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0화
청명晴明이라는 절기의 이름처럼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밝았다.
더 좋은 건 희소식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주상께서도 아셔야 할 게 있소.”
경운궁 석어당.
아침을 맞아 설렁설렁 문안차 방문하니 대비가 진지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공주가 사윗감을 찾았소.”
“오? 의외로군요.”
나의 반응에 대비는 무슨 소리냐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의외일 건 뭐요. 공주에게 직접 남편감을 찾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한동안 자유를 누릴 줄 알았는데 벌써 남편감을 찾았다니 의외지요.”
“그건…… 동감이오.”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괜찮길래 공주가 벌써 남편감으로 점 찍었단 말인가.
“남양南陽의 토홍土洪 사람인데 집안도 괜찮고 학맥도 나쁘지 않소.”
대략적인 신상을 읊던 대비가 강조하듯 덧붙였다.
“엄청 눈에 찬다는 뜻은 아니고.”
공주 사랑이 유난한 대비에게 눈에 찰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그뿐입니까?”
“그 외에 무엇을 더 말하겠소.”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어떻게 되며, 혼인이나 약혼의 여부도 중요하지요. 꼬마 신랑…… 까지는 상대도 좋다면야 그러려니 하겠으나 임자 있는 사람이라면 곤란합니다.”
그러자 대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연배는 공주보다 두 살 적으니 꼬마 신랑이라 부르기는 어렵고, 임자는 그동안 공부하느라 바빠서 두지 않았더이다.”
“알아보셨습니까?”
“당연히 알아봐야지. 공주를 걱정하는 건 주상이 아니라 나요.”
대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운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원 역사에서 공주는 임자 있는 사람을 강제로 부마 삼게 되었고, 대비가 죽은 다음에는 인조에게 보복을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미래는 없어졌다.
“이번 일에는 실로 상제의 영험이 있는 듯하오.”
“상제요?”
나의 영험이 아니라?
“주상은 믿지 못하겠지만.”
“아니, 아직도 그때 일을 묻어두고 계셨습니까.”
즉위식 때 대비가 상제 어쩌고 운운하며 하늘에 절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야, 과장 조금 보태면 ‘엿이나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사양했고.
그런데 한참 지난 지금에 과거사를 꺼내니 당혹스러웠다.
“그럼 지금이라도 배사하지 그러시오?”
“됐습니다. 오히려 공주께서 제게 배사하는 게 맞지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직접 사윗감을 구해보시라 권한 게 누구입니까?”
나지.
“실상은 이번 일도 상제의 영험이 아니라 저의 덕이지요.”
암, 암.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였소. 주상의 도움도 있지만, 하늘이 돕지 않아서야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겠소? 나는 주상이 너무 기고만장하여서 화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이오.”
“화는 이미 입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팔자에도 없이 이러고 있는 게 화지요.”
인조를 대차게 깠다고 이 고생이라니.
대비는 알아서 해석했는지 얼굴이 불퉁하게 변했다.
뭐, 내가 여기서 대비를 상대하고 있는 것도 화라면 화다.
“아무튼, 그 사람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해주어도 주상이 알지는 못할 거요.”
“알 수도 있잖습니까.”
“주상이 즉위하신 뒤에야 한양으로 올라온 사람인데 어떻게 안단 말이오?”
알 수도 있지, 미래에서 온 사람인데…….
“주상은 당사자의 이름보다 조부의 군호가 더욱 친숙할 거요, 영원부원군寧原府院君이라고.”
“어어?”
“아시는 모양이오?”
“영원부원군이라면 홍가신洪可臣이 아닙니까.”
“맞소.”
임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이몽학이 전쟁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영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사후에는 부원군으로 추봉됐다.
충무공 이순신과는 무려 사돈 관계.
“절대로 집안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나쁘지는 않소.”
“그런데 왜 눈에 차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모친이 허성許筬의 딸이라 그렇소.”
임란 직전 조선통신사 서장관으로 참여한 사람이다.
전쟁 때는 세자를 수행해서 위성원종공신에 책록됐지.
그것이 반감의 이유는 아닐 터다. 대비가 역괴라면 학을 뗀다지만, 위성공신의 공로는 광해군을 수행해서만이 아니라 나라의 위기 때 분조에 참여한 것도 크니까.
하물며 허성은 정공신도 아니라,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원종공신인데.
진정한 반감의 이유라면, 아마도…….
‘허성의 이복형제가 허균許筠이라는 거겠지.’
미래에서는 홍길동전의 저자로서 유명한 허균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반역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이고, 젊어서는 부친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었던 큰형을 잃었으며, 임란이 끝난 뒤에는 두고두고 탄핵을 당하다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에는 계축옥사에 연루됐다.
이이첨이 영창대군의 보호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확대한 이 사건으로 허균은 친우들이 무수히 숙청당하는 동안, 자신은 당시 명나라에 있었다는 이유로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이첨의 앞잡이가 되지.’
심경의 변화가 작지 않았으리라. 주변이 비질 당하는 나뭇잎처럼 쓸려 나가는 동안, 자신은 순전히 운수만으로 예외가 되었으니까.
한평생 불안한 삶을 살았기에 권력의 주구가 되더라도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염원도 컸으리라.
그렇게 허균은 이이첨을 위해 폐모론의 선봉에 섰다.
‘이게 사윗감이 눈에 차지 않는 이유겠지.’
모계로 자신을 제거하려던 허균과 엮여 있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 원한이라면 묻어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허균이 폐모론의 선봉이 된 후, 그는 이이첨과 사소한 계기로 갈라졌으니까. 주변에 무수한 적을 만들어놓은 채 든든한 방패를 잃어버린 그는 당연한 결과로, 숙청됐다. 느닷없이 반역의 혐의를 입고서 삭풍 잦았던 생애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
하지만 당사자도 아닌 내가 대비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대비 역시 가계에서 몇 다리 건너야 나오는 악연을 사윗감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내게 소개하는 대신 자신의 선에서 극렬하게 반대했겠지.
고작 꺼림칙한 정도라면야.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그마저도 사위가 잘해준다면 시간에 따라 희석될 테고.
“그 사람 이름은 무엇이랍니까?”
“허. 들어도 알지 못할 텐데 관심은 지대하시구려. 아직 확정된 건 없거늘.”
그래도 못 가르쳐줄 건 없다는 듯이 대비가 말을 이었다.
“홍우원洪宇遠이라고 하오.”
“…….”
아는 사람이잖아.
이 양반이 여기서 나오네.
홍우원은 남인南人의 중진이다.
그간 대북의 세상이었다가 서인의 세상이 된 현재. 남인은 존재의 실체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로 쇠락하나, 현종 대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양분할 정도로 확대된다.
예송논쟁이라고.
아주 유명한 사건을 터뜨리면서 말이다.
홍우원이 남인의 중진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때다.
‘그보다 한참 전인 인조 말년부터 세자빈과 세자 혈통의 복권을 언급한지라 싹수 자체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지…….’
소현세자의 흔적을 어떻게든 지워내고자 며느리를 역적으로 만들고 손주들은 제주도로 보내버린 인조다.
그런 인조에게 세자 가족의 복권을 요구했으니,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게 용했다.
그래도 인조가 괜히 인조는 아니었던지라 좌천은 당했지만.
‘이만한 사람이 부마가 되어 조정에서 사라진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려나…….’
걱정이 잠깐 들었으나,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나부터가 역사를 바꾼 몸이었다.
내가 세자를 반드시 왕으로 만들겠다 다짐한 이상, 홍우원이 두각을 드러냈던 복권 사건도 나의 역사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미 나는 역사와 홍우원의 일생을 바꿨다.
“……아시는 모양이오?”
“설마요. 그래서, 대비마마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홍우원이 부마로 괜찮겠습니까?”
나는 긍정적이다.
인조 때 일화가 말해주듯 홍우원은 정의감도 있고 그것을 실천할 강단도 있다.
그건 나이를 먹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예송논쟁 때 당시 조정을 지배했던 송시열과도 당당하게 맞섰다
배경을 다 떠나 인간만 봐도 A급 사위다.
내게 딸이 있었다면 안 주고 묵혀뒀다가 내 딸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대비가 답했다.
“나야 이미 천운으로 여기고서 마음을 굳혔소. 공주 본인이 직접 고른 사윗감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상대방의 의사다.
“홍우원은 공주가 좋답니까? 아니, 홍우원이 공주의 신분을 알고는 있답니까.”
“아직은. 나는 이만하면 알려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데 공주 본인이 원치 않는 듯하오.”
“공주의 신분이 오점이 되지는 않을 텐데요.”
내가 일국의 공주이지만 힘을 숨긴 채 평범한 사람으로서 인연을 만나고 싶다, 뭐 이런 건가?
그렇다면 공주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었던 셈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소? 그간 공부하느라 바빴던 사람이라고. 고작 작년에 소과에 합격했겠다, 남은 건 출사가 걸린 대과뿐인데 부마가 되면 그게 불가능해지지 않소.”
“아하. 그러면 신분을 밝히기 꺼릴 만하지요.”
“내가 보기엔 미련한 짓이오. 그만큼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면, 결국 부마로 두고 싶다는 뜻인데 지금 숨겨둬서야 무슨 이익이 있겠소?”
“그것도 그렇지요.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상대방이 오해할 수도 있고.”
대비는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아직 해결할 사정은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요. 주상도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알려드렸소이다.”
“덕분에 희소식을 접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공주가 외출보다 더 좋은 게 생겼다니 당연히 기뻐해야지.
또 그게, 대비가 오랫동안 절실하게 고대했던 부마라면 기쁨은 두 배가 된다.
덕분에 대비가 해묵은 원한을 덜고서 날 선 태도가 꺾인다면 나 역시 좋으니, 이로써 기쁨은 세 배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경사를 세 배의 기쁨으로 늘이는 창조기쁨이다.
* * *
여러 사람 팔자를 고쳐놨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신하들이 밥값을 똑바로 했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겠지?
“경들께서는 나와 대비전에서 별도로 부마를 구하고 있었다는 걸 알 겁니다.”
여러 사람이 끄덕였다.
“오늘 대비전에서 문안을 드리다가 경사를 접했습니다. 장차 부마가 정해질 듯합니다.”
“참으로 이 나라의 홍복이옵니다.”
한 신하가 긍정했다.
“홍복은 홍복입니다. 그 뒤는 그 뒤고요.”
“……?”
“대비께서 내게 경사를 알려주신 데는, 미리 하가下嫁를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가는 공주나 옹주가 시집가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로 하강下降이라고도 하는데 떨어진다는 의미의 하강과 단어가 같다. 하늘 같은 왕족의 신분으로 이보다 부족한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이니, 아래로 내려간다는 거지.
영의정 이원익이 허리 숙였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차질 없이 준비하겠나이다.”
“흠……. 차질이 없다는 건 하가를 아예 생략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이원익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의 하가는 대비마마의 숙원이 담긴 일이니 예식을 간소화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참으로 그렇긴 한데, 비용은 영상께서 전부 대실 겁니까?”
하가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절차 대부분은 여느 시집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구조는 동일해도 격식이 다르다.
오죽하면 가례청嘉禮廳이라고 왕녀의 하가에 필요한 의식의 준비와 물품 조달만을 전담하는 임시 관청까지 세울까? 결정적으로, 하가 때는 공주가 살 저택을 미리 마련한다.
저택의 규모는 당연히 왕족 신분에 상응하여 지극히 호화롭다.
그뿐이랴.
독립 후에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막대한 재산과 토지마저 내려진다.
“분호조 배를 째고도 먹고 죽을 예산이 없어 빈 밥공기를 긁어대는 판국에…….”
무슨 돈지랄이냐고.
대비의 눈치?
봐야지.
그러니까 이러는 거다.
“부마의 후보는 내가 경들을 대신하여 구했으니, 경들은 나를 대신해서 욕 좀 먹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