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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7화 (27/380)

인조, 명군이 되다 27화

“이견이 떠오르지 않으니, 영상과 이하 신료들이 세태를 정확하게 보신 듯합니다.”

영의정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답했다.

“윤허해 주신다면 양전어사들은 강원도로 보낼까 하옵니다.”

“그렇게 하세요. 파견 일정은 정해졌습니까?”

“정원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면 혼란이 발생할 터라, 달포의 기간을 두고 소수의 인원을 차례대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알겠습니다.”

굳이 한 번에 보낸다고 의미가 크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이쪽이, 아직 양전어사가 파견되지 않은 고을 수령들도 방심하지 못하게 돼서 좋아 보였다.

“양전어사들에게 열의를 발휘해 달라 전해주세요.”

“전교하겠나이다.”

“어디, 강원 감사랑 양전어사들 중에 누가 더 전망이 밝은지 보겠습니다.”

단순히 싸움 붙여보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현재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는 임석령任碩齡은 뇌물로 본직에 제수되었다는 혐의를 입고 있었다.

북인 인사인 건 당연지사.

그래서 당시에는 파직하라는 여론이 일었지만, 응하지 않았는데 다 이때를 위해서였다.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하는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군.’

이렇게 내가 붙여놓은 인연들이 있는데 다 성과가 좋았다.

원래 김류와 짝짜꿍하여 분탕이나 쳐댔을 김자점은 존재감이 말소되었고, 북인 잔당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반정 패거리의 열기는 서로에게도 향하면서 다소 희석됐다.

아마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누가 이겨도 나로서는 이득이다.

임석령과 양전어사들 모두 저들의 미래를 걸고서 필사적으로 이번 일에 임할 테고, 그중에서 더 잘 해내는 쪽이 살아남을 테니까.

“…….”

그런데, 내 앞에서 눈알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좌찬성?”

“예? 아, 예…….”

좌찬성 이상의는 개운치 못한 대답과 함께 슬쩍 윗입술을 핥았다.

“편치 못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옵니다…….”

아니기는 뭐가 아니라는 거야?

온몸으로 불편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순간 조선 최초의 팬터마임이 탄생하는 줄 알았다.

아무튼, 나는 이 양반이 왜 이러는지 잘 알지…….

좌찬성의 아들이 양전어사로 선발됐기 때문이다.

북인 잔당인 좌찬성은 흉흉한 여론을 피해 아들을 한양 밖으로 피신시키려 한 모양인데, 자식 사랑에는 공감하지만 나는 양전사업에 진심이다.

나들이하라고 양전어사들을 보내는 게 아니란 말이지.

“잘하겠지요.”

임석령이 진심을 발휘해 양전어사들을 능가해 버린다 쳐도, 설마 전도유망한 실무진 열여섯 명을 전부 팽하겠나.

그중에서도 아까운 사람은 있을 테고, 좌찬성의 아들이 열심히 해서 그 축에 든다면 나야 계속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에.”

이상의는 자신이 없는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만약 아들이 능력이 없음에도 당파와 아비의 후광에 힘입어 응교까지 오른 것이라면, 뭐.

다른 일자리 알아봐야지.

고개를 드니 조소를 그리는 신하들이 있었다. 북인이라면 자다가도 학을 떼는 반정 패거리와 서인들이었다.

개중에는 좌찬성의 아들처럼 중대한 나랏일을 맡은 자도 있었다.

어디, 그럴 자격이 있나 보자고.

“병조참의께서는 조사를 마치셨습니까?”

“대립代立의 현황은 파악이 끝났사옵니다.”

이귀는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당당히 답했다.

“대립 문제는 내가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일단 밤까지 자료와 의견, 근거와 전망에 대해서 보내주시면 검토를 마친 뒤에 어전에서 논의해 보겠습니다.”

“……어찌 대립이 부차적으로 논할 일이겠습니까?”

“나는 대립을 고용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나는 대립을 고용으로 보고 있다.

상번上番, 그러니까 한양으로 올라가 군역을 지는 동안에 사람을 쓰는 비용 이상으로 더 벌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직접 일하는 것보다 대신 번을 서고 대금을 받는 게 더 이익인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대립의 폐단은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할 군역이 빈한한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점이옵니다.”

“그야 그렇지만, 방군수포는 아니랍니까? 대립은 적어도 인원이라도 맞춰주지, 방군수포는 지방관이 뇌물을 받고 사람을 놔준다니까?”

그러면 뇌물 바칠 여력이 없는 사람들만 2인분, 3인분 하게 된다.

이거야말로 진짜 전가지.

“언제는 사람들 앞에서 도적들을 어떻게 해버리자더니……. 지금 좌찬성을 비웃으실 때가 아니에요. 본인이 맡은 일도 갈 길이 구만리인데 시시덕거릴 때입니까?”

이귀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만 툭 내밀었다.

“그래요. 대립도 문제지요. 병조참의께서 하신 말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논의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폐단이 있어서 그럽니다.”

“…….”

“……?”

“…….”

이놈이 그냥 입을 닫아버렸네?

참나.

“쫄?”

“……예?”

이귀의 시선이 슬쩍 올라갔다.

“개같이 쫄았냐, 이 말입니다.”

“예에?”

“막상 입은 열어놨는데 본격적으로 건드리면 외관外官들이 다 지랄할 거 같으니까…… 앞으로 당할 일이 걱정되어서 손톱을 씹고 눈물을 찔끔하며 콧물 들이켜면서 입을 꾹 닫고 계신 게 아녔냐는 말입니다.”

“전하!”

“나 귀 안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청 멀쩡한 사람이 방금은 왜 조용했답니까?”

“신은! 전하의 명을 어떻게 해야 완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사옵니다!”

“정작 내가 하는 말에는 답하지도 않고요?”

잘 익은 대추 같던 이귀의 얼굴이 이제는 잘 마른 대추처럼 변하고 있었다.

“신이 전하처럼 겁이 많은 줄 아시옵니까?”

“나야 겁이 있는 게 좋지요, 잃을 게 나라 전체인데.”

“으아!”

“허?”

“아무튼! 신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으며! 신이 한 말을 뒤집을 생각 역시! 추호도! 없사옵니다!”

이귀는 선으로 연신 허공을 가르며 외쳤다.

주변에서 모두가 쳐다보고 있음에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기색이라, 나 역시 이귀를 본받아 어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짝짝 박수 쳤다.

“……?”

이귀마저 흥분을 잊고 어리둥절해했다. 이건 또 뭔 지랄이냐는 듯.

나는 그런 이귀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병조참의! 이래서 나는 경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시니, 모두의 앞에서 해묵은 폐단의 일소를 당당하게 외치셨겠지요! 그런데 경께서 겁을 먹었다니, 말이나 되겠습니까?”

“……?”

“나와 다르게 겁대가리 하나 없는 경이시라면, 아무리 극렬한 반발에 부닥치더라도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맞서실 거로 의심치 않습니다! 각오해라, 온 세상의 탐관오리들아! 병조참의가 너희 수의壽衣가 되리라!”

이어서 나는 제신에게 외쳤다.

“다들 병조참의께 박수 주세요!”

그러자 여러 신하가 얼떨결에 박수를 쳤고, 특히 좌찬성 이상의는 무척이나 밝은 얼굴로 쳤다.

졸지에 모두의 박수를 받게 된 이귀는 얼굴이 붉고 푸르게 되어서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힘차게 박수 치다가, 손바닥이 아파질 즈음에 다시 어좌에 앉았다. 그러면서 신하들의 박수 소리도 잦아들었지만 이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게 왜 언성을 높이고 지랄이야?

상대도 안 될 거면서.

이렇게까지 골려놓았고, 또 이전부터 개혁으로 뒤숭숭했을 외관들에게 누가 저들 사악한 이익의 적인지 다시 강조해 주었으니 당분간 이귀는 바빠질 거다.

제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어떻게든 방군수포 문제와 끝을 봐야겠지.

아, 그전에 대립과 관련해서 조사한 것도 오늘 밤까지는 전부 제출하고.

* * *

퇴궐하는 이상의는 오늘따라 기분이 참 좋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웃어본 지가 몇 년 만이던가?

“하하하하!”

이상의는 어전에서의 일이 다시금 떠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냈다.

아들을 강원 감사와 붙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식겁했지만…….

왕이 자신을 싫어해서 하는 게 아니었으니 감수하기로 했다.

‘전하께서 그리하기로 했다면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지.’

북인 출신으로, 서인의 세상이 된 지금 삼사의 관직은 표적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에게는 처음부터 퇴로가 없었다.

기실 양전어사에 자원하게 한 건 그것이 유일하게 생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마저도 쉽지는 않게 되었으나 생존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아들에게 목숨을 걸고서라도 왕명에 부응하라 당부하는 수밖에.

‘낭중지추는 드러나게 마련이니.’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

왕이 경쟁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린 터라 각축전이 예상됐으니까.

강원 감사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테고, 양전어사들 역시 인상적인 성과를 보이기 위해서 애쓸 테니까.

아비의 후광을 짙게 받아온 아들의 경쟁 상대로는 어느 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게, 왕이 노렸던 부분이겠지.

치열한 경쟁.

‘대단한 사람이야.’

폐주는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사람만을 기용했고, 또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마냥 기대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이이첨 아니었던가?

그는 폐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고, 그래서 왕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이이첨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순간, 그는 곧바로 폐주와 적이 되었다. 오죽하면 반정 때 폐주가 가장 먼저 의심한 사람이 이이첨이었을까?

금상은 달랐다.

그는 협소한 입맛을 고집하는 대신 사람을 두루 썼고, 그들이 알아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를 고대하기보다는 그리 움직이도록 조종할 줄 알았다.

이귀만 해도 그렇지.

그런 지랄쟁이도 없는데, 용케도 부려먹고 있었다.

대단한 용인술이지.

이런 환경에서 끝내 살아남는 건 눈치 잘 보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해대는 간신배가 아니라 실력자뿐이다.

‘좌의정은 이미 증명해 냈지…….’

꼭두새벽에 그에게서 온 서찰을 받고 적잖이 놀랐는데, 더 놀랐던 점은 그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같은 서찰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전에서 세자 책봉이 언급되었던 날이었다.

그리고 좌의정 박홍구가 입궐한 건 바로 전날 밤.

왕명을 반나절도 안 되어 수행했으니, 금상의 평가에서 좌의정의 순위가 꽤 올랐으리라는 건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으음, 살아남으려면 나도 고생해야겠군.’

금상이 자신을 불러준다면 어떤 일이든 잘해낼 텐데.

명확한 인식이 박히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삼의정보다 서열이 밀려서인지 아직 호출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흐음…….’

이상의는 턱을 톡톡 두드렸다.

* * *

“야심한 시각인데 무슨 용무십니까?”

나는 병조에서 올린 서계書啓를 내려놓고서 물었다.

흔치 않은 일이다.

신하가 직접 찾아온 건.

“전하께 간곡히 청할 일이 있사옵니다.”

“말씀해 보세요.”

“신이 부족한 아들 대신 강원도로 갈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와, 이건 정말로 난처한걸?

아무래도 좌찬성은 아들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응교를 한양 밖으로 돌리기 위해 양전어사에 자원케 한 게 아니었습니까?”

자신이 양전어사가 되어버리면 무슨 소용이냐고.

“예, 전하께 송구스러울 뿐이옵니다. 백년대계를 위한 반석으로 행하는 양전 사업인데 사사로운 정으로 훼방을 놓았으니 책임을 지고자 하옵니다.”

“으음…….”

어렵구나, 어려워.

그의 말을 믿고 말고를 떠나서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일품 관직이다.

임란 후 비변사가 커지면서 의정부가 많이 죽었다지만, 중추부中樞府처럼 명예직으로 전락한 건 아니고, 또 찬성은 예비 정승으로도 불리는 자리다.

위가 삼정승밖에 없으니까.

‘이런 사람이 양전어사로 파견되면 관찰사는 대응할 수가 없단 말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앞길을 가로막을 수조차 없으니 좌찬성이 대놓고 사무실을 털어버리면 끝이다.

평소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강원도 관찰사는 두들기는 대로 동전 토해내는 파란 고슴도치처럼 되겠지.

하지만 이런 건 다 차치하더라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사람 내년에 죽는데…….’

천하가 바뀌어도 꺾이지 않는 열정과 야망만은 보기 좋았다.

단지 천수 촉박하신 분께서 험한 강원도로 떠났다가는, 분명 갈 때는 서서 가셨는데 올 때는 누워서 오실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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