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5화
책봉례가 있던 날.
폐세자 퇴출 후 비었던 국본國本이 채워졌음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참석자는 왕실, 그리고 종친과 대신들이었다.
이들의 축하야 행사 때 이미 있었다지만, 그야 공적인 영역에서 의례적으로 한 것.
이번 진연進宴은 의미가 달랐다.
‘……그렇게 생각해 달라더라고.’
신하들이.
없는 살림에 무슨 잔치냐, 말아라, 하고 사양했는데 기어코 진연을 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마지막으로 한 말에 내가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책봉례도 축소하고, 관례冠禮와 입학례入學禮도 약소하게 치르기로 했는데 사적으로 축하하는 자리마저 생략한다면 세자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관례는 쉽게 말해 성인식이고, 입학례는 세자나 종친이 성균관에 입학할 때 행해지는 의례다.
원자가 책봉례를 통해 세자라는 중임을 맡음으로써, 성인의 대우와 그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을 자격이 생겼다고 봤기 때문에 두 행사도 책봉례에 이어서 행해졌다.
아무튼, 이원익의 말은 간소화된 행사와 절차들이 중외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세자를 박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내가 할 말이 있겠는가?
까라는 대로 깔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좋아하니 다행이지.
“사, 사양하겠습니다……!”
“장차 신하가 될 사람이 마음을 담아 올리는 술입니다. 그런데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까?”
“……조금만 주십시오.”
세자의 질색에도 이원익은 잔을 끝까지 채워주었다.
이러려고 기어코 진연을 연 건가, 싶기도 하고.
세자가 술잔을 어쩌지 못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기에 나는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영의정이 말은 저렇게 해도, 춘추가 꽤 되는지라 막상 네가 왕이 되기 전에 갈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따라주는 술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마셔보겠느냐?”
“전하!”
“만약 영상이 나보다 오래 살아서 세자가 왕이 되는 걸 본다면, 그야말로 경하할 일이지요. 내 그러기를 바라니 술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이원익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잔을 내밀었다.
“아니, 영상께서는 내가 영상보다 먼저 죽기를 바랍니까?”
“그, 그게 아니오라! 전하께서 내리시는 술을 사양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받아도 문제, 안 받아도 문제다.
“영상께서 금쪽같은 세자를 괴롭히셨으니 마땅히 벌을 받으셔야지요. 자! 이 잔 비우신 다음에는 왕을 저주한 죄로 벌주 한 잔 더 받으셔야 합니다.”
“…….”
이원익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잔을 비우고는, 다시 채워진 잔을 비웠다.
“망극하지요?”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곧장 다른 대신들도 바라보았다.
“경들께서는 세자에게 잔을 아니 올리시겠습니까?”
좌의정 박홍구와 우의정 조정, 그리고 그 외에 대신 중 적잖은 사람이 공론을 입고 있어서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것을 영의정 이원익이 먼저 당해주고 풀어준지라, 다음가는 박홍구가 술병을 든 채 손을 모으고서 일어났다.
“하오면, 신이 세자에게 술 한잔 올리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는 전하께 벌주를 받으면 되는 것이옵니까?”
“역시 좌의정이십니다!”
박홍구는 작게 웃으며 세자에게로 나아갔다.
덕분에 잔을 또 받게 된 세자는 죽을상을 지었지만, 그렇게라도 들뜬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식에게 술을 먹이는 게 나의 통념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지금은 음주가 교양인 시대니까.
이런 세상에서 왕이 될 사람이 술을 배우지는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태종조차 양녕대군을 폐한 뒤 차기 세자를 뽑는 과정에서, 둘째인 봉림대군은 술을 못 마셔서 안 된다고 했을까.
어쨌거나, 세자는 아비가 더 꼬장하지 못한 책임으로 계속 술을 받아야 했다.
신하들이 서열 순서대로 나와 얼굴도장을 찍어주니 이것도 좋은 교육이지.
술이 많이 들어가서 다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그런데, 전하께서는 아니 드십니까?”
“……어?”
* * *
“아이고, 두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서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궐이 아니라 경운궁의 즉조당이었는데, 내가 알아서 돌아온 것인지 내시들이 데려다 놓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신하들이 간밤의 진연을 흔치 않은 일탈의 기회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왕 한번 고생시켜보자면서.
이 양반들아, 나는 이미 당신들 때문에 잔뜩 고생하고 있다고.
“게 아무도 없느냐?”
목이 말라 문밖을 향해 일렀더니 환자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재차 이르려던 차, 밖에서 내시가 잘도 알아듣고는 답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시원한 물 한잔 떠다 주시게.”
“예에……. 해정탕解酊湯도 같이 올릴까요.”
이름만 들어도 해장탕 비슷할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마다할 상황은 아니지.
“들이시게.”
“예.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내시는 먼저 시원한 물 대접부터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틈틈이 들이켜며 맹물에 과자를 안주 삼아 속을 달래고 있으니, 이어서 전설의 해정탕이 나왔다.
“……이건 해장탕이 아니라 그냥 탕약이네.”
새카만 물이 대접에 담긴 채 찰랑거렸다.
그래도 기왕 내온 것이니 마시자, 하고 대접을 기울이니 확실해졌다. 해정탕은 미관만 아니라 냄새와 맛도 탕약이었다.
“어으윽!”
찌그러지는 혓바닥을 과자 몇 개로 달래니, 그래도 속은 든든해진 게 해정탕의 효과가 없지는 않은 듯했다.
아마도…….
결국, 해정탕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방문을 열고 외부까지 터놓았다.
몰아치는 바람을 쐬니 그제야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간밤에 만취하고 넋을 잃은 덕으로, 해는 어느새 중천을 넘어가는 중.
다행히 공식 일정은 미리 비워두었지만, 문안은 그럴 수 없었다.
‘……늦은 김에 그냥 째?’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즉조당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대비가 머무는 석어당이 나온다.
내가 기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늦게나마 문안을 기대하고 있는데 안 가버리면 분명 후환이 되겠지. 그건 부담스러웠다.
마침 할 말도 있었고.
* * *
“아무튼, 밤에 인사드릴까 고민하다가 왔습니다.”
“……주상께서 문안을 미루지 않고 찾아주니 고맙소. 어째서 내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날 때부터는 아니었지만,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게 됐으니 개인적인 이야기도 드린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나랏일을 대비마마와 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비는 눈을 빤히 뜨고서 마주 보았다.
“내가 주상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유념한다면 주변이 오래도록 안녕할 거요.”
“그렇다면, 대비께 드릴 말씀이 있었지만 삼가야겠습니다.”
“……?”
대비는 유치하게 이러고 싶냐는 듯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약을 올리듯이 물어봤다.
“……궁금하십니까?”
“주상이 내게 이러는 걸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거요.”
“그리고 대비마마께서는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 했는지를 영원히 알지 못하시겠지요…….”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말하니 대비는 조용히 팔짱을 꼈다.
이만하면 충분히 놀렸지.
처음부터 문안 외에도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인지라, 나는 더 늘어뜨리지 않고 담아둔 말을 꺼냈다.
“대비마마께서 지금 바라시는 건 공주가 혼인하여서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시는구려.”
“일전에 고막에서 피가 흐른 뒤로 신하를 불러 물었더니, 기어코 부마가 안 구해진다고 합니다.”
“……그건 참 큰일이오.”
“…….”
“고작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놀리신 거요?”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충동을 애써 참아내고서 답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았지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건 알지만, 아무 사내나 잡아다 부마로 삼아서야 공주를 잘 모시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오?”
“공주가 직접 궐 밖으로 나가 총각을 간택하는 겁니다.”
“……?”
대비는 눈가를 찌푸린 채 입도 살짝 벌렸다. 그 틈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지만, 어쩐지 내 고막에서 그게 뭔 개소리냐는 항의가 환청처럼 아른거렸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부마가 된 자 중에서 자기 가문과 목숨을 걸고서 공주를 박대한 자도 있습니다.”
“그런 미련한 자를 간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오.”
“그리하더라도, 팔자에 그냥저냥 순응하는 부마만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모름지기 백지장도 맞들어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요.”
마음도 없이 억지로 이어주어 꾸리게 된 가정이 행복하긴 어렵다.
“그래서, 공주가 저잣거리에서 물건 사는 행인처럼 직접 총각들을 보고 부마를 간택하라?”
“예!”
대비는 무릎 위에 손을 모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왕실과 공주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먼저, 왕실의 주인은 저이니 왕실의 체면은 제가 신경 쓰면 됩니다. 둘째로, 이런 저조차도 시간을 되돌리는 법은 모릅니다.”
지옥에서 흑마법을 배운 인조라면 모를까.
그렇다고 내가 지옥에 가고 싶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공주께서는 나이가 너무 많으십니다.”
대비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서 말했다.
“당사자가 여기 있네.”
공주도 동석하고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논할 수는 없잖아?
“알고 있습니다.”
“당당하구려.”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려는 상황입니다. 하얀 거짓말이 시간을 되돌려 주지는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허락을 구하듯 공주를 바라보았다.
“……예.”
“이 사람의 계획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야 가릴 처지가 아닌 듯하니, 두 분의 의향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도 당사자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게 이 자리에 끌어들인 이유인데.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의미가 없다.
“……오랫동안 궐을 나서지 못해, 직접 거리로 나서는 건 민망할 듯합니다.”
공주가 사양하자 대비가 추임새를 넣었다.
“거 보시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꺼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수년 만에 처음으로 나서는 것인데,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하물며 장의長衣까지 걸칠 텐데요.”
장의는 본래 남성들이 겉옷으로 걸치던 의복이었으나, 차츰 여성들이 외출용으로 덮어쓰게 되었다.
정수리까지 걸쳐놓고서 얼굴만 달랑 내놓는 그거.
“그래도, 공주가 거리로 나와 직접 부마를 구한다는 말이 돈다면 얼마나 망신이 되겠소?”
“그것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공주라고 이마에 ‘공주’하고 새겨놓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공주께서 둘러보시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동행인을 보내 상대방의 혼인이나 약혼 여부를 알아보면 되지요. 직접 나서실 필요가 없습니다.”
“……흐으음.”
대비가 보기에 그건 나쁘지 않다 싶었는지, 콧바람을 길게 늘어뜨렸다.
“구태여 이런 방법을 제안하는 것도, 공주께서 행복해지기를 저와 대비께서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고, 대비는 현실을 부정하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래도 공주께서 이 방법을 꺼리신다면, 마찬가지로 공주의 행복을 위해서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어서 공주에게 말하니, 공주도 고민이 되는지 가타부타 없이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대비도 보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바로 의복을 챙기시지요.”
“……예?”
굳이 준비랄 게 필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굳이 지체할 필요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