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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2화 (2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2화

임란 후 비변사가 상설화되며 삼의정 이하 의정부 관리들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재상. 아무나 오를 자리는 아니다.

그러니 좌찬성이라면 능히 자부심을 품고 살 수 있는 위치지만, 이상의李尙毅는 그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지내왔다.

반정이 벌어진 뒤부터였다.

이상의는 임란 때 폐주를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으니까.

‘유영경이 죽을 때는 정원공신定運功臣에도 임명되었고…….’

이때는 친공신보다 등급이 낮은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종류가 어떻건 설상가상이었다.

당연히 서인들 사이에서는 엄벌을 내리라는 의견이 나왔다.

때문에 현재 이상의는 여느 공신과 마찬가지로 삭훈削勳당했으며, 군호도 당연히 박탈되었다. 거기에 북인의 중진이었던 사돈이 환국과 함께 숙청되면서 이상의는 목에 걸린 올가미가 점차 죄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보호 수단을 하나둘 빼앗긴 다음, 멀리 유배 보내져 사약을 받는 게 보통 대신을 처형하는 절차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호들갑이 민망하게만 느껴지는 이상의였다.

당장 상석만 보아도 좌의정 박홍구와 우의정 조정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

자신이 죽을 예정이었다면 두 사람부터 숨이 멎었으리라. 하지만 오히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펴졌다.

그 대오에 자신도 합류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이상의는 웃으며 말했다.

“전하를 향한 백성들의 지지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에, 박홍구가 답했다.

“그야 백성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자들을 전부 처단하였고, 그릇된 인습을 타파했으니 당연하지 않겠소이까?”

권력에 빌붙어 행패를 부리던 자들은 목이 잘렸으며 분호조의 혁파와 함께 그동안 부정한 이익을 누렸던 방납업자들은 대거 수감됐다.

반정 때 의병을 빙자했던 도적들은 모두의 앞에서 수장되었고, 망가진 조세 제도와 군역에서 동시에 개혁이 시작됐다.

“주상 전하께서는 이미 준비된 왕이셨다는 증거지요.”

이상의가 호평했다.

거기에 이견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의정부의 노신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은 주어진 상황을 잘 이용했다.

부정한 자들은 그동안 권력자였던 북인과 결탁해 있었기에 부담 없이 제거할 수 있었고, 환국 후 거죽만 남아버린 북인 잔당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의 개혁에 찬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교묘함은 때로 경계할 이유도 되지만, 이상의는 호평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상황의 최고 수혜자였으니까.

‘왕이 백성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에 성공하면, 왕의 보호를 받는 나도 탈 없이 지낼 수 있다.’

서인들의 지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북인 잔당들은 거기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이미 저들의 천하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나운 이유는 그들이 한때 북인이 누렸던 호사를 희망과 달리 그대로 인수하지 못한 탓이겠지.

나도 부귀영화 한번 누려봐야겠다, 하고서 들고 일어났는데 왕은 개혁이라며 놈들의 꿈과 희망을 다 깨부숴 버렸으니까.

당연히 서인 소인배들이 독종처럼 변할 수밖에 없었다.

피라도 더 흘려서 갈증을 채워야겠다는 거다.

‘악독한 놈들.’

그래서라도 이상의는 왕을 더 지지했다.

사소하게라도 힘을 보태야 왕이 조금이라도 서인들 눈치를 덜 볼 테니까.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그 점에서 나와 이 나라의 안녕은 순항이구나.’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백성의 지지는 화수분처럼 한없이 솟아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이상의는 백성의 지지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양전어사의 차출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정원이 적지도 않은데, 다들 외방으로 나가는 걸 꺼리는지라 여전히 결원이 채워지지 않았소이다.”

“나랏일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들 재고 마다하여서야 되겠습니까?”

대답과 함께 다시 서류를 검토하던 이원익이 슬쩍 시선을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는 듯.

이상의가 기꺼이 입을 열었다.

“부자가 사이좋게 공론을 입어서 곤란한 참인데, 아들놈이라도 바깥바람을 쐬게 해주고 싶습니다.”

현재 종사품 응교를 지내는 이지완李志完을 말하는 것이었다.

“직품이 나쁘지 않으니 외방으로 보내도 지방관을 감독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입니다.”

“당사자가 원했다면 진즉 자원하지 않았겠소이까.”

“이 사람이 책임지고 보내겠습니다.”

이원익은 서류를 슥 내려놓고 다시 손을 모았다.

“전하께서 이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는 좌찬성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하외다.”

양전어사의 직무는 선혜법의 확대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선혜법의 확대는 조세 개혁이라는 나라의 백년대계가 걸린 중대한 사업.

“고작 바깥바람이나 쐬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맡지 않는 게 낫소.”

“표현만 그렇다는 건 대감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강제로 차출된 어사에게도 열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차라리, 아비가 설득해서 보낸 편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성의를 보이지 않겠습니까?”

“…….”

이원익은 확답하지 않았다.

이상의가 결원을 채우기 위해 아들이라도 보내겠다는 건 분명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속내도 없지 않아 보였으니까.

이상의의 아들인 이지완은 감찰과 자문을 맡은 삼사三司의 관직을 지내고 있었고, 그래서 쫓아내야 한다는 서인들의 의견이 특히 강했다.

이미 북인 세력과 밀접했던 몇 사람은 파직된 상태.

이런 흉흉한 분위기에서 아들을 건져내 밖으로 돌려보겠다는 아비의 애틋한 자식 사랑도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본인은 자원하지 않았으니…….’

이원익으로서는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좌찬성의 말처럼, 공석을 억지로 채워 보낸 어사라고 열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 응교에게 말해두시오.”

“보내시겠습니까?”

“기어코 결원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응교를 불러서 말해보겠소이다.”

“이 사람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선혜법의 확대는 전하의 의망만 아니라 이 사람 일생의 비원 역시 담긴 사업이니 만전을 기하려는 것뿐이외다.”

“소관이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일익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진심이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아들도 살 테니까.

“알고 있소.”

이원익은 이쯤 하자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의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관리들 십중팔구는 파견을 싫어하고, 지방관을 감독할 정도로 품계가 있는 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니, 어차피 결원은 다 채워지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점수를 따 놓으면 왕이 더욱 입지를 다졌을 때 안녕만 아니라 전화위복도 노릴 수 있을 터였다.

군주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런 이상의의 이 성의를 다한 야망이 실현될지는 참으로 미지수였다.

그는 인조가 즉위한 지 고작 한 해 만에 졸하므로.

* * *

남이공은 처음 면대했을 때와는 다른 열의를 가지고서 가도로 출발했다.

그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다음은 한명련과 정충신이었다.

올 때는 순변사와 첨절제사였던 두 사람은 떠날 때 순변사들이 되어 함경도와 평안도로 떠났다.

그동안 한 사람은 관직이 달라졌고 다른 사람은 마음가짐이 달라진 듯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한 길도 알 수 없다지만, 태도가 그동안 보았을 때와는 달라진 느낌이 들었으니까.

부정적인 쪽은 아니다.

과연 내가 맡긴 일을 잘 수행할까 걱정이었는데…….

보내기 직전에는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양전어사가 파견될 차례였다.

지방관을 상대해야 하므로 최소한 참상관參上官, 그러니까 품계가 종육품 이상인 관리가 열여섯이나 빠질 예정이다.

도성이 한동안 한산해질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런 소강기를 틈타 늘어지는 관리들이 많겠지만,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늘어질 생각이니까.

‘벌인 일 때문에 상소고 공문이고 올라오는 글은 많지, 사람 떠나기 전에 일 맡기겠다고 불러다 면대까지 하지…….’

어째서 왕이 단명하는지 몸소 깨달았다.

괜히 몇 년 멀쩡하게 통치하다가 비뚤어지거나 게을러지는 군주가 생기는 게 아니었다.

나는 왕으로서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 21세기에서 대충 살다가 우연히 왕이 되어서 워라밸을 잘 준수해야 한다.

쉴 계기가 생겼는데도 계속 일을 해버리면 끝내 퍼져 버리거나, 아니면 돌아버릴 테니까.

“그러니 잘 쉬어야 하느니라.”

나의 충고에 소현(예비)세자가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예에…….”

한동안 가족들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던지라 후원에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다들 한구석이 편치 않아 보였는데, 예를 들자면 소현세자는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나의 물음에 소현세자가 어렵사리 답했다.

“책봉을 피할 수 없음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언제가 길일이 될지 모르니, 마음만 졸이는 중이옵니다.”

아…… 그렇지.

이 양반들이 먼저 국본을 세우자 해놓고는 말이 없었다.

“분명 길일은 여럿 받아놓았을 텐데 내게 말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신하들이 바쁜 모양이구나.”

내가 시킨 일들 때문이겠지. 그러니 이해는 한다만, 그동안 소현세자가 잠도 못 잘 정도로 가슴을 졸였다니 아주 괘씸했다.

“너무 부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공허한 당부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소현세자의 머리를 쓸어내리자 이번에는 대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전에 나와 한 약속은 어찌 되었소?”

어어…….

부마의 수배를 말하는 걸 텐데, 이것 역시 명령을 내린 지는 오래였으나 그동안 보고가 없었다.

“제신들이 바빠진지라 미뤄지는 모양입니다.”

당장 세자의 책봉식마저 늦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해명에도 대비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이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소이다. 주상께서는 내게 확언하셨거늘, 군주 된 자로서 이렇게 약속을 가볍게 여겨도 될는지는 모를 노릇이요.”

“약속을 안 지키겠다는 게 아니라…….”

“결과는 같지 않소?”

도저히 할 말이 없어서 애꿎은 머리만 긁으니, 이번에는 인열왕후가 말했다.

“어찌하여 중궁전은 한 번도 찾지 않으십니까?”

“그게…….”

졸지에 일에 치여 가정을 돌보지 못한 가장이 됐다.

하지만 나도 변명은 있다.

왕 아닌 사람이 갑자기 왕이 되어서, 어머니 아닌 사람을 어머니로 모시고, 부인 아닌 사람을 부인으로 대하며, 자식 아닌 아이들을 책임지게 됐으니까.

어느 쪽이라도 어색하고 초보일 수밖에 없는데 나랏일에 치이고 있으니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걸 이실직고해도 미친놈 취급이나 당할 게 뻔한지라…….

나는 개소리나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끼리는 그러는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예?”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못 들은 거로 해주십시오.”

인열왕후는 같잖은 말장난으로 화제 돌리지 말라는 듯 근처의 누군가처럼 팔짱을 끼고서 노려보았다.

가족과 함께 쉬려고 만든 자리에서 이렇게 몰매를 맞을 줄이야…….

벌써 소외당하는 가장의 단계로 넘어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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