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화
“부르셨사옵니까.”
이괄과 이렇게 가까워진 건 이번이 처음인가.
그래서인가?
어둡지 않은 곳에서 대면한 이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육조거리 앞을 돌아다니는 여느 문관을 잡아다 놓기라도 한 듯.
그러나, 손끝에 두껍게 배긴 굳은살은 이괄이 엄연히 무관임을 증명했다.
첫 대면에서 그는 그 손끝으로 시위를 튕겨 창의문을 수호하던 무관을 죽이며 반란의 시작을 알렸다.
여차하면 두 번째 반란마저 일으킬 자의 과감함과 무모함이었다.
“앉으세요.”
맞은편의 방석을 가리키며 권하자 이괄이 예, 짧게 답하며 자리했다.
“내가 경을 부른 이유는, 근래에 병무와 관련해 중대한 결점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시옵소서.”
“최근 병조가 외방을 들쑤시다가 서계 하나를 올렸는데,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이괄은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일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송구하옵게도 상세한 사정은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나는 서안에 올려두었던 별첨 문서의 일부를 밀어냈고, 이괄은 무릎을 꿇은 채로 슬금슬금 다가와 문서를 받아갔다.
그리고 눈알을 굴리며 문서를 읽어나갔다.
“보면서 들으세요. 옛 중국에서는 20세 이상의 정남丁男을 성정成丁으로 쳐서 입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조는 16세부터 성정으로 치고 군역에 충당하는데, 갖은 폐단이 있음에도 남북으로 오랑캐를 두어서 구습舊習을 혁파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예.”
“한데, 이와 같은 폐단을 감수하고도 군액軍額의 정원을 반절도 충당하지 못하니, 이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하면서도 변방을 수호하는 실익이 없는 것입니다.”
“예.”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예.”
반사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던 이괄이 문서를 내려놓고서 말했다.
“방군수포도 본디 군역의 과중함을 덜어주기 위해 시행한 제도인데, 이를 혁파한다고 군문과 백성의 사정이 나아질지 모르겠사옵니다.”
“내가 방군수포의 의의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나, 지금은 제도가 의의를 잃고 외관들의 축재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은 외관이 정한 시세에 따라 현물을 바치고, 그것은 지방군의 운영비가 아니라 외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래서 백성들의 부담은 여전히 심한데 지방군은 가난하고 인원은 항상 부족하다.
그렇다고 군사를 해체해 버릴 수도 없으니, 운영비를 어떻게든 거두려다가 생겨난 폐단이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폐단이다.
군역의 대상이 아닌 어린아이나 무덤으로 들어간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강제한 것이다.
“지금 시정하지 않으면 또 다른 폐단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방관의 대가는 내가 홍타이지에게 원산폭격을 박는 것만이 아니다.
한계까지 치달은 제도의 문란함은 단 하나의 결말로 귀결된다.
망국.
그래서 조선이 세워졌고, 조선이 멸망했다.
“이제 와서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제도에 탐관을 하나하나 솎아내는 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 자체를 덜어내어 크게 정비하고자 하니, 북병사께서도 이 뜻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썩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나의 일에 엮이게 된 것부터가 귀찮고 곤란하다는 듯.
처음부터 예상한 바였으므로, 나는 대가를 약속했다.
“병마절도사께서는 지금보다 더 높은 관직을 원하시겠지요?”
“대장부로 태어나 출세를 마다하는 사람이 있겠사옵니까.”
유난히 빠른 대답이었고, 거기에는 한 치의 의문도 없었다.
“나는 관리들이 저마다의 위치에 상응하는 능력을 가졌으면 합니다. 일국을 운영하는 군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바람이지요. 그것을 내가 총애하는 사람에게도 차별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괄은 나의 감정을 얼굴로 표현해 보겠다는 듯, 입술을 내밀고서 시선을 피했다.
내가 차별을 해줬으면 하나?
“내가 경을 불러낸 이유를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은근히 속내를 드러냈지만, 이괄은 이해하지 못한 듯 여전히 삐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신이 어찌 전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겠나이까.”
아이고야.
이렇게까지 무식하면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경을 더 크게 중용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렇게 불러서 나의 마음을 말하겠습니까?”
이괄은 그제야 솔깃했는지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내가 경을 중용하고 싶은데, 원칙에 예외를 둘 수 없으니 재주를 증명할 기회를 드리고자 이러는 것입니다.”
“……신의 재주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옵니까?”
마치 억울하다는 투인지라, 잘 타일렀다.
“경이 가진 과감함을 내가 낮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국정에 있어 필요한 재주는 단순한 과감함이나 결단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
“경께서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재주가 재상의 자리에 걸맞은지를요.”
자존심을 살짝 긁어주었더니 이괄은 입술을 여전히 내민 채이면서도, 더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먹혀들어서 다행이군.
내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이괄에게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만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난을 일으켰을 때 안일한 선택은 하지 않았겠지.
나의 의도는 이괄과 부패 지방관의 공멸이다.
과연 그 무모한 성격에 창궐하는 부패를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칼이나 뽑아 들 것 같은데…….
물론, 반대편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지는 않을 거다.
강력하게 저항하겠지.
요즘 이귀의 집에 투석이 잦다더라.
왕의 영역인 한양도 이 지경인데 눈이 닿지 않은 지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다가 누구 한 사람 쓰러지면 내가 나설 때가 되는 것이지.
“나는 경이 해낼 수 있다고 믿고, 또 해내기를 바라는데, 경은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다면 바로 직에 제수하겠습니다.”
재차 자존심을 긁으며 제안하니 이괄이 눈을 부릅떴다.
“할 수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여태 기다려온 대답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봉투를 서안에 놓고서 밀어냈다.
“이것은…….”
“봉서封書입니다.”
“……봉서요?!”
“이편이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 유리합니다. 큰 건을 맡은 사람이 잡무로 심력 빼앗기는 걸 원치도 않고요.”
이괄은 봉서를 받아든 채 입술을 핥았다.
봉서封書란 이름 그대로 밀봉된 문서를 말하고, 또 밀봉된 문서가 한두 종류 있는 게 아니지만, 왕이 신하를 불러서 직접 봉서를 건네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다.
하물며 봉서에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일곱 글자가 적힌 경우라면야…….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억지로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심지가 흔들려서야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지.
그래서 살짝 밀어주었다.
“나는 정사공신定社功臣 책록 때 경이 2등에 그쳤음에 불만이 많습니다. 부디 경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아픈 구석을 찔러주자, 이괄의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
그는 봉서를 품에 집어넣고서 결연하게 답했다.
“……예!”
이괄이 비장한 모습으로 떠난 뒤.
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했다.
암행어사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좋고, 또 이괄이 잡무에 정신 빼앗기기를 원치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야 부패 외관들과 싸우는 데 집중할 거 아닌가?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말해서 안 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군령권.
나는 이괄이 병력을 통제하지 않기를 바랐다. 전력이 있는 사람에게 또 칼을 쥐여줄 수는 없지.
* * *
이괄보다 먼저 한양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
무려 명종 때 태어난 사람으로, 예순을 앞둔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를 찾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소북小北의 영수.
함께 소북을 이끌었던 유영경의 음모로 폐주 때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건 서인의 천하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또 한 번 그에게 충성의 증명을 요구했다.
이런 나이라도 내려놓고 살고 싶지 않다면, 고생하는 수밖에.
그리고 현재.
남이공은 철산부에서 배를 타고 가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만 남이공이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는 그동안 배를 탄 적이 없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뱃멀미를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우. 우엑…….”
결국, 남이공은 배 밖으로 아침밥을 쏟아냈다.
대감이 물고기들을 입으로 급여하는 진귀한 장관은 수행원들이 호들갑을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 대감!”
“괜찮으시옵니까?!”
몇 사람이 어쩔 줄 몰라 반쯤 일어서면서 배가 거칠게 휘청거렸다.
남이공으로서는 덕분에 죽을 맛.
그는 황급히 손을 뻗어 휘둘렀다.
“괜찮네! 괜찮, 꺼윽! 커흑!”
남이공의 전혀 괜찮지 않은 반응에 수행원들이 몰려들었고, 갑판은 쿵쾅거렸으며, 배는 더욱 가멸차게 흔들렸다.
때아닌 소동에 노잡이는 다들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며 소리쳤다.
이 모든 소란 속에서 남이공은 생명과 정신이 저 깊은 바다로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머리는 흔들리지, 내장은 진탕이지, 헛구역질은 계속 올라오는데 바닷바람은 비리기까지 하다. 거기에 노잡이의 호통과 수행원들의 호들갑이 고막을 찌르고 귓전을 긁어대는 판이었다.
“으, 으아아아……!”
남이공은 다시 배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물고기들에게 비자발적 급여를 시도했다.
하지만 속을 이미 깔끔하게 비워 버린 관계로, 흘러나오는 것은 쓰디쓴 위액과 길쭉하게 늘어지는 침 범벅뿐.
“끄어어어!”
쿵쾅쿵쾅!
“대, 대감!”
“정신 차리십시오!”
“다들 가만히 앉아 있으라지 않소! 배 뒤집힌다니까!”
“대감께서 위태롭지 않소!”
“돌아갑시다!”
“아니, 가도로 가는 게 더 빠르오!”
“대감께서 모 장을 뵐 상태가 아니거늘 가도로 가서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남이공은 주변으로 몰려든 수행원들을 밀쳐 버리고서 외쳤다.
“으아, 전부 닥치고 꺼져! 이 개자식들아!”
소란과 소동으로 가득한 광기 어린 운행은 뱃전이 가도에 닿으면서 끝났다.
남이공의 방문은 미리 전해져 모문룡은 부두로 마중 나온 상태였고, 그는 남이공이 초주검이 되어 등장하자 무척이나 밝은 낯으로 반겨주었다.
“배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척 떠들썩한데, 많이 즐기셨나 보오?”
남이공은 모문룡을 씹어먹기라도 할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눈이 마주칠 즈음 남이공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예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문룡은 남이공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하고서 제안했다.
“남 공께서 배 타는 것을 좋아하니, 내 공과 함께 배를 타고 이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남이공의 미소가 더욱 어색해졌다.
“하하하……. 도독의 제안은 실로 감사합니다만, 이 사람이 오는 동안에 잠을 자지 못한 터라 일단은 쉬고 싶습니다.”
“기왕 동강진東江鎭을 방문하였는데, 나의 후의를 사양하고 잠만 주무시겠다는 말이오?”
“사양이라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도독의 후의를 맨정신으로 받들지 못하니 예의를 다하지 못할까 근심하는 것입니다.”
“허어.”
모문룡은 탄식과 함께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시간과 의향을 내어서 남 공에게 선유船遊를 제안하였는데, 공이 단호하게 제안하고서 내게 마냥 기다려보라 말씀하시니 기분이 아주 언짢소이다.”
남이공은 모문룡을 징벌하겠다는 왕의 대업에 전심전력으로 동참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