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8화 (2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8화

“강원도를 방문할 체력은 되십니까?”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아니…….”

도대체 무엇을 각오하고 있다는 걸까?

내 생각엔, 좌찬성은 각오하지 않는 편이 좋다. 각오한 일이 정말로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달라졌으니 어쩌면 미래도 달라질 수 있겠지.

다만 크게 기대하기가 힘들 뿐이다.

좌의정 박홍규는 반정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이괄의 난이 터지자 사형당했고, 우의정 조정도 똑같이 유배됐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가 달라지면 그만큼 미래도 달라진다.

거, 왜, 사골곰탕처럼 푸욱 우려대는 모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장수의 부자연사와 자연사는 구분해 준다고.

그런데 좌찬성 이상의가 반정으로 받은 처벌은 삭훈과 강등이었다. 그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안 죽었을 사람이 죽었다고 보긴 어렵지.

그러니까…….

“춘추도 적지 않으신데 무리하지 마시지요.”

진짜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좌찬성.

“남이공은 신과 연배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배를 타러 갔는데, 신이 땅 위를 걷지 못하겠습니까?”

남이공은 오래 살더라고…….

좌찬성께서는 내년에 유명을 달리하십니다.

원래 올 때 순서는 있어도 갈 때 순서는 없다잖아요?

몇 마디 말이 혀끝에서 감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천기를 누설해도 사람 목숨으로 놀려대는 미치광이 취급이나 당할 테니까.

뻔한 소리만 나왔다.

“좌찬성께서 남 공과 연배 차가 크지 않다고 하셨지만, 한두 해도 아니고…….”

정확히는 5년 차이지.

“모장毛將이야 중국에서 총병직을 받은 놈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아니잖습니까?”

“어찌 나랏일에 경중을 두겠사옵니까. 더군다나, 양전은 전하께서 선혜법 확대를 위한 초석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좌찬성이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라니까?

목숨을 걸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강원 감사와 양전어사들은 이대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임할 테니까.

여기에 좌찬성이 끼어버리면 균형이 무너진다.

“좌찬성이 나랏일을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내가 경을 산세 험한 강원도로 보내기 조심스러우니 한발 물러서 주셨으면 합니다.”

“…….”

이 양반아, 지금 내가 당신 객사하지 말라고 이러는 거라니까?

“대신 좌찬성께서 힘써주실 일이 생긴다면 그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무언의 항의겠지. 나로서는 왜 좌찬성이 고생을 자처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좌찬성…….”

“전하께서 노신을 배려해 주시고 또 긴히 명하시니 따르겠사옵니다.”

일단락되어, 나는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이상의는 하나를 집어 손으로 가린 채 오물오물 먹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찬성께서 근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지도 않은 좌찬성이 왜 사서 고생을 하려 들까?

찔리는 구석이 있던가, 원하는 게 있던가 둘 중 하나겠지.

“신의 근심은 부자가 무능하여 전하의 대업에 누를 끼치게 되었다는 것뿐이옵니다.”

이상의는 전자가 맞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막상 내 일에 방해가 된 적은 없잖아?

개혁에 비협조적인 사람과 세력도 차고 넘치는 마당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도, 방해라도 안 되면 오히려 양반이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지, 내가 좌찬성의 근심을 덜어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설마, 내가 좌찬성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내가 병조참의 같은 천하의 지랄쟁이도 다 받아주고, 어떻게든 써먹으려 애를 쓰는데 좌찬성께서 겁을 내시면 내가 한 고생이 뭐가 됩니까.”

이상의가 피식 웃었다.

이귀가 조리돌림 당할 때 되게 좋아하는 걸 봐뒀지.

“편하게 웃으셔도 됩니다.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병조참의가 타격감이 좋은 건 나도 압니다.”

“타격감, 말씀이옵니까?”

이 시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표현이겠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아닐 거다. 좌찬성이 되게 공감할 만한 예시가 있거든.

“혀끝에서 느껴지는 것만이 맛이겠습니까? 때릴 때 손에 착착 감기는 것도 맛이지요. 병조참의는 공사 구분도 없이 고개는 항상 빳빳하고 매사에 시건방진 사람이니, 면박을 줄 때가 특히 재미있단 말입니다.”

“……알 것 같사옵니다.”

이상의가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폐주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선대왕과도 다른 사람이고……. 좌찬성은 구신舊臣이니 나의 태도가 어색하겠지만, 왕을 또 갈아치울 게 아니라면 어울려 주셨으면 합니다.”

“예.”

“내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크흠.

막상 입을 열기가 쉽지는 않았는지 이상의는 헛기침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깐 주저하였지만, 해둔 말이 있는지라 어렵게나마 다시 말을 이었다.

“신은 나라의 급변을 맞아 오래도록 모신 옛 주인을 저버렸으나, 여전히 공론에 혐의를 입고서 부자가 함께 백안시당하게 되었사옵니다.”

“…….”

“성상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어 목숨이나마 건져 구명도생이나마 하게 된 후의를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다만 은혜 갚을 길이 막연하옵고, 자식은 못나 여한을 풀기 어려우니, 신의 근심이 이것이옵니다.”

오랜 세월 나랏일 하며 여러 왕을 모신 노신인지라 격식이 다 빠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속마음을 이렇게라도 말해주니 고맙지.

이상의의 말을 해석해 보면, 자신은 공적이 되어 앞날이 까마득한데 자식까지 못나서 걱정이라는 거다.

그야 북인 잔당으로서 당연한 결과이지 않겠느냐마는, 이상의의 우려는 그 이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왜냐?

‘반정을 계기로 좌찬성의 가문이 쇠락해 버리니까.’

아들이 일곱인데 출사한 사람은 장남 이지완을 포함해 세 사람.

하지만 이들마저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증손 대에 이르러서는 이익李瀷이라는 걸출한 실학자가 탄생하지만 그야 이상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

당장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들들의 자질이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증손이 아니니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의 문제인가…….’

후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할 법한 상황이다.

장남 대신 강원도로 가겠다는 무리수를 둔 것도, 장남에게 기대하기 힘드니 자신이 직접 재기해 아들들을 건져내겠다는 의도였겠지.

대담한 판단이고 과감한 행동력이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이해는 하지만…….’

“좌찬성이 강원도로 가는 건 여전히 반대입니다.”

“예.”

“재주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요직에 앉힐 수도 없지요.”

“……예에.”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축 처져 있던 이상의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옵니까? 말씀만 해주시옵소서.”

노쇠해 처진 눈빛에 총기가 감돌았다. 고사해 가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좌찬성께서 오래 살면 됩니다.”

“……예?”

“경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가진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오래도록 조정을 지켜주신다면, 내가 좌찬성의 도움을 계속 구하기 위해서라도 경의 자제들에게 편의를 봐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적으로 봐주는 편의가 아니라, 공적인 이익을 위한 대가로서의 편의다.

“동시에, 자제분들이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대비도 해두셔야겠지요. 좌찬성이 천수를 다하면 내가 계속 편의를 봐줄 필요가 없으니.”

이상의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야, 가문을 부지할 방법으로 일단 오래 살고 보라는 소리였는데 그게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겠나?

자신의 천수를 알지 못하기에 당연히 들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꼭, 눈에 들어야만 대단한 과업이 아닙니다. 진실로 나라를 유지하는 중대한 일들은 조용히 이뤄지지요. 내가 이 병조의 서계를 문무백관 다 불러놓고 낭독하지는 않듯 말입니다.”

이귀 이 좀생이가 망신당한 보복으로 서계에 고사와 고문의 인용을 남발해 댔다.

그런데 이거, 내가 어렵게 해석해 가며 처리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나?

이귀 정도나 내가 엿 좀 먹었겠다 싶어서 고소해하고 말겠지. 미친놈. 또 조리돌림을 당해보려고 이러나?

그런데 이 서계, 한양 방위와 밀접한 대립 문제를 담고 있다.

“소란이 있는 곳에 꼭 공효功效가 있는 건 아닙니다. 좌찬성께서도 좌찬성만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찬성의 일이 대단치 않다는 건 안다.

의정부의 수장도 아니고, 또 그 의정부의 수장이 삼의정인지라 그들을 보조하는 게 전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에 따라서는 이런 애매함이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삼의정이 아마 나의 개혁안으로 바쁠 텐데, 그 사람들이 평소 하던 업무를 뺏어서 한다든가.

“건강 관리도 잘하시고요. 공기 좋고 날씨 좋은 날이면 나가서 걸으시고, 식사도 간은 심심하게 해서 드시고.”

어째 어르신 걱정하는 소리처럼 되어버렸는데, 좌찬성은 천수가 위태로운 사람이니 잔소리하는 게 맞다.

“본인도 가문 걱정 많이 하시잖습니까? 가문 살리려면 좌찬성이나 되는 사람이 오래 버텨야지, 왜 강원도 갈 생각을 합니까.”

고속도로 뚫린 시대도 아니고 17세기 초반에 말이야.

“수목장이 하고 싶어요? 아니면 호랑이 도시락이 장래희망입니까?”

“…….”

“내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삼의정들이 다 금방 죽을 관상은 아닙니다. 그 양반들보다 오래 버텨봐요. 집안에 의정 하나 생기면 든든하겠네.”

“……명심하겠사옵니다.”

* * *

이상의는 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저택으로 향했다.

행인이 뜸한 시각이어서 그런가, 이상의는 한산한 밤길을 거니는 동안 기분이 이상했다.

왕과의 만남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히 말미에서는 더욱 그랬다.

설령 청탁을 거부당한 노신을 달래고자 겉으로나마 한 말에 불과했을지언정, 빈말로나마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이상의는 자문에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웠던 이들마저 절반은 자신과 엮이지 않고자, 다른 절반은 제 앞가림하기 바빠 소통이 끊어진 마당이었다.

자식들마저 일가를 이루고 나갔으나 속만 썩이는 와중에, 왕이 잔소리하듯 드러낸 우려는 장대한 세월 살아오며 삭막해진 심정에도 와닿는 것이 있었다.

저택에 도착한 이상의는 쉽게 잠들지 못할 거로 생각했지만, 피로한 탓인지 금세 단잠에 빠졌다.

평소처럼 꿈은 없었다.

눈 감았던 순간 그대로, 하늘만 달라진 채 기상한 이상의는 곧바로 방문객을 맞았다.

수염이 없는 사람이었다.

“궐에서 나왔는가?”

“예.”

내시는 짧게 긍정하고는 들고 있던 짐을 건넸다.

비단 보자기로 포장한 상자였다.

보기보다 무겁지 않았으며, 흔들릴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엇인가?’

궁금했지만, 하사품을 두고서 무엇이냐고 빤히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안에서 확인하면 그만인지라 이상의는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곧장 목욕재계하고 궐을 향해 사배하지.”

내시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말했다.

“약재입니다.”

“약재?”

아픈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무슨 약재란 말인가.

‘아…….’

왕은 간밤에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걷고, 간은 심심하게 해서 먹으라던가.

자식에게도 듣지 못한 당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약재까지 내릴 줄이야. 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복용하여도 부담이 없을 만한 것들로, 전하께서 내의원에 명하여 좌찬성에게 보내라 하셨습니다.”

사족에 가까운 내막이었으나, 내시는 이러한 사정을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는 듯 말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재차 까딱이고는 인사했다.

“소관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러시게. 고생하게. 전하께는 내 따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네.”

“예.”

내시가 물러나고, 이상의는 보따리를 받아든 채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걸음마다 약재들이 보따리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방에서 무릎 위에 보따리를 올려둔 이상의는, 조용히 소매로 얼굴을 닦아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