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5화
“대감께서 친히 소관의 임지를 방문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풍기군수 이잠李埁은 마당에 서서 헤실헤실 웃었다.
평소 그가 손님을 맞았다고 구차해지는 일은 없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암행어사가 방문했으니까.
병마절도사의 경력까지 지닌 자였고, 일개 군수인 이잠은 불청객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부럴. 무슨 일이건 벌어질 줄은 알았지만…….’
이잠은 이이첨의 심복이었다.
그는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言官으로서 이이첨의 행보를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쉽게 말해 권력자의 나팔수.
덕분에 최근까지 이잠의 생애는 탄탄대로였다.
집권당 영수의 뒤를 닦아주는 대가로, 이이첨은 대신 그의 앞길을 닦아주었으니까.
그러나 세상이 달라진 지금.
이잠은 금상이 즉위한 이래 좌불안석으로 지내왔다.
술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아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없었으며 방납업자들이 바친 뇌물로 치장하여도 뿌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산해진미를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듯했으며 수입산 비단으로 지은 옷도 납덩이처럼 느껴질 뿐.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잠은 원치 않았고 각오하지도 못했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암행어사라니?’
이잠은 손을 비벼대면서도 고민했다.
압송도, 파직도 아니고 암행어사 파견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차라리 단순한 쪽이었다면 체념하고 말았을 것을.
정녕 과거는 묻어버리고 부정만 털어버리겠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다.
이잠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대청에서 불청객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문서를 성의 없이 뒤적이고 있었다.
‘누가 무과 출신 아니랄까 봐 글자 보기가 피곤하구나.’
거기에 한양에서 풍기까지 오는 동안의 고생은 또 어땠겠나?
말도 못 하지!
이잠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날을 떠올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촌구석으로 말을 몰아야 하는 순간의 심정이란!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터인데, 공무는 잠시 미뤄두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암행어사가 문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혹했나 보군.
“곧장 주연을 마련하겠습니다. 풍기는 예로부터 명승지가 많기로 이름났지요. 명종 대왕께서 친필을 내려주신 소수서원紹修書院도 볼만합니다.”
원하는 대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이잠의 말에 암행어사가 피식 웃었다.
“그럼 소수서원으로 가볼까.”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이잠은 슬금슬금 물러나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암행어사는 손에서 문서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접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게 아니었나? 대충 던져두고 객사에서 편히 쉬면 그만일 것을.
암행어사가 사라지는 순간 문제가 될 법한 문서와 장부를 처분하려던 이잠이었다.
‘대접이 어떨지 두고 보겠다는 건가?’
슬금슬금 물러난 끝에 암행어사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잠은 곧장 아전들을 불러모았다.
불청객의 등장에 긴장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
수령이 부패했는데 아래에서 아전을 지내는 자들이 깨끗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전 하나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이잠은 주변을 둘러보고서 말했다.
“병마절도사까지 지냈다지 않나? 만만치가 않은 사람이야. 정도正道를 따를 수밖에 없겠네.”
그저, 접대를 잘해서 돌려보내는 수밖에.
“저분이 정말로 암행어사가 맞을까요?”
“유척鍮尺에 마패馬牌까지 소지하였잖나.”
유척은 지방에서 도량형을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자이며, 마패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수 있는 증표다.
모두 암행어사가 지참해야 하는 도구. 그래서 암행어사 임명과 함께 내려졌으며 분실 시에는 처벌이 가해졌다.
“가짜 암행어사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이렇게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잠이 한탄하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아전이 말했다.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져 관원을 사칭하는 일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유척이나 마패의 날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새파랗던 시절을 생각하면 풍속도 달라졌고 기술은 그보다 더 발전했다.
관원 사칭이라니.
나 때는 상상도 못 할 짓이지.
“하지만 증좌가 없지 않나?”
의심하려 해도 의심할 구석이 없다.
“진짜 암행어사를 무작정 건드렸다간 더 귀찮은 일만 벌어질 거야. 일단은 대접이나 잘하고 돌려보내세.”
이잠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최선이었다.
“암행어사가 대접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날카로운 눈의 아전이 정곡을 찔러오자 이잠은 답하지 못했다.
만약 암행어사를 회유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래서 그간의 실책과 치부가 한양에 낱낱이 전해진다면, 과연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파직이나 유배 정도로 끝나리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았다. 대북의 수괴 이이첨의 앞잡이였던 자신이니까.
이잠이 고뇌에 빠지자 아전들은 서로를 의식했다.
수령이 암행어사의 방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 이어질 일은 분명하다.
중앙에서 파견된 선전관이 부패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압송하겠지.
문제는 이잠이 그간의 행보로 중앙에 이미 찍혔을 것이 뻔하며, 걸고넘어질 구석이 생기는 순간 일이 적당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어쩌면 일을 크게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이 이용될지도 몰랐다. 예전부터 관리들은 아전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으니까.
일방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억울했다.
* * *
“소수서원은 옛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성리학의 시조 안향安珦의 집터에 세운 조선 최초의 서원입니다.”
“으흠.”
“원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풍기군수를 지내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주청으로 명종 대왕께서 친필이 새겨진 현판을 하사하셨지요.”
“그것이 서원의 새 이름이 되었군.”
“그렇습니다.”
“오는 길에 보았던 현판이 그것인가?”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선대왕께서 친히 내려주신 귀물인데 밖에서 비바람 맞게 둘 수는 없지요.”
“그건 그렇지.”
이괄이 수긍하면서 잔을 비우자, 이잠은 곧장 잔을 채워주면서 답했다.
“대왕께서 내리신 현판은 강학당講學堂 내부에 모셔두었습니다. 어사께서 원하신다면, 사람을 시켜 가져오겠습니다.”
이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네. 내가 이리저리 옮겨도 되는 물건은 아닌 듯하군.”
“결례하였습니다.”
이잠은 사과와 함께 이괄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정자 앞에서 도도히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이곳으로 잘 데려온 듯했다.
이잠은 조금 더 흥취를 돋울까 생각하다가 이괄이 재차 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풍기까지는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일대의 폐단을 조사하기 위해서 방문했다고.”
“그야 암행어사시니 분명 조사할 것이 있으셔서 행차하셨겠지요. 다만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신다면, 소관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하여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괄이 이잠을 마주하고서 물었다.
“아는 건 있고?”
“여부야 있겠습니까.”
이잠은 단호하게 답했다.
자신의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서라면 일대 수령들이야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었다.
다들 대북 앞에서 설설 기었던 주제에, 자신을 두고 얼마나 백안시하던지!
누군가 본다면 그들이 정변을 일으킨 줄 알 정도다.
“말씀만 하시지요.”
이잠의 뜨거운 열의에 이괄이 물었다.
“일전에, 병조에서 조사한 거 있지?”
“아……. 예.”
“전하께서 보시기엔 많이 미흡했던 듯하네.”
이잠의 늘어진 옷자락과 뱃가죽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외관이라면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겠으나 이잠은 특히 깊게 찔리는 기분이었고, 저도 모르게 항변했다.
“하지만, 어사께서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편법을 쓰지 않으면 지방군은 실질적으로 경영할 수가 없습니다. 지방에서 거둔 군포를 왜 중앙이 가져간다는 말입니까? 떼어갈 거 다 떼어간 다음에, 먹고 남은 부스러기로 사람을 쓰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처사입니까?”
이괄은 팔짱 끼고서 침묵했다.
“무관들조차 녹봉이 나오지 않아 고개 숙이며 쌀을 꾸고 다니는 지경입니다. 그런 꼴을 안 보려다가 문제가 생기는 거고요. 하지만 사정을 다 아는데, 탓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중앙에서 돌려주는 군포의 양은 지방군의 운영비로 삼기에는 터무니없이 적고, 인건비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나날이 지방군의 환경이 열악해지는 건 이 때문.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전란을 겪고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지방군은 오합지졸이고 외관들은 각자도생이다. 그러니 각종 편법이 남발할 수밖에 없고, 군적수포제가 확립된 지 까마득한 오늘날에도 새삼스럽게 방군수포가 횡행하는 이유다.
“가난한 양민들 사정에 두 필을 쥐어짜서 중앙에 올려보내고 부스러기나 받느니, 차라리 한 필만 거두어 지방에서 쓰는 게 모두에 이롭다는 겁니다.”
“흐음…….”
이괄은 침음과 함께 옆머리를 긁었다.
얼핏 이잠의 말을 들어보면 틀린 게 없다. 조세 구조는 기형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그로 인해 폐단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을 이용하는 자도 얼마든지 있었다.
“중앙에서는 지방마다 군역 대상자의 수를 보고 납포의 총액을 지정하는데, 군수의 말처럼 해버리면 바로 들통나지 않나?”
“…….”
“누군가에게 한 필을 거두면, 다른 사람에게는 세 필을 거두어야 할 텐데.”
아니면 군역 대상자가 아닌 이에게 한 필을 거두던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백골징포고 황구첨정이었다.
“임의로 베를 거두었다고 한들, 그것이 불가피한 처사였고 다른 의도는 없었다면 장부는 깨끗하겠지?”
써야 할 데만 썼을 테니까.
“……다들 이렇게 합니다.”
“내가 모르고서 하는 말이겠나?”
“그러니 소관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여비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백성들을 쥐어짜서 마련한 뒷주머니에서 말이지?”
“…….”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말처럼, 자네처럼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지방관들 태반이 걸릴 텐데 중앙에서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겠지.”
그것은 사실이리라.
사지에 문제가 생겼다고 그것을 다 떼어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심각한 경우만 한해 일벌백계가 내려질 터이고, 나머지는 흐지부지 넘어가겠지.
하지만.
‘내가 나머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잠은 과거를 회고하며 입술을 핥았다. 그새 바싹 말라버린 살갗이 버석거렸다.
“……어사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소수서원과 일대는 손님 대접을 이유로 사람을 싹 치워놓은 상태였다.
주변에는 접대에 동행한 소수의 아전과 수발을 들어줄 관노들만이 전부.
이괄은 다시 죽계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풍기군수를 설득하는 게 어렵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풍기군수는 조금도 설득되지 않았다.
이잠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아전들의 불온한 분위기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것들이 꼬리 자르기를 하지는 않을까?
위도 아래도 생로生路 하나 없이 꽉 막혀 버린 마당이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하기는 어려운 상황.
이괄은 막 비운 잔을 내려놓았고, 이잠은 술병을 들었다. 손에 잡히는 무게감이 아주 가벼웠다. 아마 술병이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잠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챙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