딱 나오는구만…….

마지못해 주변을 지키고 있는 궁인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선조가 저주를 받았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근데 뭐 어쩌겠어?

선조는 미친놈 맞고, 맞는 말 한다고 그놈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잠깐?’

나 인조 욕하다가 이렇게 됐지, 참!

‘설마 선조도 보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긴장했으나, 수상한 일이 벌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이 있어 나는 이따금 이렇게 요양을 해야 한단다. 이렇게 심열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선왕이나 폐주처럼 마음의 병을 앓을 수 있으니까.”

“아버지……!”

“걱정하지 말아라. 이렇게 잘 다스리고 있지 않으냐?”

소현세자가 애처로운 눈빛이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까지 걱정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나는 용상을 향해서 말했다.

“이 아비가 드러누울 테니, 너는 아비 위에 드러누워라.”

“예, 예에?!”

나는 깜짝 놀라는 소현세자를 뒤로하고 일단 용상에 모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현세자에게 손짓했다.

나를 아바마마가 아닌, 그보다 훨씬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현세자였지만 예의범절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겠지.

그래서 고민하는 모습조차 가상했다.

“팔 떨어지겠다. 내 팔이 툭 떨어지면 네가 다시 붙여주려고 그러느냐?”

“아, 아니옵니다!”

소현세자는 삐질삐질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드러누웠다.

한창 자랄 때라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버티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기왕 온 김에 푹 쉬다가 가거라. 앞으로는 이렇게 쉴 일이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예에?”

“조정에서 세자 책봉을 위한 길일을 정하기로 했거든.”

예전에 책봉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소현세자는 부담스러워했지만, 녀석을 두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세자가 된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단다. 세자가 아니라 황제나 황태자라도, 본질적으로는 천직天職을 수행한 온 세상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소작농과 황제는 책임이 다르지 않습니까?”

“황제가 만백성을 책임진다고 하여서, 소작농이 책임지는 자신의 일생과 가족의 안녕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지 않으냐?”

“……예에.”

“멀리서 보자면 다 그게 그거일 뿐이다. 지금밖에 못 누리는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바람을 즐겼다. 석빙고에서 가져온 술이 다 미지근해졌겠지만, 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족했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일어나지도 못하지만 말이지.

* * *

“병조참판,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고환을 절제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한 수준으로 뚱한 이귀의 대답에, 나는 만족하고서 말했다.

“다행입니다. 부디 내가 경의 아랫도리가 가진 존재 의의를 지적하여 망신을 주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이미 신을 망신 주고 계십니다.”

“이 이상의 망신을 말한 겁니다.”

이귀는 예법에 걸맞지 않게 눈을 빤히 뜨고서 용안을 마주 보았지만, 나는 대인배라서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야 할 대답이 있기도 하고.

“폐단의 조사는 차질없이 이뤄지고 있습니까?”

“……예. 지금은 한성의 사례부터 취합하고 있으나, 한성에서 자행되는 폐단은 외방과 양상이 달라 시일이 다소 걸릴 듯하옵니다.”

뇌물만 받고 병사를 놓아주면 그만인 외방과 다르게, 한양에서도 그렇게 했다간 수도를 지킬 사람이 없어진다.

그래서 한양에서는 방군수포보다는 주로 대립代立이라 하여 사람을 사서 대신 밀어 넣는 폐단이 있었다.

물론, 이건 이귀의 지적대로 방군수포와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방군수포는 지방관이 뒷돈을 먹으면서 병력도 사라지지만, 대립제는 고용으로 볼 수 있으니까.

물론, 이것을 강요하는 자도 있어서 조사에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영의정께서는 따로 보고할 일이 없으십니까?”

시선을 돌리자 이원익이 답했다.

“각 고을에서 토지의 조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사옵니다. 다만, 지금 행하는 양전은 선혜법을 확대하기 위함이기도 한데 선혜법을 팔도에서 다 시행할 수는 없을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요?”

“시범적으로 선혜법을 확대 시행할 도를 정하여, 그곳에 양전어사를 전부 파견할까 하옵니다.”

이건 도적들을 수장할 때 내가 개인적으로 했던 얘기였다.

이게 다시 공적인 자리에서 이원익의 입에서 나왔다는 건, 대강 합의가 됐거나 합의가 어렵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하세요.”

두 일이 차질없이 진행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군.

“전하.”

좌의정 박홍구였다.

“말씀하세요.”

“모름지기 임금과 신하 사이는 미더워야 하옵니다. 위에서 성신誠信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은 성의로 윗사람을 대하여 나랏일에 힘쓸 것이옵니다.”

“……내가 경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신이야 성상의 과분한 은혜에 항상 감복할 따름이나…… 모두가 깊은 성심에 통감하는 건 아닐 것이옵니다.”

박홍구는 슬쩍 아래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이귀가 말석에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깨무는 이유는, 아프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선문답 같은 소리였지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거다.

“내가 몇몇 손가락을 특히 자주 깨무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가기 때문이니 좌상께서는 우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예에.”

“그래도 의정부의 대신이 되어 조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박홍구가 이귀를 위해 나선 건 일종의 화해 제안이었을 거다.

불같은 이귀가 이런 방식으로 신경 써주는 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한 사람이라도 평화를 위해 힘쓰겠다는데.

‘역시 정승까지 오른 사람이라 그런지 내 마음을 잘 알아.’

후대에는 별다른 인지도를 남기지 못한 그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의정에 오른 데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런 박홍구의 행동이 가식으로만 느껴졌는지 딱딱한 시선만을 보냈다.

갈 길이 먼 사람들이로군.

그런데 내가 이귀만을 갈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싫어서?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단지 이귀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 괴팍함과 신경질로 자신을 고립했으며 덕분에 부담 없이 위계를 세우는 데 써먹기 좋을 뿐이다.

이런 행동을 싫어하는 자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귀와 멀어지려는 자도 있을 테니 공신들의 분열도 유도할 수 있겠지.

‘자존심 강하고 자기주장이 심한 무리와 귀찮은 일은 피하고 대세에 적당히 야합하려는 자들로 말이지.’

괜찮은 구성이다.

내가 일을 벌여야 할 때는 전자를 설득하거나 따르면 되고, 소란을 무마하거나 진정시켜야 할 때는 후자를 밀어주면 되니까.

내정은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문제는 외정이었다.

“문안사問安使는 누구를 보내기로 하였습니까?”

지금 말한 문안사는 명나라가 아닌 모毛 도독, 그러니까 모문룡毛文龍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평안도의 철산부鐵山府 앞바다 섬에 주둔한 그놈 맞다.

반란이 성공한 후 조정은 명나라에 이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모문룡에게 협조를 구하고자 했는데, 명나라가 모문룡을 통해 사실 확인을 하려 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윤허해 주신다면 남이공南以恭을 쓸까 하옵니다.”

“그리하세요.”

“예에.”

남이공이 떠나기 전에 한번 봐야겠다.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회유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거든.

모문룡 패거리는 조선에 암적인 존재다.

걸핏하면 재물을 요구하면서도, 수시로 육지로 나와 백성들을 약탈하니까.

놈들과는 끝을 봐야 했다.

나는 남이공이 저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와줄 간자가 되어주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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