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1화
남이공 외에 한양을 떠날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그들을 마주하는 게 오늘의 일정이었다.
순변사 한명련과 첨절제사 정충신.
내가 방군수포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부른 장수들.
“두 분께서는 다시 임지로 떠나게 될 텐데, 그간 한양에서는 충분히 쉬셨습니까?”
“예에.”
한명련이 평이하게 답했다. 따스한 한양을 나서 험한 북방으로 돌아가는 게 달갑지는 않겠으나, 왕 앞에서 수긍 이외에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뻔한 질문을 했던 셈인데 정충신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전하께서 맡기신 일이 있음에도 해낸 것 없이 돌아가게 되었으니 아쉬울 뿐이옵니다.”
한명련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어찌 경들께서 해낸 일이 없다는 말입니까. 덕분에 제장의 여론을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성과가 초라한 건 사실이지.
두 사람은 본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나라의 위기라는 천재일우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자들.
현재 관직을 지내는 누구보다도 다양한 부조리를 겪었을 터이기에, 개혁에 적극적으로 임해주리라 기대했다.
‘속단이었지.’
정충신은 기대에 부합했으니 한명련은 아니었다.
종삼품 당하관인 첨절제사 한 명으로는 내가 원하는 여론을 만들기 어려웠고, 그래서 다음 단계는 이귀가 맡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경들의 역할이 끝난 건 아닙니다. 수도에서 아무리 개혁을 외친들,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부질없지요.”
그렇기에 두 사람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했다.
“나는 경들이 변방의 장수들을 잘 관리하고, 감독해 주기를 바랍니다. 너무 뻔한 소리인가요? 머지않아 그렇지 않게 될 겁니다.”
개혁이 궤도에 오르면 온갖 잡음이 쏟아져 나올 테니까.
“순변사, 내가 까다로운 일을 계속 맡겨서 곤란하지요?”
시선을 받은 한명련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옵니다…….”
아니기는…….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직접 찾아와 현황을 보고하고 함께 고민했던 정충신과 달리, 한명련은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증거겠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찾아오기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건 내가 맡은 일로 곤란해하는 건 명백해 보였다.
“내가 다른 무수한 장수를 두고 두 사람과 거듭 자리를 만드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하교해 주시옵소서.”
“순변사와 첨절제사는 이 나라의 가장 밑에서부터 갖은 고난을 겪으며 지금 자리까지 올라오셨지요. 그러니, 이 나라와 조선군의 병폐가 무엇이며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왕이었다.
대부분의 신하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양반이었다.
과연 이 나라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양민과 천민들의 고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당연히 십중팔구는 알지 못할 테고, 알고 싶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경들보다 유능한 장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개혁에 협조할지 확신할 수 없지요.”
한명련과 정충신에게 기대하는 이유다. 두 사람은 최소한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으니까.
오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만 필요할 따름이다.
“순변사께서는 나의 기대가 부당하거나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옵니다.”
한명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속내가 어떨지는 모른다.
본인에게 없는 열의를 내가 만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 필요성을 말해주었음에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대신 다른 사람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 * *
인견引見을 마친 뒤.
한명련은 정충신과 함께 경운궁을 나섰다.
한동안 실내에 있다가 나선 탓일까? 한명련은 불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발 역시 좀처럼 궐문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그런 한명련의 곁에서 정충신이 말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명련은 정충신의 발언이 지적처럼 들렸다.
오죽 전하께서 실망하셨으면 이렇게 불러서 한소리 하겠느냐는.
한명련은 빤한 시선으로 첨절제사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당분간은 서로 보기 힘들어지겠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당부하지 않으셨소이까, 변방의 장수들을 잘 관리하고 감독하라고.”
정충신이 첨절제사를 지내고 있음을 모르고서 한 말은 아닐 거다.
마침 노적과 국경을 맞댄 지역이 함경도와 평안도로 두 곳이니, 하나씩 담당하게 되겠지.
아마 자신처럼 왕명을 받들어 변방을 감독하는 순변사 자리에 오르지 않을까?
“미리 축하하오.”
그러면 이곳 도성에서처럼 곤란하고 부담스러운 일도 끝이다.
신하들 앞으로 불러 지시한 것도 아니거늘, 이행에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누가 지적이나 하겠나?
정충신의 이런 잔소리도 끝이었다.
“나라의 녹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 어떠한 직분에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첨제사야 능히 그러실 것이오.”
하지만 왕이 바뀌기 무섭게 사직부터 생각한 자신은 과업이 무겁기만 했다.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셨습니까.”
“전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잘 준수할 생각이니, 첨제사께선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이다.”
“그것은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님을 아시잖습니까?”
준수한다는 것은 선을 지킨다는 뜻이다. 왕이 기대하는 적극성이나 열의와는 거리가 먼 표현이었다.
“나는 그대와 본성이 달라, 평안하게 지내는 게 유일한 바람이오.”
“불과 수십 년 전에 북방을 자원하셨던 순변사십니다. 그때의 본성은 어디로 가셨다는 말입니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소. 그게 두 번이면 사람 본성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요!”
마치 누군가에게 항변하듯 언성이 올라간 한명련이었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폐주와 전하께서 오롯이 순변사만을 의지하시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한명련은 고개를 돌린 채 콧바람을 내쉬었다.
폐주라…….
그렇게 귀에 잘 들어오는 단어는 아니었다.
옛 주인은 자신을 양반들의 핍박에서 보호해 준 은인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폐주가 그때의 왕과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북방에 있었던 자신으로서는 알지 못할 일이다.
그리고 설령 옛 주인이 변했다 한들 어떻게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옛 주인은 왕이기까지 했는데.
금상은 그런 은인에게 반역을 일으켜 섬으로 쫓아내고 왕좌를 강탈한 자였다.
직접 대면해 보니 각오만큼 사악한 자는 아닌 듯했으나 어찌 한 길이라도 사람의 마음속을 알겠으며, 또 강렬히 새겨진 반감을 가벼이 떨칠 수 있겠는가?
한명련은 그저, 다 벗어던지고 산속 집에서 유유자적 살고 싶을 뿐이었다.
“순변사 영감께서는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말인가.”
“전주前主가 강화로 떠나기 직전에, 전하께서 선온宣醞과 손수 구운 고기를 보내셨다 합니다.”
“……의외로군.”
정충신이 폐주라는 단어 대신 전주前主, 그러니까 옛 주인이라 표현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주는 금상의 집을 빼앗고, 동생에게 자결을 명하였으며, 부친은 그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했음에도 이렇게까지 도리를 다하고 계십니다.”
“…….”
“설마 전하께서 불씨佛氏도 아니고, 원한이 없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혼란한 시기에 즉위하셔서 오롯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안녕을 위해 참고 배웅하셨는데, 순변사께서는 그 백분지 일도 안 되는 근심으로 방황하십니다.”
내막과는 한참 동떨어진 충고였으나 한명련은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인간들은 소관이나 영감이 천것으로 나서 나랏일 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우리 같은 사람이야말로 병폐를 잘 아니 쓰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닐세.”
한명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왕이 전주前主를 배신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옳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친다면 도리를 저버린 건 아니다.
원한이 있음에도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주찬을 보내 가는 길을 배웅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대단하다고 봐야겠구나.’
자신을 크게 써 주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가 자신의 출신 때문이라는 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목적은 그동안 위정자들이 눈에 담지 않았던 무수한 약자들을 위해서였다.
이런데도 금상을 과연 역사의 여느 찬탈자처럼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지.’
명나라의 건국 시조이자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은 홍무제도 시작은 도적이었으며 천하의 찬탈자였다.
……그러나, 왕에 대한 반감을 덜었다고 열의가 막 생겨나지는 않았다.
지독한 무기력의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전하의 명령을 오롯이 따르고자 하여도 간사한 신하들이 내버려 두지 않을 터이니 걱정일세.”
변방에서 만연하게 자행되는 방군수포를 통제하려 든다면, 자연히 무수한 지방관들을 적으로 두게 된다.
그동안 출신 탓에 주변에서 무수한 멸시와 질시를 당해온 한명련이다.
자칫 이 일로 큰 수모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미 경험이 있었던 만큼, 두려울 수밖에 없다.
전쟁과는 또 다른 천재일우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제자까지 된 정충신으로서는 알지 못할 고충이었다.
“영감, 어차피 한 번 살다가 가는 인생입니다. 저번에는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으니, 이번에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 한번 못 걸어보겠습니까?”
“이 일에 죽음까지 각오하라는 말인가?”
한명련의 눈이 가늘어지자 정충신은 제가 더 황당하다는 듯 답했다.
“임란 때는 매일 죽음과 함께하셨던 분이 약한 소리를 하십니다.”
“전장에서 죽으면 명예라도 남지, 이 판에서 죽으면 명예조차 안 남는 수가 있어.”
“명예가 왜 안 남습니까? 전하께서 계시는데.”
“…….”
“그리고 성과를 남긴다면 팔도의 달라진 역사가 영감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임란 때와 비교하면 잃을 건 여전히 목숨 하나뿐이고, 얻을 건 이렇게나 다른데 무엇을 겁내겠습니까?”
한명련은 정충신의 어디에서 기운이 그리 넘쳐나는지 깨달았다.
시야를 이토록 멀리, 높은 곳에 두었으니 힘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런 정충신과 비교하자면 한명련 자신은 한없이 보통 사람에 가까웠다.
영감은커녕 관문에 들어서지도 못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평가를 알게 된다면 코웃음이나 치겠지만, 그만큼 한명련은 정충신의 사고방식에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자네 생각은 잘 알았네.”
한명련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덧붙였다.
“바람도 차가우니 이만 해산하세. 도성을 뜨기 전에 한 번쯤은 더 볼 일이 있을 테니.”
“예. 그럼.”
정충신은 예를 표한 뒤 먼저 해산했고, 그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한명련도 바닥과 딱 붙어 있었던 발을 뗐다.
처음 궐을 나섰을 때보다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지만, 어쩐지 오늘 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