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2화
대비의 명령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정오품 관직인 사직을 지냈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이조의 당상관이 될 수 있었던 건 반정을 주도해 폐모론을 발한 북인과 이를 묵인, 조장한 폐주를 축출해 낸 덕이니까.
단순하게 정리하면 ‘대비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은 대비에게 엄격하기 힘들었고, 대비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따를 수도 없지.’
왕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대비는 현실감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스스로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이의 명령을 무턱대고 따랐다간 반드시 덤터기를 쓰게 된다.
‘하지만, 이 일에는 왕이 배후에 있구나.’
김류는 생각했다.
이래서 방심할 수 없다고.
하가 예식을 축소한 장본인은 왕이었으나 왕은 그 대가를 김자점의 몫으로 돌렸다.
졸지에 김자점은 저도 모르게 살인 교사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왕은 아쉬울 게 없다. 전부터 김자점이 소인배에 불과함을 파악하고서 쓰다 버릴 패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득은 이득대로 취하고 견제의 대상들만 싸움을 붙여놓았다.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것도 왕의 계획이 아닐까?
‘그렇다면 안 따르기는 어렵다.’
왕의 의향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간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탓이다.
다음에는 자신이 김자점의 위치에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김류는 마음을 굳혔지만, 단언에 앞서 김자점과의 빛바랜 인연을 떠올렸다.
언젠가 찾아와 대문 앞에 납작 엎드리고서 충성을 맹세하던 그때의 순간은 여전히 선명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후의를 구걸하는 자는 흔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대체로 무릎이 가벼운 만큼 신의도 가볍게 마련이었다.
‘예상대로 되었지.’
배신이 이토록 빠를 줄 몰랐을 뿐.
적개심을 되찾은 김류가 말했다.
“대비마마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대비가 곧장 반색해서 말했다.
“역시. 이조참의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충신임을 알고 있었소.”
“더 일찍 나서지 못해 곪기만 해온 대비마마의 숙원을 풀어드릴 수 있다면, 소관으로서는 망극할 뿐입니다.”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그럼…… 마마께서는 김金이 죽기를 바라사옵니까?”
노골적인 질문에 대비가 얕게 헛기침했다.
“그렇소. 나는 공이 김을 확실하게 없애주기를 바라오. 그편이 화근을 남기지 않는 데도 이롭겠지.”
김류도 동감이었다.
김자점은 무릎도 신의도 한없이 가벼운 놈이다.
원수진 채 목숨을 붙여놓는다면 무슨 후환이 되어 돌아올지 몰랐다.
반드시 기를 써서 복수하려 들 터.
확실하게 끝을 보는 게 이로웠다.
‘전하도, 대비도, 나도 그편을 바라니 깔끔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군.’
이마저도 왕의 계획일까?
* * *
“김류가 오갔단 말이지…….”
그동안 석어당을 주시했던 내시 최언순이 알려주었다.
대비의 방식은 단순했다.
곧장 김류를 불려다가 앉혀놓다니.
더 은밀한 방식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바람 빠지는 선택이었다.
‘무난한 선택이기도 하지. 김류는 대비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김류가 대비 앞에서 약해지는 것과 김자점을 죽인다는 극단적인 계획을 따르는 건 별개의 문제다.
신하가 다른 신하의 암살을 시도하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니까.
‘대비에게는 운이 좋았던 셈이지.’
반정이 있던 날 김류와 김자점은 갈라졌으니까.
그리고 김류는 내가 김자점을 총애하는 게 아님을 안다.
대비가 김자점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면, 김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나의 의도임을 알아챘겠지.
그가 대비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면 본인이나 대비를 믿어서가 아니라 나를 믿어서일 거다.
‘김류가 대비가 가진 끈이어서도 아니고.’
괜히 긴장했다.
살살 안 하겠다고 겁을 주더니.
역시나 내가 유의해 둘 대비의 비밀스러운 끈 따위는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대가로 김자점은 목숨을 잃겠지만, 뭐. 딱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 * *
김류는 대비에게서, 그리고 왕에게서 중임을 맡은 뒤 꼬박 밤까지 기다렸다.
대기하는 동안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긴장 때문에 손에 잡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두가 잠든 순간이 되어, 김류는 아들 김경징을 불렀다.
“네가 나를 도와야겠다.”
“무슨 일입니까?”
“처치할 사람이 있다.”
부친의 예상치 못한 말에 김경징은 핏기 가신 얼굴로 물었다.
“……처치, 라니요?”
금상이 즉위하고 저들의 천하가 펼쳐졌거늘, 야음을 틈타 누군가를 노리겠다는 말인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심기를 거스를 수밖에 없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진다면 상관없겠지만…….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이고, 영원한 비밀 또한 없는 법이다.
“위험합니다!”
김경징의 다급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김류는 태평하게 답했다.
“내가 단독으로 벌이는 게 아니다. 위에서 맡긴 일이야.”
“……어명입니까?”
김류는 답하지 않았다.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됐지, 자신이 파헤친 상세한 사정까지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썩 치밀하지는 못한 아들이다.
술 몇 잔 들어간 기념으로 친우들에게 오늘의 일을 발설이라도 했다간 여러 사람 곤란해지는 수가 있었다.
“노복들을 무장시켜라. 너도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알겠습니다.”
김경징은 고지식한 아버지에게 감히 캐물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예를 올린 뒤 사랑방을 나섰다.
김류는 잠깐 열린 방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았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밤이었고, 은밀하게 흉계를 실현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김류는 곁에 놓아둔 의복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원색으로 염색된 이 의복은, 오늘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검게만 보일 것이다.
원래 이럴 의도로 마련한 옷은 아니었다.
“그러게 적당히 해야지, 왜 주인을 무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댔던 허균이 끝내 역적이 되어 죽은 이유는 주인을 배신해서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이첨이라는 건 아니고.
김자점이 허균 같은 짓을 했다는 거지.
김류가 옷을 갈아입고서 벽에 걸린 환도를 챙길 즈음, 밖에서 김경징이 말했다.
“소자와 노복들의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나가마.”
김류는 짧은 대답과 함께 사랑방을 나섰다. 마당에서는 먼저 환복과 무장을 마친 아들과 노자들이 맞아주었다.
다들 바짝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으슥한 밤에 이러고 있으니 김류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순간이 재현되는 듯했다.
그때도 느낌은 지금과 비슷했지.
앞으로 벌어질 일은 크게 다르겠지만.
김류는 살짝 고개를 들고서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몇 사람의 고개가 함께 돌아갔지만, 그들은 특별한 무엇도 볼 수 없었다.
“……?”
가만히 눈을 감았던 김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딱따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딱따기란 두 개의 막대기를 느슨하게 묶어놓은 것으로, 순라꾼들이 야간 순찰을 증명하기 위해 그 이름처럼 딱딱 치면서 돌아다니는 물건이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이 오밤중에 딱따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위에서 손을 썼다는 뜻이겠지.
‘한성부 판윤이 왕의 사람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
구굉.
왕이 오늘날의 일까지 염두에 두고서 그를 판윤으로 두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설령 그렇더라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건 순라꾼들이 사라졌다고 한들 방심은 여전히 금물이다.
김류는 아들을 내려다보면서 일렀다.
“하무를 나눠주어라.”
이에 김경징은 고개를 끄덕였고, 환도를 빼 들었다.
시커먼 밤하늘에 달빛은 한 점도 없거늘 도면만은 어둠 속에서도 서슬 파랗게 반짝였다.
김경징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끈을 한 뼘 크기로 툭툭 잘라냈고, 발을 옮기며 근처의 노자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김경징이 한 바퀴를 돌아 환도를 다시 칼집에 꽂아놓자 김류가 원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하무란 병사들의 입에 물리는 재갈을 뜻한다.
이는 병사들이 행군 도중이나 적지에 침투할 때 잡담이나 쓸데없는 소리를 내어 군율 또는 은신을 해치지 않기 위함으로, 김경징이 나누어준 끈 조각은 후자의 용도였다.
왕이나 대비가 와와 소리치며 싸우는 걸 원치는 않을 터이므로.
김류는 저마다 끈 조각을 악문 노자들을 향해 일렀다.
“명심해라. 너희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절대 입술이 하무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라. 만약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적발하여 사지를 잘라내겠다.”
김류의 경고에 노비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졸지에 또 목숨을 걸게 된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이제는 입까지 꾹 닫고 있어야 한다니.
그러나 사노비 신세에 거부권은 없었다.
“따라와라.”
* * *
김류가 패거리를 몰고 김자점의 집을 다녀갔다.
본인 딴에도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구굉이 뒤늦게 현장의 정리를 위해 방문했을 때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영락없이 야반도주로 오해할 정도라던가?
김자점이 워낙 감쪽같이 처치되어 아침의 회의에서도 그의 부재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며칠 뒤에는 김자점이 말도 없이 낙향한 게 아니냐며 벌주자는 소리가 나오겠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죽은 사람에게 벌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죽은 줄도 몰라서 부관참시조차 못 할 텐데.
‘그나저나 김류의 재주가 이런 데 있을 줄은 몰랐네.’
여차하면 김자점에 이어 김류까지 조져 버릴 생각도 있었다. 내게 평가가 안 좋은 건 김자점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류는 트집 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일을 해냈다.
배후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조금은 안일해질 법한데도 말이다.
반란을 저질러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때 경험으로 제법 조예를 얻었는지, 오죽하면 구굉이 계속 주시하는 게 좋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김자점도 잘 드는 칼로는 괜찮았지만…….’
사람이 천박하고 음흉했으며, 결정적으로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킨지라 믿고 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잘 써먹은 뒤 이렇게 버린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김자점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김류의 숨은 재주를 발굴해 냈으니, 이런 걸 두고 똥차 가고 외제 차 온다고 하는 거겠지.
‘김류가 외제 차 소리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인간은 아니다만…….’
뭐, 내가 조선에 떨어질 때 외제 차도 예전 외제 차 같지는 않으니까 상관없으려나.
’아무튼, 대비의 소원은 들어주게 됐네.‘
김류와 김자점이 멋지게 공멸했다면 나 역시 멋지게 지갑을 닫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구질구질하게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대비의 기고만장한 얼굴을 보려니 벌써 피곤해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