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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3화 (23/380)

인조, 명군이 되다 23화

왕이 나랏일과 가정의 중요성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무려 이천만 백성의 삶과 가정 하나다.

비교 대상으로 두기는…….

솔직히, 어렵지.

소현세자에게는 다르게 말했지만, 그건 세자가 어려서부터 책임감을 너무 크게 느껴서였다.

이제는 세자 책봉을 앞뒀다고 잠도 못 잘 지경이라는데 절대로 이렇게는 말 못 하지.

아무튼, 그래서 나랏일에 힘써왔다.

내가 조선에 떨어진 이유도 가정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니까.

인조야 어느 쪽도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인조가 군주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을 특히 비판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랏일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내가 인조처럼 홍타이지에게 대가리라도 박는다면, 그날로 나는 같은 수준인 주제에 입만 겁나게 놀려댄 머저리가 되니까.

하지만…….

막상 소외당하는 가장이 되니 후회가 들었다.

“세자 책봉은 내가 직접 정승들을 불러 그 자리에서 길일을 받으마.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예!”

나의 확언에 소현세자의 얼굴이 펴졌다.

그러자 내게 확실한 대답을 기대하는 시선들이 생겨났고, 나는 먼저 대비와 정명공주부터 마주 보았다.

“부마의 수배도 더는 늦추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대비는 콧대를 치켜들고서 흐음, 하더니 답했다.

“나야 공주가 좋은 배필을 맞이할 수 있다면 돕는 건 어렵지 않소.”

이어서 정명공주를 바라보니 공주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최대한 이른 시일에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흐음. 주상의 기준에서만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도 이른 시일이 되었으면 하오.”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대비였지만, 역시 대비는 여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한 수 접어주는 게 맞았다. 대비의 어머니인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광산부부인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고, 반정의 성공과 함께 급격히 한양으로 상경하면서 기력이 많이 쇠한 탓이다.

대비로서는 광산부부인이 작고하기 전에 손녀의 혼인을 보여드리고 싶을 터.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인열왕후를 마주했다.

“빠르게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인열왕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미 대비가 똑같이 한 탓인지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어떻게든 가정 내부의 불화를 수습해냈군.

중궁전을 방문하는 것을 제외하고, 가정의 일이 나랏일과 직결됐다는 점에서 역설이 느껴졌다.

이게 바로 왕의 삶인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용상에 구속된 채 끌려다녀야 하는.

인조에 의해 농간당한 인생을 생각하니 괜히 슬퍼졌지만, 내게 기대는 가족들 앞에서 이해받지 못할 사정을 하소연하기도 어려웠다.

이게 바로 가장의 삶인가?

……그렇지는 않겠지. 이 세상 어떤 가장도 한숨 자려다 애 셋 딸린 유부남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 * *

“경들께 이런저런 일을 맡겼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소외당하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

도대체 뭔 말씀을 하시는 건가.

좌의정 박홍구는 의아했다.

어쩌다가 단짝처럼 되어버린 우의정 조정이 함께 불리지 않았다는 점부터 이상했지만, 입궐하여 예를 올리고 처음으로 듣는 말이 이런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니?

“약주라도 하셨사옵니까?”

“아니요!”

왕이 단호하게 합리적인 의심을 부정하자, 박홍구는 더욱 당혹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거늘 이 지경이라니!

‘심각한 상태로구나.’

세상이 급변한 뒤 박홍구가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금상이다.

그런데 금상이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로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박홍구 인생 최대의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문제이옵니까? 이렇게 신을 부르셨으니, 신이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알려주시옵소서.”

“작일 오후에 가족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원자에 이어서 중궁과 대비마마까지 각자의 일이 지체된다고 하소연하지 않겠습니까?”

박홍구는 곧장 무엇이 지체됐는지 떠올렸다.

원자야 당연히 세자 책봉식이며, 대비는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채근했겠지.

‘그런데 중궁?’

박홍구는 어렵게 기억을 되살렸으나, 중궁이 어전에나 의정부에서 오르내린 적은 없었다.

아마 개인적인 일이리라.

“세자 책봉이 늦어지는 이유는 다른 일들 때문이기도 하오나, 아직 모 도독의 답을 알지 못하는 탓도 있사옵니다.”

“갑자기 모 도독은 왜 나온단 말입니까.”

“여느 나랏일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 지금 급선무는 전하의 즉위를 황제께 인가받는 것이옵니다.”

“황제의 의향을 알 단서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세자를 책봉하는 건 나의 공인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예.”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책봉 연기에 일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공주마마의 부마를 수배하는 일은…… 다른 사유 때문이 아니오라, 응모하는 반가가 없는 탓이옵니다.”

정명공주는 모친과 함께 유폐되어 혼기를 한참 놓쳤다. 연배가 맞는 사내는 십중팔구가 이미 혼인한 상태.

정명공주가 현 왕의 딸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부마가 되면 명예직 외에는 관직을 지낼 수 없으며, 또 부인을 온 가족이 모시고 살아야 했다.

그 대가로 왕의 사위, 사위 집안이 되어 우대받는 것인데 정작 정명공주의 친부 선조는 졸한 지도 십수 년이었다.

부담만 있고 보상은 불투명한 상태.

설혹 노총각이 있는 집안이라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각지의 수령들에게 부마의 수배를 명한 지 오래이나, 아직 좋은 답이 오지 않았사옵니다.”

그렇다고 부마를 구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는 것도 일차적인 조처가 될 테고, 더 직접적인 수단으로는 양반가의 사주단자를 뒤져 적당한 총각을 부마로 삼는 법도 있다.

기실, 그 같은 제안은 이미 있었다. 부마 수배에 난항을 겪으리라는 건 누가 보아도 명약관화했으니까.

하지만 왕이 반대했다. 혼례는 인륜지대사이니 강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박홍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문제는 왕의 판단이 아니라 정명공주가 처한 상황에 있을 뿐이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신이 의논을 펼치겠사옵니다.”

그렇다면 왕이 지시를 번복한다는 소리는 안 나오겠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아두겠습니다.”

사양하는 왕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일까?

박홍구는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뾰족한 수가 있었다면 진즉에 고했으리라. 그럴 능력까지는 안 되었던 박홍구로서는 그저 지지만 할 따름이었다.

“의향이 달라지신다면, 언제든지 명해주시옵소서.”

왕은 마음이 풀렸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박홍구는 자신이 불린 이유를 깨달았다.

중궁의 사정은 자신이 알지 못했으며 부마의 수배는 왕에게 이미 생각이 있었다.

소거법을 적용하면, 왕이 처음 불평했던 것 중에 단 하나만 남는다.

“책봉을 강행하려 하시옵니까?”

“도독이 명을 대표하는 건 아닙니다.”

“하오나, 도독의 전언에 따라 명나라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겠사옵니까?”

즉위의 공인만으로도 모문룡은 굵직한 건수를 잡은 상태였다.

여기에 또 공인받아야 할 세자 책봉까지 더해진다면 모문룡은 더욱 기고만장해질 터.

매수에 더욱 큰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도독에게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겠사옵니까?”

모문룡은 패장에 불과했다.

차라리 제 목숨을 끊었다면 수치는 덜었겠지만, 그만한 패기나 염치가 존재했다면 배려로 섬을 차지한 주제에 상전처럼 굴지도 않았겠지.

그야말로 손가락 사이에 박힌 가시 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생각만 하겠다는 말입니까?”

“총병에도 제수된 자이니 별다른 수가 없사옵니다.”

“아니요.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인과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그 도적놈에게 머리채라도 붙잡힌 것처럼 질질 끌려다니니, 명에서도 효용을 인정해 총병으로 제수한 게 아니겠습니까?”

분명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으리라.

그러나, 박홍구로서는 왕의 과감한 의견에 가벼이 동조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허울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의정이니까. 수레가 내리막길을 타고 내달리지는 않을지, 걱정은 해야 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왕에게 수레는 이미 멀리 떠난 듯했다.

“내가 그놈을 잡아다가 다른 도적들처럼 목을 치거나 강바닥에 처박는대도, 명이 입이나 벙긋하겠습니까?”

……아마 흐지부지 넘어가고자 하겠지.

되살리지도 못할 패장의 복수를 위해서 우방국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까.

하물며 지금 명나라는 후금이라는 강적에게 산해관을 위협받고 있었다. 동맹 존속의 대가로 모문룡의 목숨이라면 오히려 싸다고 해야겠지.

그 결과로 조선이 도적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좋은 일이다.

“하오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사옵니다.”

“허, 설령 명나라가 눈깔이 뒤집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한들 무슨 여력이 있겠으며, 또 무슨 길이 있어서 아조를 범접하겠습니까?”

요동이 후금에게 넘어가 육로는 끊어진 마당이다.

바닷길도 길이라면 길이겠으나, 원방 열도에서 창궐하는 오랑캐조차 물 위에서는 조선을 이기지 못했다.

자국의 무수한 인명을 부질없이 분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바닷길로 조선을 시험하는 건 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조선을 시험할 기력이 있다면 요동이 여전히 후금의 수중에 있지도 않았으리라.

분명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역할이 달라지는 건 아닐 뿐이다.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은 항상 만약을 걱정해야 하옵니다. 하물며 종묘사직을 맡게 된 전하시라면, 더욱 조심해야지 않겠사옵니까?”

“그렇다면 내가 많이 양보하겠습니다. 모씨 도적의 목을 당장 치지 않을 테니, 적어도 그놈 눈치는 안 보도록 합시다.”

왕의 과격한 주장에 정신이 팔렸던 박홍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려고 그동안 도독을 죽이니 마니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간 발언들을 책봉 강행을 위한 밑그림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빠져든 게 아닌가?

“…….”

박홍구가 심란해지거나 말거나 왕은 지시했다.

“길일을 잡아주세요. 원자가 눈을 빨갛게 하고서 돌아다니는 건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예에.”

처음 왕을 마주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해 버린 사람이 왕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신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대담이 일단락되자 왕은 늘 그랬던 것처럼 과자 상자를 내밀었고, 박홍구는 과자 하나를 집어 먹은 뒤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 * *

간밤에 박홍구를 불러 잘 말해놓았다만, 바로 다음 날이 되어서 반응이 올 줄은 몰랐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일찍 국본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국가에서 우선하여 거행해야 할 일이옵니다. 원자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고, 전하께서도 윤허하신 바가 있으므로 유사로 하여금 의례를 준비하게 할까 하옵니다.”

박홍구와 면대하고서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부디 이귀가 보고 배웠으면 할 정도로 쾌속한 부응도 놀라웠지만, 다른 의정부 대신들과 육조 판서들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아무리 세자 책봉은 이미 말이 나왔던 사인이라지만, 그동안 한없이 늘어져 왔다.

이렇게 갑자기 몰아치면 당황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거늘.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을 다 나눴단 말이야?’

박홍구의 면면을 세심히 살펴보았으나, 무리한 기색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의정을 지낼 수 있다는 건가.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신들 이하로는 놀라워하는 사람이 다수였지만, 이견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세자의 책봉은 좌상께서 책례도감 도제조를 맡아 진행해 주세요.”

“명을 받들겠나이다.”

“책봉례 추진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의례 절차와 참석자들의 복식을 규정해 주셔야 하옵고, 책봉 때 사용할 죽책竹冊 및 옥인玉印을 승인하셔야 하옵니다. 또한, 세자에게 내릴 교명敎命을 작성하셔야 하옵니다.”

많군. 하지만 이마저도 박홍구가 대략 말했을 뿐, 전부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내가 보채서 시작한 일.

박홍구가 성실하게 임해주었으니, 나 역시 성실하게 임해주어야 했다.

“의전은 전례를 참고하되 필요하다면 폐주 때라도 예외를 두지 말고, 절차는 감하는 것이 좋다. 의례에 사용할 기물은 최소화하라.”

허리띠 졸라매야지.

“양식이 너무 간소화되면, 세자의 권위가 똑바로 서지 못할 것이옵니다.”

“세자가 되더라도 곧장 큰일을 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권위는 그동안 세자 본인이 행위와 모범으로 세우면 될 것이다.”

“예.”

“죽책과 옥인의 승인은 실물이 나온 뒤 다시 논할 일이고, 교명은 미리 작성하도록 양식을 올리라.”

“따르겠사옵니다.”

빨라서 속이 다 시원하군.

책봉례는 개혁과 다르게 여론 눈치 볼 일이 아닌 덕이겠지.

양전어사 파견으로 사람 여럿 빠지는 시기에 행사를 추진해 미안한데, 나도 원래 쉬려다가 못 쉬게 되었으니 부하들도 똑같이 못 쉬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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