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3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고 대비도 사양하지 않으니 이대로 가례를 올려도 무방하겠거늘, 신하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일국의 왕녀가 하강하는데 절차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단다.
역시 꼬장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가례청을 세우고 간택을 시작했다. 후보는 홍우원 단 한 사람이었다.
“전하께 인사 올리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내가 공주의 친부는 아니지만, 대비는 간택하는 자리에 왕이 빠지면 섭섭하다고 했다.
그래서 초간택初揀擇에 이은 재간택再揀擇에 참여했다.
“검증이야, 앞선 초간택에서 충분히 이뤄졌겠지요?”
처음부터 합석하지 않고 재간택에서야 나선 이유는 이 때문.
나야 홍우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 대비처럼 파헤치고 거듭 검증할 필요가 없다.
그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도 좀이 쑤시는 일이지.
이 사람의 심성은 어떠하며, 이런 상황이었으면 이렇게 했을 거다, 하고 천기누설을 늘어놓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자잘한 것을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편하게 일러주시옵소서.”
“그럴까?”
아직 홍우원은 신하도 무엇도 아닌 일개 선비일 뿐.
왕에게 존대를 듣는 건 벅차겠지.
“알고 있을 테지만, 부마가 되면 출사는 불가능해. 시험 준비를 오랫동안 했다고 들었는데 미련은 없나?”
“작년 소과에 입격했으니 체면은 갖추었고, 대과는 준비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미련은 없사옵니다.”
작년에 입격했다며?
그럼 한 해를 꼬박 대과 준비만 한 거 아니야?
꿈과 그간 고생을 전부 내려놓고 공주와 혼인하겠다니 콩깍지가 단단히 씐 모양이다.
그래, 본인이 공부보다 공주가 더 좋다는데 뭐라 하겠어.
“춘부장께서는 사정을 알고 계시고?”
“예에.”
“무어라 하시던가?”
“부마를 구한다는 소식은 전부터 들었으나, 신이 그 부마가 될 줄은 몰랐다며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간택에 응모한 것도 아닌데 대뜸 자식이 부마가 됐으니까.
아마, 왕실에서 수배해 잡아간 게 아니라 공주가 직접 간택하고 홍우원이 응했다는 걸 알면 더 놀라지 않을까?
홍우원의 부친이 이 혼인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처음부터 원한 일이라면 진즉 응모했겠지.
전도유망한 아들이 부마가 되어서 꿈을 펼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홍우원 혼자서 초간택에 이어 재간택까지 치르고 있으니…….’
쌀이 이미 익어 밥이 되었으니 어쩌랴?
얌전히 아들과 며느리의 백년해로를 지켜봐야지.
“잘하시게.”
더 알아볼 것도 없고, 덕담은 짧게 했다. 내가 단상에 오른 교장 선생님도 아니고.
“잘하겠습니다.”
“아니, 잘해야 한다고.”
홍우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신이 배움이 부족하여 전교를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음, 어려운 소리는 아닐세. 비유적으로 말해서, 자네의 신혼집은 누군가의 무덤을 깔고 있어서 그래.”
“주상…….”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대비가 낮게 일렀다.
“신랑이 신혼집 비화를 알아두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다 잘되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나는 다시 홍우원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대가 공주를 잘 대해주지 않아서 나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주춧돌 아래에 무덤이 하나 더 깔릴지도 모르지. 이건 비유가 아니네. 자네가 정말로 거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대비가 척추를 접어다가 쑤셔 넣을 테니까.
“하하! 하, 하하하!”
당부를 마치고 파안대소를 터뜨리니 홍우원은 내가 농담이라도 한 줄 알았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 아니야, 우원아.
* * *
홍우원을 마주하는 건 재간택이 끝이었다.
그새 홍우원이 실수해 신혼집 주춧돌 아래로 들어가서…… 는 아니고, 원래 공주의 가례는 종친이 왕을 대신해 주혼을 맡는다.
가례 절차가 이어지는 동안 외부인이 궁궐을 들락거리고 왕이 거기에 끌려다닐 수는 없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들 잘하겠지!”
왕실의 가장으로서 맡은 숙제가 이렇게 또 하나 끝났다.
소현세자는 진짜 세자가 되었고, 정명공주는 다른 사람의 인연을 빼앗는 일 없이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났다.
이제 단 하나의 숙제만 남았지.
……인열왕후.
골치 아픈 문제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내가 졸지에 인조가 되어버리긴 했다만, ‘나->인조’와 ‘나=인조’가 같은 건 아니니까.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인조 맞으니까.
영락없이 인조인 사람이 자신은 인조가 아니며, 실은 다른 사람이라고 호소해 봐야 과중한 업무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뿐이다.
‘이걸 어쩌냐.’
비답批答 쓸 때 휘두르던 세필을 윗입술에 걸고서 고민해 봤지만, 역시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한참 보고 있었던 문서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좌찬성 이상의의 필체다.
그런데 의외인 점은 이 문서가 병조에서 올린 서계의 별첨이라는 것이다.
현재 병조의 참의는 북인이라면 발광하는 이귀이며, 서계의 내용 또한 이귀가 전담하다시피 한 방군수포의 현황을 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조선판 국공합작인가?
* * *
지금쯤이면 자신이 올린 서계가 왕의 서안 위로 올라갔을 테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만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의 자존심은 손상됐다.
비록 좌찬성이 숙청된 옛 권력의 주구들과는 다른 인물이라지만 그 역시 원죄를 피할 수는 없다.
당대의 신하 대부분이 폭주하는 혼군과 거기에 빌붙었던 정치 세력의 만행을 그저 두고만 보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원죄를 지닌 대부분은 범인凡人일 수밖에 없고, 또 소인배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러한 인물들이 나랏일과 같은 중차대한 임무를 맡아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이유로 이귀는 좌찬성과의 협업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직접 찾아와서 제안한 건 분명 가상했다. 좌찬성의 자존심에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도의에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좋게 봐주어도 좌찬성은 불청객일 뿐이고 그의 제안 역시 독이 든 잔에 불과했다. 약간의 편의를 얻고자 타협에 응한다면 자신은 얼마나 많은 가치를 잃을 것인가?
하지만, 악독한 왕의 존재가 이상적인 판단을 가로막았다.
자신을 옹립한 공신들을 속이고 조종하며 서로 싸움 붙이기를 좋아하는 자.
덕분에 모두의 앞에서 망신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왕이 권력의 주구만을 위해 그 같은 만행을 일삼았다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았으리라. 단지, 그나마 좋게 볼 여지가 있으므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과 자신이 계속 망신을 당하는 건 별개의 문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일전처럼 조리돌림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것이 이귀가 좌찬성의 협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급한 마음에 자존심을 꺾고 도움에 응했지만, 막상 서계가 올라가니 왕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구나.’
자신의 타협을 비웃지는 않을까?
아니면, 자신만 이렇게 쓸데없이 고뇌하고 있는 걸까.
왕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고뇌는 부끄러운 일이 되겠지. 이귀는 차라리 왕이 의식해 주었으면 했다. 자신의 구차한 타협을.
“…….”
이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당장 궁궐로 쳐들어가 서계를 보고 비웃으셨나, 대놓고 물어보고 말지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끙끙 앓는 건 본인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귀는 이 모든 헛짓거리를 끝내기 위해 과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오래전 궁궐에서 받아온 것.
그것을 아직도 먹거나 버리지 못한 채, 이귀는 과자 하나만 덩그러니 넣어둔 문갑을 다시 닫아버렸다.
* * *
“밀어주는 사람이 생기니 진도가 빠르긴 빠르구나?”
경외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한양에서 조사하는 건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예외는 있었다.
좌찬성은 본디 삼의정 다음가는 종일품 관원.
종이품이 한계인 지방관들이 좌찬성의 협조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
물론, 한계는 명백해서 정보의 세밀함은 무척 부실했다.
지방관들이 지시를 받고 조사할 시간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곤란해서이리라. 그러니 지금 주어진 정보들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대금을 받고 놓아준 병사의 비율이 낮게는 3할에서 4할…….’
세 명 중에서 한 명이 빠진 셈이다. 이마저도 적은 비율은 아니거늘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비율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일전 함경도와 평안도에 각기 순변사로 파견된 한명련과 정충신은 나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노고가 반영되었는지, 함경도와 평안도만은 적나라한 비율을 보였는데 과반이 방군수포로 풀려났다.
개중에서도 심각한 곳은 세 명 중 둘, 네 명 중 셋 꼴이었으니 이런 곳은 전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자동문이었지.”
이 와중에도 조정의 일각에서는 병력의 해산을 요구한다.
대표적으로는 호조판서 이광정이 그러했으나, 과연 이 꼴을 보고도 해산을 입에 담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해산은 이미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거기에 끼지 못한 이들이 과중한 부담으로 비명을 질러대니 그것만 듣고 징병이 가혹한 줄로 알 뿐이다.
“너무 썩어서 어디부터 손 봐야 할지 모르겠네.”
지방군에 충분한 지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조세 개혁이 현재 진행형인 지금은 여유가 없다.
설령 있더라도 지원은 썩어빠진 이들의 뱃속으로 전부 들어가겠지.
먼저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을 솎아내는 게 맞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눈에 차지 않는 자들을 다 솎아내고 나면 남아나는 게 없을 듯했다.
아니면, 그전에 솎아져야 할 놈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중앙에 대항하던가.
“잘하는 걸 할 수밖에 없겠어.”
나는 그간 자리만 차지한 채 임지는 가지 않고 도성에만 처박혀 있던 인간을 불렀다.
이번 호출은 나도 탐탁지 않았다.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몰랐으니까.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이괄.
이 시기 두 번의 배신자라면 김자점보다 이괄이 훨씬 유명하다.
김자점은 자신을 밀어준 인조가 지옥에 간 뒤에야 배신했고, 그전에 효종에게 찍힌지라 변명거리는 있는 반면에 이괄은 자신을 총애하던 인조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니까.
그것도 광해군을 배신한 지 두 해도 안 되어서.
‘반란 중독이야.’
아들 이전李栴이 역모에 엮였다지만, 이괄은 인조의 일관적인 보호를 받아 조사에서 빠졌다. 반란 혐의자의 부친이었고 심지어는 군령권까지 가졌는데도 말이다.
이런 과도한 특혜에도 이괄은 왕의 의도를 느끼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전과 함께 역모의 주모자로 언급된 사람은 한명련과 정충신, 기자헌奇自獻과 이시언李時言 등이 있다.
앞선 두 사람은 신분 때문에, 후자의 두 사람은 당적 때문에 만만한 표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의도가 뻔한 고변이었다. 오죽하면 이괄과 마찰이 있었던 김류마저 신중론을 펼쳤을까?
과연 난이 터지자 정충신은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나아가 결백을 드러냈다. 고변이 무고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괄은 섣부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선전관이 아들을 압송하고자 군영을 방문하자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괄이 쉬운 판단을 너무 안일하게 했어.’
마침 대병을 거느리고 있고, 이미 반란에 성공해 본 경험도 있겠다, 골치 썩이던 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건 아주 쉬운 선택이었을 거다.
살아남기 위해 마지못해서?
그랬다면 도망치는 인조와 신하들부터 사로잡아 해명이든 보복이든 해야지, 한양 점거했다고 곧장 흥안군興安君을 추대하고 눌러앉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후자는 아무리 보아도 성공한 반란의 공신 놀음을 해보겠다는 의도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괄은 반란이라는 쉬운 판단을 너무 안일하게 했다는 거다.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똑같이 쉽고 안일한 판단을 할 사람이고.
“전하, 병마절도사 이괄 입시하였습니다.”
“……들라 하세요.”
때가 됐군.
예로부터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