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0화
요동이 함락되자 많은 명나라 유민과 명군이 조선으로 흘러왔다.
모문룡은 이들을 규합한 인물로, 당시 조선의 왕 광해군의 배려로 철산부 앞바다의 섬, 가도椵島에 주둔을 허락받고 동강진東江鎭을 세웠다.
명나라야 조선과 함께한 대후금 동맹의 일원이니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무수한 피난민과 패잔병이 섬 하나에 모이니 식량이 부족해졌고, 이들은 빈번히 섬을 나와 해안을 약탈했다.
모문룡은 이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유민의 구제를 위해 본국과 조선이 보낸 식량과 지원금은 모조리 착복해 버리고서 말이다.
‘이놈들은 군벌이나 다름없어.’
그것도 그냥 군벌이 아니다.
안전한 곳에서 쉬게 해준 은인의 뒤통수를 갈겨대는 미친 군벌이지.
애초에, 그만한 세력을 갖추고도 조선의 국경 뒤에 숨어 후금을 견제하겠다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왜 남의 나라를 방패로 삼는단 말인가. 정묘호란이 발발한 데는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정작, 정묘호란이 벌어지자 모문룡은 조선을 돕지 않았다.
식량도 받고 지원금도 받았으며, 그마저도 부족해 약탈까지 조장해 놓고도 일말의 역할조차 해내지 않은 셈이다.
‘암적인 놈들.’
모문룡과는 반드시 끝장을 봐야 했다.
명나라로 꺼지게 하든지…….
‘아니면 내 손으로 끝장내든지.’
그러나 당장은 방법이 없다.
조정은 반란군 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명나라에서 정통성을 찾고 있었다.
또, 반란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친명배금 행위인데 모문룡을 먼저 공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당장 모문룡을 쫓아내자고 해도 공허한 외침일 뿐이야.’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린다면 모문룡은 역사처럼 두고두고 앓는 이가 되어 설칠 터.
할 수 있는 건 해둬야 했다.
그래서 남이공을 불렀다.
그는 문안사로 선발되어 직접 모문룡과 대면할 자. 반드시 쓸모가 있었다.
“어려운 일을 맡게 되셨는데, 경께서는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호출을 받아 후원으로 끌려 나온 남이공이 허리를 숙였다.
“중임을 맡겨주셔서 망극할 뿐이옵니다.”
남이공은 본디 소북小北의 우두머리로, 같은 우두머리였던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파벌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선조 사후, 유영경이 왕의 유지를 은닉했다가 발각되면서 처참하게 처단당하고, 또 광해군이 봉산옥사와 계축옥사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오늘날 남이공의 세력은 유명무실했다.
한때 당파를 이끌었던 자에게 변방에 주둔한 외국인 장수를 면대하라는 귀찮은 일이 떠넘겨진 이유였다.
이러한 사정을 남이공도 모르지 않을 터.
“하나 가져가세요.”
나는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오늘따라 숙수들이 정성을 더 들였는지 맛있습니다.”
“망극하옵니다.”
남이공은 입을 가린 채 오물오물 과자를 밀어 넣었다.
“과연 숙수들의 실력이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다 폐주의 덕이지요. 경께서는 모 도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짓궂은 농담에 이어 민감한 질문이 이어졌다.
남이공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고, 입술 틈에서는 숨결만이 흘러나왔다.
“트집 잡고자 물어본 것이 아니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예에.”
남이공은 자세를 고치고서 말을 이었다.
“작년 모 도독이 가도에 주둔하여 진을 세운 뒤로, 잡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도독만 하여도 수시로 재물을 요구해 의주부義州府에서는 곤혹스러운 처지인데, 아랫사람들을 잘 통솔하지 않아 백성들이 피해당하는 경우마저 잦았습니다.”
모문룡의 해악이 이와 같았다.
내게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고백.
남이공은 통탄스럽다는 얼굴로 흐으, 탄식하고서 덧붙였다.
“하오나 노적의 발호로 요동의 육로가 끊어지면서, 명나라가 도독에 거는 기대가 많고 또 의지하니 신이 곤란하게 여겨온 지 오래이옵니다.”
“다른 분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요.”
“예에.”
“그렇다고 계속 당할 수는 없지요.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앞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입니다. 상황이 달라질지 모르니 이번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 봅시다.”
남이공은 어찌 이견이 있겠냐는 듯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내가 도적을 싫어하는 건 경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예.”
“한데 모 도독의 사례를 보니, 이 땅에서 조선 사람만 도적질을 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도독이 평소 보인 행보를 생각하면 그는 분명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할 테지요.”
새로 즉위한 조선의 왕은 찬탈자이며, 조정은 그 한계를 쉬운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모문룡은 그것을 인질 삼아 과욕을 부리겠지.
“나는 모든 수단을 고려해 이 도적의 해악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원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안사를 맡게 된 경의 도움이 절실해요.”
“하명하시옵소서.”
“가도에 도착하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수집해 주세요.”
그야, 이렇게 명령 내리지 않아도 남이공은 당연히 정보를 수집했겠지만…….
“나는 분명 모든 수단을 고려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문룡의 패거리를 물리적으로 제거할 생각도 있다.
그것을 전제하고서 정보를 수집하느냐, 아니냐는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최선은 말로써 잘 풀어내는 것입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딱히 기대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어떤 종류의 해악은 반드시 피를 보아야만 제거할 수 있다.
놈들이 칼을 쥐었건, 권력을 등에 업었건, 선공한 반정의 후광을 믿었건 간에 말이다.
* * *
“이보게, 고생이 달갑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고분고분 따라야 할 때일세.”
절친 김신국金藎國이 술상 맞은편에서 충고했지만, 남이공의 인상은 펴지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잔을 꺾은 뒤 말했다.
“모毛 가哥를 보러 가는 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닐세.”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인가?”
김신국은 상상할 수 없었다. 노구를 이끌고 한양에서 멀디먼 평안도까지 가서 도적 수괴나 다름없는 모문룡을 상대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 쓰일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의문에도 남이공은 입을 떼지 못했다.
“내막이야 어떻건, 이 사람이 해줄 말은 같네.”
남이공과 김신국은 한때 소북의 일파를 이끌었던 사람들.
유영경이 숙청당한 후에는 마지못하여 광해군을 따랐던지라, 서인 천하가 된 지금 두 사람의 미래는 한없이 불투명했다.
당장 김신국만 하여도 임해군 옥사 때 받은 훈작을 박탈당한 상태니까.
목숨을 지킬 방패 하나를 빼앗긴 셈이었다.
그리고 같은 일로 공신이 된 사람들이 대로에서 베어진 것도,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건 간에, 태풍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리는 것이 최선일세.”
김신국의 충고에 남이공은 슬쩍 눈을 마주쳤다가, 픽 한숨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단 말인가? 적어도 말은 해줘야 알지!”
“오늘 전하를 뵈었는데, 전하께서 이리 말씀하셨네. 모든 수단을 고려해 도적의 해악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말이야.”
“……으음!”
“모의 해악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하지만 놈이 명국 관직을 지내고 있다는 게 문제지!”
남이공은 술잔을 채운 뒤 단숨에 목을 축였다.
“모를 쳐서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 조그마한 섬에 가둬놓으면 제깟 것들이 어쩌겠나?”
조선 수군이 막강하다는 건 왜란 때 증명됐다.
남해의 병력을 가져다 섬을 포위한다면 모와 수하들은 섬을 나오지 못할 거다. 모조리 죽을 각오를 하고서 도박이라도 벌이지 않는 한.
“문제는 그다음이야…….”
과연, 일을 치른 다음 명나라에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왜란 때 구국의 도움을 준 명의 군사를 친다는 건 염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노적이라는 공공의 적을 둔 상황에서 서로 의지해야 할 나라끼리 오해가 생기는 건 위험했다.
내우외환만큼 확실한 멸망의 징조가 더 있을까?
자칫 조선과 명이 등을 돌리게 되면 정말로 오랑캐의 세상이 펼쳐질 수 있었다.
“한데 전하께서는 칼을 생각하시니!”
본디, 원래 역사에서 인조는 모문룡을 끝까지 방관했다.
무능했던 인조가 내세울 건 정통성과 친명배금 명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역사의 왕은 아니었다.
정통성이나 명분으로는 후금을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명나라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확신도 그의 각오에 한몫했다.
그러나, 미래를 알지 못하는 남이공으로서는 왕의 행보가 위험하리만치 과감하게 보였다.
이는 김신국도 다르지 않았다.
“어렵군.”
“흐! 몸만 고생하면 다행이지, 왜 문안사 소리가 나왔을 때 드러눕지 않아 이 고생인지 모르겠네.”
조정의 눈총이 따가운지라, 와병했다면 최소 유배에 처해졌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낫겠다 싶었다.
어쩌면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그 단초를 놓는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셈이었다.
“아이고오!”
남이공의 탄식에 김신국이 잔을 채워주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처음에 전하께 말씀드리지 그랬나?”
“예끼, 이 사람아! 언제는 납작 엎드리라며?”
“죽어가는 소리 내면서 엎드리라고 하지는 않았네! 따르는 거면 따르는 거지, 외방을 오가는 내내 이럴 건가?”
남이공은 답하지 못했다. 대신 머리만 쓸어 넘기고는, 일침과 함께 주어진 잔을 기울였다.
친우의 말이 옳았다.
남이공은 술기운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내보려 했다. 당장 왕에게 찾아가 한마디 해보자고.
한데 엉덩이가 찹쌀이라도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끄응!”
겁이 난 탓도 있지만, 나름의 변명거리도 있었다.
금상이라고 명과의 불화를 각오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왕이 즉위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나지는 않았으나, 남이공이 보기에 금상은 그리 단순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영의정 이원익과 병조참의 이귀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금상은 무턱대고 일을 벌여 자신의 위태로운 입지를 시험하는 대신 아랫사람을 시켜 개혁을 입안하고 여론을 조성했다. 앞뒤 재지 못하고 무작정 들이박을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다는 증거다.
‘가서 찾아뵈더라도, 내게 모毛의 처리 방법을 묻는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는 남이공은 그저 입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매를 들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금상이 그 같은 결단을 내린 게 아니겠나?
몇 번 자작하며 잔을 꺾던 남이공은 문득 신경질이 났다.
‘평소 노적 눈치나 보던 사람이 왜 패잔병들에게 땅을 내어줘서는…….’
폐주를 향한 원망이었다.
처음부터 폐주가 모에게 가도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놈이 지금처럼 설칠 일도 없었을 테고, 자신이 이런 짐을 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니야.’
폐주가 기대했던 건 모가 패잔병과 유민을 규합해 조선의 국경을 함께 지켜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한 건 모가 아니었던가?
놈은 자리를 내어준 은혜는 모조리 잊어버린 채 이제는 식량을 내놓아라, 재화를 내놓으라 하며 조정과 의주부를 상대로 파악을 부리고 있다. 이게 어딜 보아서 임진년 때 조선을 구원한 명군과 같은 존재인가?
‘모는 그냥 도적놈일 뿐이야!’
반정군을 사칭해 민가를 약탈한 도적들이 모조리 수장당한 게 최근이었다.
모문룡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명군을 사칭하는 패잔병 도적 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응분의 대가 역시 같아야지 않을까?
쾅!
남이공이 거세게 잔을 내려놓자 김신국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그러거나 말거나 남이공은 속으로 모문룡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그가 기댔던 술기운의 힘은, 처음 기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