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9화
타의 반으로 양전어사에 자원한 이지완은 최근 들어 과음하는 날이 늘었다.
북인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며 자신의 혈통에는 낙인이 찍혔고, 그동안 별말 없었던 동료들은 자신을 백안시했다.
아니, 언제 북인을 혐오했다고?
오히려 잘 보이는 이들만이 즐비했다.
그런데 고작 풍향 하나 바뀌었다고 접점 하나 없던 이들마저 낙인만을 근거로 멍석말이를 하려 든다.
이지완은 세상 서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술 한잔이 과음이 되고 폭음이 되었다. 잔을 아무리 꺾는대도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끄으.”
그래도 이지완은 잔을 꺾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숙취로 고생하게 됐지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잔을 꺾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
“……으, 게 아무도 없느냐?”
이지완은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누운 채 그대로 중얼댔다.
그가 자각하지 못하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신세에도 수발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방문 밖에서 이지완에게는 익숙한 노자奴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완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노자의 이름은 길동으로, 길동은 상전이 부친의 댁에서 독립한 이래 그를 꼬박 모셔온지라 눈치가 좋았다.
이지완이 방구석에 처박힌 채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대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건 그 덕이었다.
“냉수…… 냉수 좀 떠 와라.”
“찬물로 괜찮겠습니까?”
“어어, 그래…….”
이지완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가, 길동이 돌아왔을 때쯤에는 반쯤 잠들어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
“어, 으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으.”
과음의 부작용으로 이지완은 언어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었지만, 눈치 좋은 길동으로서는 셀 수도 없이 익숙한 상황이었다.
바깥의 바람이 찬 관계로 길동은 방문을 좁게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상전이 이부자리에 그대로 퍼질러진 채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반개한 못난 일상을 마주했다.
“우물에서 최대한 깊게 떠온지라 많이 차갑습니다.”
“으.”
이지완은 상체나마 세우고자 힘주다가 인상만 썼고, 길동은 그런 상전의 허리 아래로 팔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죽상이었던 이지완은 어렵사리 길동이 건넨 물 대접을 받아들었다. 짜릿한 차가움이 술기운과 온기로 마비된 손에 파고들었다.
후흐르르릅!
추접하게 냉수를 빨아들인 이지완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아직 곁을 떠나지 않은 길동을 쳐다보았다.
“뭐냐.”
“방금 막동이 찾아왔습니다.”
“막동?”
이지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봤다가, 곧바로 막동이 부친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있는 새파란 꼬맹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연찮게 얼굴도 몇 번 본 적 있었지.
이지완이 깨달은 기색을 보이자 길동이 말했다.
“춘부대인께서 부르셨답니다.”
“……하아.”
이지완은 아버지의 호출이 언급되자 반사적으로 한숨을 터뜨렸다가, 자신의 숨결에서 역한 악취를 느꼈다.
잔다고 너절해진 외관이야 정제하면 그만이겠으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술 냄새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장육부를 꺼내 씻어낼 수도 없고.
‘아파서 못 간다고 할까?’
이지완은 강한 유혹을 느꼈으나 곧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니, 조금 있으면 강원도로 떠나잖아?’
아버지가 아무리 진노하여도 화를 면할 길이 있었다.
하지만 사고를 치고 떠나기엔 후환이 두렵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사그라들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부자가 처한 현실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부친을 거스르는 건 자해나 마찬가지였다.
‘……부르실 거면 미리 부르시지, 게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무에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결국 이지완은 부친을 원망하면서도 출타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 * *
“너, 술 마셨냐?”
이상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부름을 받고 온 아들을 마주했다.
아들은 혼날 것이 두려웠는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백은 필요 없었다.
녀석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간밤에 술로 목욕이라도 했는지 시큼한 냄새가 천지사방에서 풍겼으니까.
“너는 장남이 되어서 내게 이런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고 싶으냐?”
“아니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네게서 부끄러운 모습밖에 보지 못했단 말이냐.”
“…….”
“내가 죽으면 집안은 네가 이끌어야 하는데, 장남이라는 녀석이 나랏일을 맡고서 백주에 술 냄새나 풍기고 다닌다면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이어지는 잔소리에 이지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라고 어째서 아비의 자랑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고, 주변의 상황 역시 도와주지 않으니 나는 앞으로 가고자 해도 계속 어긋날 따름이다.
이러한 변명을 부친이 이해할지는 의문이나…….
속으로 항변하던 이지완의 시야에 보따리가 들어왔다.
정체불명의 상자와 그것을 포장한 원색의 보자기. 누군가에게 보내는 선물일까?
매듭이 엉성한 걸 보아 묶인 것을 풀어본 듯했다.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는 뜻인데…….
‘그럴 만한 사람이 있나?’
서인의 천하가 된 이래 북인들은 서로 만나기조차 어렵게 됐다.
자칫, 북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자가 모임을 모의로 고변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대죄의 혐의를 쓰게 되면 고신拷訊도 바늘에 실 따라가듯 이어지게 마련인데, 안 그래도 가혹한 고신의 주관을 서인들이 맡을 테니 없는 죄상을 토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뻔하지. 그 자리에 모인 집안은 모조리 풍비박산이다. 북인들은 절대로 모일 수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인과는 절대로 모일 수 없다. 당 색이 다르거나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불똥이 안 튀는 게 아닌 탓이다.
덕분에 이지완도 동석하는 사람 없이 잔만 쓸쓸하게 혼자 비워왔다.
‘그런데 선물이라고?’
눈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믿기 어려웠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태 파악이 안 된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면 같이 죽어보자고 이러는 건가?
어느 쪽이건 제정신은 아니다.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야지. 이 무슨 민폐란 말인가!
속에서만 따지고 드는 이지완에게 이상의가 물었다.
“어디를 보느냐?”
아버지의 엄한 목소리에 이지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답했다.
“저 보따리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누가 보냈는지 몰라도 실성한 게 틀림없습니다. 요즘처럼 삭막한 때 선물을 보내다니요?!”
“……뭐?”
이상의는 싸늘하게 반응했으나 이지완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안은 장차 제가 이끌게 된다고요! 그러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꺼리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 저 보따리를 치워 버리셔야 합니다!”
언성이 올라갈수록 이상의의 눈도 가늘어져 갔다.
이지완은 그것이 반대와 거부의 의미임을 알았으나, 보따리의 내막을 모르는 그로서는 아버지가 사사로운 인연에 눈이 먼 것으로만 보였다.
자신이 술에 취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아버지가 집안에 재앙이 될 물건을 들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이지완은 부친이 강요한 의무감과 이에 대한 반감으로 덧붙였다.
“아니요, 그냥 어디에 치워 버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예 태워 버리시고 저 위험한 물건을 보낸 작자와 연을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허!”
“장남으로서 집안을 지키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직소라도 올리랴?”
“……예?”
사직 이야기는 왜 나온단 말인가.
“저건 전하께서 내리신 약재다!”
이지완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내가 도저히 안심되지 않아 너 대신 직접 강원도로 가겠다, 전하께 말씀드렸더니 극구 만류하시더구나. 네게 국용이 없는 게 걱정되면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보내신 거란 말이다!”
“…….”
“그런데 너는 살면서 이 아비에게 한 번도 보낸 적 없는 약을 두고서 뭐 어째? 태워? 연을 끊어? 아이고, 이 자식아…….”
이상의의 탄식에 이지완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는 무식한 누군가가 집안을 말아먹기 위해 눈치도 없이 선물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무식했고 눈치가 없었으며 집안을 말아먹으려던 건 자신이었다.
“내가 민망했던 게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나의 근심을 아시고 너의 국용을 평가하셨을 때, 내가 빈말로라도 네가 쓸 만하다거나 후사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상의도 차마 내색하지는 못하였으나 아들에게 미안하던 참이었다.
아비조차 아니 믿어주는 사람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헛소리나 해대는 모습은 설령 아비일지라도 감싸주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죽지 않고 끝까지 챙겨줄 수도 없다.
뻔하지만 잔소리나 계속할 수밖에.
“내가 오늘 부른 이유는, 양전어사로 나가면 최선을 다하라 당부하기 위해서다. 너도 소문은 들었겠지?”
왕이 양전어사와 강원 감사를 싸움 붙이기로 하셨다.
“결과야 어떻건, 네가 두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관문에 계속 남아 있기 힘들 것이다.”
양전어사들이 이겨도 공헌이 없으면 묻혀 버릴 테고, 질지언정 공헌이 크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에 비춰보면, 당장 이겼다고 강한 게 아니다. 살아남아야 강한 것이다.”
비교적 젊은 이지완은 좋은 시대에서 태어났다가 환국으로 신세를 망친 것만 보이겠지만, 오래전부터 나랏일에 몸담았던 이상의는 다르게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나라를 주물렀던 북인도, 지금처럼 생존만을 걱정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느냐?”
“기축옥사…… 이옵니까.”
“아는구나. 그때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당적을 버리거나 타협하려던 자도 많았고, 치욕을 견디지 못해 사직하거나 낙향한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누가 끝내 조정을 지배하게 되었더냐?”
북인.
기축옥사의 원한을 잊지 않고 조용히 칼만을 갈아온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서인들이 환국으로 기고만장해 있지만, 흐름이란 바뀌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다음 흐름에 너의 자리를 준비하고 있냐는 것이지.”
이지완은 부친의 충고에 당당하게 답할 수 없었다.
“나는 다음 기회를 노리기에는 너무 늙었다. 오죽하면 전하께서도 나를 걱정하시겠느냐.”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도 다시 빛을 보실 겁니다.”
“내 나이에 그런 걸 기대하면 말년이 피곤해진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다시 북인의 세상이 오는 게 아니라,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야. 잘해야 된다.”
“예.”
“열심히 했는데 그만큼 풀리지 않았다고 상심하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나 역시 노력할 생각이다.”
이지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도 내게 당부하시더구나. 좌찬성으로서 할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진정으로 옳은 말씀이시다.”
아들에게 했던 말과 달리 노욕이라도 부리겠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삼의정을 언급하지 않으셨던가.
세 사람이 금방 죽을 팔자는 아니라고 하셨으니 이는 당장 좋은 모습을 보인다고 의정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하신 이유는, 때가 되고 자격이 갖춰진다면 자신을 의정으로 삼을 의사가 있으시기 때문이겠지.
거기에 이상의는 기꺼이 부응해드리기로 했다.
“너도 마땅히 그리하여라.”
“예.”
“그래. 가봐라. 나는 곧 외출할 생각이니.”
“찾아가실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할 생각이다.”
“……?”
“전하께서, 날씨가 좋으면 나가서 걸으라 하셨는데 오늘이 마침 그러하니 나가서 걸어야지 않겠느냐?”
* * *
새삼 북촌 거리를 산책하던 이상의는 한 저택 앞에 멈춰섰다.
이곳의 집 주인은 이상의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이상의였다면 방문은커녕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소피조차 누지 않았겠으나 최근 심경에 변화가 컸던지라 용기를 냈다.
그리고 이곳 집 주인은 원래 이상의만 아니라 누군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괴팍한 인간이었다.
누가 방문한들 불청객이라면, 자신이 불청객이라도 상관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