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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6화 (2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6화

권유에 따라 정명공주는 궐을 나섰다.

말을 꺼낸 나 역시, 한 번은 동행하는 게 좋을 듯해서 뒤를 따랐다.

목적지는 유력가들이 모여 사는 북촌北村.

처음에는 사람이 많은 운종가雲從街로 갈까 했지만, 그곳은 너무 번잡하지 않겠느냐며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따라 나오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딸이 어떤 남자를 원하는지, 어미로서 궁금해하지도 말라는 말이요?”

대비가 당당히 말했다.

관심이 가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너무 사적인 영역까지 끼어드시는 건 아닐는지?

“혹시 자식을 소유물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내 딸이니 내 딸이라고 하지, 그럼 공주가 주상의 딸이오? 전하께서는 본인 자제 교육이나 힘써주기를 바라오. 세자도 생긴 마당에.”

“세자는 알아서 잘합니다!”

갑자기 나온 세자 타령에 한마디 쏘아붙이자 대비가 놀라서 답했다.

“주상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소.”

말끝이 물음표라도 찍힌 것처럼 올라가는 게, 마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는 느낌이었다.

“세자는 책봉례를 앞두자 잠들지 못해 눈이 붉어졌던 아입니다. 그만큼 세자 자리의 막중함을 잘 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알아서 잘하지 않겠어?

“알겠다니까 그러오.”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몰랐더라도 이제는 알겠구려. 주상이 자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주상이라면 세자빈의 간택을 전적으로 세자에게 맡길 수 있겠소?”

뚱딴지같은 되물음이었으나 입술은 열리지 않았는데, 대비가 여유롭게 말했다.

“아니라면, 그 이야기가 맞는 듯하오.”

끄응…….

시선을 옮기니 정명공주는 북촌의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나와 대비가 무어라 떠들건 일절 관심 없다는 듯, 눈이 동그래져서 주변 둘러보기 바빴으니까.

장성할 때까지 대비와 함께 갇혀 살아온 정명공주다.

‘운종가로 갔으면 눈알이 튀어나왔겠어.’

그래서 원래는 운종가를 가려고 했다.

먼 미래에 종로라 불리게 되는 곳.

사람 많기로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아서, 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부터가 사람이 구름雲처럼 많아서였다. 오래 갇혀 지낸 사람이 외부의 세상을 접할 장소로는 최적이지.

‘대비가 반대했지만 말이야…….’

공주의 눈알이 정말로 빠져서 굴러다닐 걸 걱정했던 건 아닐 테고, 공주 신분에 거리의 시정잡배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게 껄끄러웠을 터다.

그에 반해서 이곳 북촌은 대감, 영감 소리를 듣는 고관대작들이 발에 치이는 부촌.

대비가 어떤 부마를 원하는지 그려졌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부마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어째서 말입니까?”

“나와서 한참 기다린 듯한데, 참한 도령은커녕 오가는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잖소?”

“그야 이곳의 가장들은 십중팔구 등청했을 테고, 자제들이야 있겠으나 부마로 삼을 만한 참한 도령이 백주에 골목을 방황하지는 않겠지요.”

“그럼 이 방법은 틀린 게 아니요?”

나는 대답에 앞서 정명공주를 보았다.

“공주는 부마를 구하는 게 시급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처음으로 궁 밖에 나와 정신이 팔렸을 뿐이요. 금세 흥미를 잃겠지.”

“이 순간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외유나 하고자 나온 게 아니요.”

대비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이어진 질문에도 단호하지는 못했다.

“공주가 이토록 즐거워한 적이 전에도 있었습니까?”

“…….”

“대비께서는 외유 나온 기분이 어떠십니까.”

“나야…….”

대비는 말끝을 늘이다가, 답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주상이야말로 어떠시오?”

“저야, 바깥으로 나오니 상쾌하지요.”

“나도 마찬가지요. 원래는 궐 밖의 사람이었다가 선대왕을 모시게 되면서 입궐하였으니.”

오래전 일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갇혀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나 같았으면 바깥을 보고 싶어서 좀이 쑤셨을 텐데 말이다.

대비는 슬쩍, 공주를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궐에서 좋은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궐에서 정을 떼고 밖을 그리워하게 되면 역괴가 이기는 거요.”

이런 외출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감상을 품고, 다시 외출을 바라게 된다면, 그래서 궐에서 마음이 멀어지면 자신을 쫓아내고자 한 광해군이 이기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견뎌내셨고, 승리하셨지요. 생각 역시 달라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다고 역괴가 나와 내 가족을 핍박했다는 사실마저 달라지는 건 아니요. 죽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건 더더욱 아니고.”

쉽사리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비가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내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구려. 신경 쓰지 마시오. 주상께서 잘못하신 건 없으니.”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살짝 몸을 숙였다.

“대비마마께서 외출한 감상을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 저 역시 솔직하게 감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쾌하다지 않았소?”

“복합적인 감상이지요. 제 마음은 상쾌하다고 하는데, 코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북촌도 나름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인데, 냄새가 퀴퀴하고 쿰쿰한 게 한참 빨지 않은 이불 같으니까요.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까지 혹평하신단 말이오?”

대비는 내 말처럼 악취가 그렇게 심한가, 싶었는지 코를 움찔거렸다.

“저도 이렇게까지 냄새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거의 궁궐에서만 지내다 보니 간과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는 포장되지 않아 흙먼지가 계속 휘날리고, 골목의 구석마다 쓰레기가 쌓였지요. 가정마다 놓인 측간에서는 악취를 풍기니, 당연히 좋은 냄새가 날 리 없습니다.”

갈 길이 멀었다.

하필이면 그 길을 인도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문제지.

당장 이 모든 걸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조선이 처한 최대의 문제는 21세기 기준으로 낙후한 청결이 아니라, 후금이니까. 부국강병을 우선순위로 둘 수밖에 없고, 한양의 거리는 오래도록 퀴퀴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외출을 겁내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외출을 겁내지 않소.”

“제가 보기에는 겁내고 계십니다. 행복하게 사느라 지금 가지신 독기를 잃을까 봐 말입니다.”

“나를 함부로 재단하지 마시오, 주상.”

“그렇다면 개인적인 소감을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외출을 겁내지 않을 겁니다. 이 퀴퀴한 전경을 마주하기 싫어 피해 다닌다면, 언제까지고 무엇도 바뀌지 않을 테고 저는 영원히 궁궐을 나서지 못하겠지요.”

“주상의 감상은 잘 알겠소.”

대비는 잔소리 그만하라는 듯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비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공주는 은근슬쩍 대오에서 벗어나 더 넓은 북촌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부마감을 찾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는 모습이었으나 대비는 더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순전하게 기뻐하는 공주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뿐.

이번 대화로 대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으나 그만큼 광해군을 혐오하게 되지는 않았다. 광해군 역시 동정받을 이유는 차고 넘쳤고, 규탄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제 자식보다 어린 처자와 재혼하여 뒤늦게 적장남을 가진 건 광해군도 대비도 아니다.

그 적장남을 이용해 세자를 압박하고 핍박하며, 자신의 무능과 실책으로 손상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자 역시 광해군도 대비도 아니었다.

지옥으로 가기 전 물귀신처럼 여러 사람의 삶을 함께 지옥으로 전락시켰으니, 선조의 죄가 이처럼 무겁다. 그보다 더 무거운 죄는 내가 뒷수습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지. 전쟁 통에 파묘라도 해버리고 싶군.

“전하.”

정명공주였다.

“말씀하세요.”

“이곳은 행적이 뜸한 듯합니다.”

사람이야 원래 뜸했으니, 정명공주가 말하는 뜸해졌다는 것은 구경거리일 거다.

그동안 대비와 사담을 나눈다고 너무 한 곳에만 있었지.

북촌은 넓고, 공주가 눈에 담지 못한 풍경은 아직 많았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주마마께서 선두에서 서 보시겠습니까? 안내만 받아서야 이곳 지리에 익숙해지기 어려우실 테니까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다녀보시라는 제안이 공주가 환하게 답했다.

* * *

우리는 한동안 북촌을 탐험한 후 궐로 돌아왔다. 아쉽게도 오늘 행차에서는 부마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빈손으로 입궐하여 대비와 공주가 함께 지내는 석어당에 이르니, 대비가 문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지요.”

나의 위안에 대비가 몸을 돌리고서 말했다.

“나는 공주에게 위태로운 취미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이오.”

“부마를 구하게 된다면, 어차피 밖으로 나가게 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부마를 구하지 않고 나돌아다니기만 할지도 모르잖소?”

“그건 대비께서 잘 지도해 주시겠지요.”

말렸지만 계속 공주와 동행할 기세였으니까.

말리지는 않기로 했다.

막상 돌아다녀 보니, 대비 역시 이렇게라도 바깥의 바람을 쐬는 게 좋을 듯했으니까.

“이제 와서 이러기요? 부마의 수배를 돕기로 약조하지 않았소?”

“대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주는 마마의 딸이지 제 딸은 아니라고요.”

나는 합장하고서 덧붙였다.

“저는 제 자식의 교육에나 집중하겠습니다.”

“허, 언제는 세자가 알아서 잘할 거라더니?”

“물론 알아서 잘하겠지만 눈을 뗄 수는 없지요. 대비시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

대비는 입을 꾹 닫고서 빤히 마주 보았지만, 나야 대비가 말한 대로 했을 뿐인지라 꿀릴 게 없었다.

이렇게 미뤄둔 가장의 숙제들을 전부 해결했군.

세자의 책봉을 제외하면 계획대로 된 게 없었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말씀 드리기는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푹 주무십시오. 이부자리도 따뜻하게 하시고.”

대비의 눈길이 슬쩍 하늘로 향했다.

“정말로 그런 말씀을 하기에는 이른 시각이구려.”

“제가 오늘은 푹 잘 생각이라서 그렇습니다.”

“문안 인사도 생략하고서 말이오?”

“대비마마와 제가 이렇게 친한데 문안 인사 같은 걸 딱딱하게 지키면 재미없습니다. 아무튼, 진지 맛나게 드시고 푹 주무십시오.”

이제 가겠다는 뜻으로 옷깃을 여미니, 대비는 여전히 빤한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배웅해 주었다.

“……알겠소. 주상께서도 석수라 맛나게 드시고 푹 주무시구려.”

“예이.”

가족 관계가 많이 진전되어서 기뻤다.

예비 역적들도 대비를 팔아서 음모를 꾸미는 짓 따위 하지 못하겠지.

이토록 나와 대비 사이에 우애가 두터우니 말이다.

* * *

내가 가정을 돌보는 동안, 신하들은 나라를 돌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신하의 존재 의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이지.

아무튼, 무수한 사람이 고생해 준 덕으로 양전어사의 파견지가 정해졌다.

“각 도 수령들의 여론과 대신들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 선혜법을 확대 시행할 지역으로는 강원도가 가장 좋다고 사료되었나이다. 그 이유는…….”

이원익이 상세한 설명을 이어갔으나, 이미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먼저, 강원도는 경기도와 가깝다. 거기에 고지대인 태백산맥과 한강의 발원지를 모두 끼고 있어서 수운을 통한 세미의 운반이 쉬웠다.

물리적인 이유 외에도 선혜법 확대에 가장 긍정적인 요인은 강원도의 백성들부터가 선혜법의 확대를 바란다는 점이다.

인구와 생산성이 모두 낮은 강원도는 값비싼 공물 마련에 특히 부담이 큰 탓이었다.

‘……이런 이유로, 선혜법의 강원도 확대 시행은 광해군 2년에 이미 언급됐지.’

그것을 주장한 당시 선혜청宣惠廳의 수장이 선혜법을 처음 제안했던 이원익이었다.

그러니까, 이원익은 무려 13년 전에도 했던 소리를 내게 또 하는 셈이었다.

절대 짧다고는 하지 못할 세월.

제도가 미진하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제야 진전을 다시 시작했다. 과연 이원익은 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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