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1화
“공주의 집을 새로 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이요?”
바로 들켰군.
대비의 정명공주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워낙 큰지라, 예상은 했다.
“대비마마…….”
나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신하들이 얼마나 버릇없는지요!”
처음부터 신하를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꼬장한 서인들은 원래 공사라면 학을 떼고, 북인 잔당들은 나를 거스를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막상 총대를 메는 건 누구도 자원하지 않더라. 아주 심보가 간사한 사람들이지.
‘꼴에 잃을 거 많은 사람들이라고…….’
다들 사리기만 했다.
겁대가리 상실한 이귀를 투입해 볼까, 싶었으나 이귀는 이미 무수한 외관을 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대비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감당하기 힘들겠지.
기껏 나랏일을 맡겨두었는데 폐사라도 한다면 내가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불특정 다수를 팔아먹기로 했다.
대비가 딸아이 살 집을 신축에서 백 년 묵은 옛집으로 바꿔치기한 원수의 정체를 파헤치지만 않는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을 지는 거다.
물론 나는 빼고.
“누가 발의한 일이요?!”
“김자점입니다.”
“그 간악한 자가!”
대비가 워낙 표독하게 물어보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아니, 미안하지는 않은데 김자점은 이미 대비에게 찍혀 있었으니까.
반정이 있던 날 경운궁에 틀어박혀 있던 대비를 강제로 끌고 나온 탓이다.
이 이상 찍힐 구석도 없고, 여차해서 일이 잘못되어도 나는 아쉬울 게 없다.
한평생 나라에 해악만 끼친 인물인데 이렇게라도 써먹어주면 김자점도 지옥에 가서 고마워하겠지. 이것 역시 미리 생각해 두었던 2호 작전이다.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둔다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김자점을 더욱 충신으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나라의 사정을 생각하여 발의한 것인데 간악하다고 할 수는 없지요.”
살살 긁어주니 대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김자점은 간악한 게 맞소! 그는 역괴의 수하였던 이첨처럼 되고자 하는 자요!”
“서인들은 원래 이이첨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놈인데…… 반정에 참여했던 김자점이 이이첨처럼 되고자 하겠습니까.”
“본디 대의가 아니라 권력을 위해 반정에 참여한 인물이요!”
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속으로 찬동하고 있으니 대비가 덧붙였다.
“이첨이 권력을 잡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시오? 역괴의 의향을 먼저 헤아리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오!”
김자점이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공주의 처소를 새로 짓는 대신 광천위光川尉의 집을 활용하자 한 건 제가 아니었습니다만…….”
광천위는 중종 때의 부마다. 집과 마찬가지로 거의 백 년 전 사람.
“주상이 나라의 곳간 사정을 깊게 헤아린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요?”
“그것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괴로 인해 나라 곳간이 빈한해진 걸 나라고 모르지는 않소. 하지만 공주의 사가를 매해 새로 지어주자는 것도 아니고, 공주와 자식이 대대로 들어 살 집인데 한 번은 새로 지어줄 수 있는 거 아니요?”
“신하들이 여론에 많이 동참하는지라…….”
“하!”
대비는 당치도 않다는 듯 조소를 터뜨렸다.
“주상이 언제는 신하들이 그런다고 입 꾹 닫고 가만히 따르셨소? 언제는 모두의 앞에서 차마 듣지 못할 말씀까지 하지 않으셨소이까!”
……오리지널 인조보다는 약과인데.
그놈은 자기 손자들을 개새끼狗雛라고 불렀단 말이야. 신하 상대로 무식한 새끼라 면박 주는 건 오히려 양반이지.
보라, 지금도 나는 양반처럼 고상하게 대비를 기만하고 있다.
“김자점의 의견이 사리와 크게 반하지 않고, 공론이 부합하며, 피폐한 백성들 역시 공사라면 질색이니 어찌 저라고 부득불 반대하겠습니다.”
“주상!”
“이게 다 김자점 때문입니다.”
철면피 깔고 전부 김자점의 잘못으로 몰아가니, 대비가 팔짱을 끼고서 노려봤다.
그 눈빛이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했으나 정말 눈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는 없다.
시선으로 철판을 꿰뚫지도 못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있으니 대비가 낮게 일렀다.
“그래서, 김자점이 입만 다문다면 공주에게 집을 지어줄 수 있다는 거요?”
마치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기세였다.
이거는 좀 놀라운데.
대비는 광해군 때 거듭된 옥사로 손발이 잘려 나갔다. 대표적으로는 부친 연흥부원군이 숙청된 계축옥사라던가.
그래서 궐 밖에서는 힘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해주면 끈이 있는 것 같잖은가?
‘이참에 대비가 무슨 끈을 잡아당기는지 볼까?’
하찮은 김자점의 하찮은 목숨을 이용해서 한 꺼풀 걷어보는 거지.
그래서 김자점이 죽고 대비의 소망을 들어주게 되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
공주의 저택은 원래 새로 지어줄 생각이었거든.
다만 재정의 문제가 있으니 규모를 축소할 뿐이다. 하지만 자식 사랑이 지대한 대비가 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니 강짜부터 부린 것이다.
왈가왈부하다가 마지못해 타협하는 척 원래 계획대로 하려고.
“……방법은 있으시고요?”
슬쩍 떠보니 대비가 칼같이 답했다.
“방법은 내가 걱정할 일이고, 주상께서는 확답이나 해주시오. 김자점의 입을 닫으면 공주에게 새집이 생기는 거요?”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 조용해진다면 저도 억지는 부려볼 수 있겠지요.”
“분명하게 말씀하시오.”
대비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나는 어머니의 뜨거운 자식 사랑을 느꼈고, 그래서 솔직하게 답했다.
“대비마마께서 해주시는 만큼, 저 역시 해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요? 아니, 무슨 의도요?”
“대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김자점은 힘 있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간이나 쓸개라도 빼줄 듯하면서 부귀영화를 빨아먹고자 하는 거머리 같은 놈이지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 있을 때 더 도움 되는 녀석이다.
착한 OO은 죽은 OO이라는 표현이 농담이 아닌 인물이지.
“내게 차도살인을 맡기겠다는 거요?”
“꼴에 옳은 소리로 공론을 규합하였으니 제가 직접 손볼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 사정이 새어 나가면 곧장 폐주와 비교당할 테지요.”
대비는 자신이 놀아났다고 생각했는지 뚱한 얼굴이 됐다.
아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대비가 갑자기 제 털을 뽑고 된장을 바르니까 나도 장단을 맞추기 위해 솥에다 물을 받았을 뿐이다. 왜 이래.
“그런데 왕의 신하인 김자점을 손봐주겠노라, 왕인 제게 먼저 말씀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내가 어울려 줄 생각을 해서 그렇지, 대비의 발언은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김자점이 아닌 다른 멀쩡한 신하가 정말로 멀쩡한 소리를 해서 이렇게 됐다고 쳐 봐. 대비는 그 인간 두들기겠다는 소리를 내 앞에서 한 거지.
아주 몹쓸 짓이야!
떼엑!
그러니 대비도 차도살인 가지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것을 이해하였는지, 대비가 말했다.
“허, 좋소! 어디 한번 봅시다. 나도 내 딸의 살림집이 걸린 일이니 살살 하지는 않을 거요.”
“……제가 아니라 김자점을 말씀하시는 게 맞지요?”
대비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요.”
그런데 왜 나를 노려보십니까?
* * *
살인미소를 피해 곧바로 즉조당으로 피신한 나는, 그간 나를 모셔 온 내시를 불렀다.
이름은 최언순崔彦恂.
오래전부터 왕실을 모셔온 사람으로, 선조가 개같이 도망칠 때도 함께해서 호성공신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내가 일 하나만 맡겨도 되겠습니까?”
최언순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하명하소서.”
“조만간 외부와 대비전 사이에 오가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대비가 직접 쇠몽둥이를 들고 김자점을 찾아가지는 않을 테니까.
외부에서 심부름해 줄 사람, 혹은 그런 인물과 연결해 줄 사람이 안팎을 오가게 될 거다.
그것이 대비의 끈이지.
“대비전에서 사람을 보낼 수도 있으니 그 점도 간과하시면 아니 됩니다.”
“명심하겠나이다.”
“아무튼, 궐이나 대비전을 오가는 이 중 눈에 띄거나 수상한 인물이 있다면 내게 알려주세요.”
“예에.”
최언순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 * *
이조吏曹의 관직은 모두가 알짜로 여긴다.
무려 문관의 인사권을 지녔으니, 자연히 신하라면 모두가 이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무관도 마냥 예외는 아니다.
칼잡이가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므로 무관의 품계는 법으로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그 상한선에 이르고도 출세를 바란다면, 역시 이조에 좋게 보일 수밖에 없다.
육조六曹의 서열 이·호·예·병·형·공에서 이조가 이유 없이 앞서는 게 아니다.
하지만…….
“부족해.”
김류는 이조의 참의가 되고도 영문 모를 무료를 느꼈다.
이것이 성취 뒤에 으레 찾아온다는 공허함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김류는 숙고 끝에 자신이 어디서 무료함을 느끼는지 알았다.
이건 성취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체감이 부족한 거다.
김류가 숙적으로 삼고 처단 대상으로 여겼던 과거의 북인들은 무한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들 저택 입구에는 사람이 마르지 않았으며 창고는 바닥을 보일 일이 없었다.
북인은 천지사방에 피폐함을 만들어낸 채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으나, 그 괴리야말로 김류가 물리치려던 것이었다.
반정으로 북인의 이런 작태가 근절되었냐면, 분명 근절됐다.
저들은 과거의 흉내는커녕 옴짝달싹도 못 하는 지경이 되어서 눈치만 볼 따름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원했던 건, 이런 북인의 징벌이 아닌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자신의 문지방이 빠르게 닳고 사랑방에는 색색의 보따리가 즐비했어도 이런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김류는 고민해 보면서도 자신의 추측을 쉽사리 긍정할 수 없었다.
그가 처단한 북인들처럼 사는 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반정에 정의는 어디 있단 말인가?
단순히 반란일 뿐이지 않나.
그러나, 김류는 자신의 욕망을 단호하게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야, 누군들 부귀영화를 마다하겠나.
거기에 ‘북인처럼?’ 이라는 단서가 붙으니 꺼림칙해지는 것뿐이다.
‘…….’
김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욕망에 솔직해진다고 해서 그것을 좌시할 왕이 아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기 위해 싸운 이들조차 도적으로 몰아 수장해 버리지 않았던가?
김류는 그것을 경고로 해석했다. 당장이야 즉위 초반이라 반정 세력의 지지가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필요도 없어지고 왕에게 찍힌 자들은 가혹한 숙청을 면치 못하겠지.
‘부귀영화도 좋지만, 그 대가로 가슴 졸이며 살다가 말년에 피곤해지는 건 수지가 맞지 않아…….’
김류는 살면서 한명회가 부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젠장, 차라리 바쁘기라도 하면 좋겠군. 바쁘면 아무런 생각도 안 들 텐데.’
왕에게서는 지시가 없다.
토사구팽인가?
그것은 아니리라.
왕은 기를 쓰며 대드는 이귀조차 쌍욕과 망신을 안기면서도 일을 맡겼다. 자신을 옹립한 공신들을 처분해 버릴 생각이라면 이귀 같은 작자를 기용할 리 없었다.
단지 이귀 같은 놈은 쓰면서 자신에게는 별다른 일감이 떨어지지 않으니 문제지.
‘내가 그 괴팍한 놈보다 쓸모가 없단 말인가?’
설마!
김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이귀가 기용된 건 그가 무식하리만치 호전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이다. 외관들의 반발을 뒤집어쓸 화살받이로는 적격이지. 그런 일에 자신이 투입되지 않은 건 이귀와 달리 자신은 화살받이로 쓰기에는 아깝기 때문이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주인 어르신.”
노복의 부름에 상념이 깨지고, 김류는 문지방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궐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궐에서?”
김류는 웃으며 실소를 흘렸다. 이것 보라지. 결국에는 자신이 나설 차례가 왔다.
그간 ‘궐의 부름’을 받고서 굵직한 일을 맡게 된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대표적으로 삼의정만 해도 그렇다. 김류는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서 궐을 방문하였으나, 막상 도착하니 자신을 부른 사람은 왕이 아니라 대비였다.
“내가 이조참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불렀소.”
기대감은 처참하게 붕괴했으나, 대비와 면대한 상태로 허술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김류는 감정을 뒤로하고서 답했다.
“부탁이라니요. 편하게 명하시옵소서.”
“공주의 저택을 새로 짓는 대신 광천위의 집을 활용하게 된 게, 김자점이 처음 발의한 일이라지요?”
‘뭐어?’
김류는 반사적으로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김자점이 왜 언급된단 말인가.
오히려 예식을 축소하려 한 사람은…….
“주상과 논의해 보니 김자점 그 작자만 조용해지면 공주를 배려할 수 있겠더이다.”
……왕에게 뒤통수 맞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