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화
챙강!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자기 파편이 비산했다.
허공에 튄 물방울들은 햇빛이 투과하며 오색찬란하게 빛났고, 죽계천을 보며 정신이 팔려 있던 이괄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웅크렸다.
그로부터 이잠이 기둥만 남은 병 주발을 이괄에게 내던지고, 칼을 찬 아전들이 누각으로 쳐들어오며, 이괄이 다급히 몸을 빼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수 초.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이괄은 눈을 찌푸리고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런 개 씨부랄……!”
아전들은 이괄의 낮은 으르렁거림을 들으며 허리춤에서 환도를 빼냈다.
채챙……
챙……
스산한 소리가 죽계천의 물줄기 소리와 뒤섞이고, 이잠은 흥분으로 헐떡이며 말했다.
“어사. 생각해 보니 내가 협조한다고 살길이 있지는 않은 듯하오!”
“……생각?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나는 금상이 임명한 어사야!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목숨 부지할 길이 생길 줄 아느냐?!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다!”
이잠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히히,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 ……내가 잡힌다면 말이지!”
어사를 놓아주어서 벌어질 일은 뻔했다.
당장 한양으로 압송되어 극형을 당하겠지.
하지만 어사를 처치해 버리면 시간만은 벌 수 있다. 또 어쩌면 모르지, 환국 후 지금처럼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지도?
최악이라 봐야 가만히 있어서 벌어질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변 사람 몇이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겠지만, 자신도 죽을 텐데 무슨 상관이랴.
“미친놈!”
이괄이 이를 악물고서 외쳤으나, 갈 데까지 간 이잠과 아전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뭣들 해! 처치해야지!”
이잠이 재촉하자 아전들이 칼끝을 내밀고서 이괄에게 다가갔다.
비록 공수空手에 혼자라지만 무려 병마절도사까지 지냈다는 어사.
무작정 달려들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무기를 빼앗기거나 제압이라도 당한다면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괄은 제대로 된 무장이 아니었다.
임란 때부터 십 대 초반의 나이로 종군하긴 하였으나, 오히려 그런 나이였기에 별다른 공은 세우지 못했던 이괄이다.
대신 화려한 이력을 훈장처럼 달고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리고 함경도의 병마절도사에 제수되기 전까지는 후방의 수령 자리나 전전해 왔을 뿐.
이괄은 실전형이 아니라 정치형 무장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이 보인 틈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이괄은 아전들이 머뭇대는 동안 등 뒤로 잡고 있던 난간에 힘을 주고서 몸을 띄웠다.
그 날렵한 움직임만은 실전형 무장 못지 않았고, 이잠은 입을 쩌억 벌렸다.
“도망친다! 쫓아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잠은 아전들의 등판을 밀어내고 어깨를 잡아당기다가, 그새 멀찍이 도망친 이괄의 등판을 보고는 칼 하나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이괄이 넘어간 난간으로 달려가 훌쩍 넘었다.
몸이 잽싸지는 못했던 관계로 한바탕 크게 구르며 무릎까지 자갈밭에 찍었으나, 이잠은 아픈 줄도 모르고서 이괄을 쫓았다.
만약 이괄을 놓친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무릎이 문제가 아니었다.
* * *
때아닌 추격전이 펼쳐진 풍기로부터 한참 북쪽.
이잠은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분명 각오하고서 벌인 일이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견뎌내지 못했다.
“풍기군수가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괄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목을 매고 죽었다라…….”
회의 도중 도착한 치보馳報에 여러 사람이 숨을 삼켰다.
어쩐지 그 양반 요즘 안 보이더라니,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가.
그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일개 지방관이 암행어사를 베려고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도저히 작은 일이 아니옵니다.”
영의정인 이원익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 선전관을 파견하시어 진상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압송하시옵소서.”
“그래야겠습니다. 이괄도 당장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하세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증언한다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급보에는 이괄이 여러 군데를 다쳐 요양 중이라는 첨언이 있었지만,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괄은 위험한 사람이다.
그의 건강을 내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겠지.
더군다나 이괄은 습격을 당함으로써 가치를 다했다. 그는 김자점과 마찬가지로 두 번의 반역을 일으킨 자.
쓸모를 다 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지.
“이괄은 큰일을 당하여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안정을 취하게 두시지요?”
이원익의 조심스러운 권고에 이귀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영상은 방금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어서 또 한 사람이 합세했다.
김류.
이괄과는 반정이 있던 날부터 해소되지 않은 원한이 있는 사람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의 증언이라면 경위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터인데, 요양이 중요하겠습니까.”
김류로서는 이괄의 상태를 걱정해 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괄이 무리해서 상경하다가 병이라도 얻는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영의정의 우려는 잘 알지만, 중차대한 일이니 한 사람만 배려할 수는 없습니다.”
이원익이 걱정하는 건 이 사건이 옥사로 번지는 거겠지.
서인이고 반정공신인 이괄을 공격한 게 대북이자 이이첨의 하수였던 이잠이라 더욱 신경이 쓰일 거다.
한동안 수그러들었던 정치성 보복에 다시 불붙기 좋은 상황이지.
이런 건 내가 화제를 돌리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유도할 생각이기도 했고.
“내가 이괄을 풍기로 보낸 이유는 자질 부족한 사람이 군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변방에서 자행되는 폐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
“생각건대, 풍기군수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그 폐단 때문이겠지요. 고작 부정한 이익을 위해 관리가 되어서 다른 관리에게 상해를 입히고 왕명마저 거역하였으니 더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지당한 하교라는 듯 이원익이 허리를 숙였다.
“각 도 수령들에게 오늘의 일을 알리고, 지난 조사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다시 조사하라고 전하세요. 내가 이 폐단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원익의 수긍에 이견은 없었다.
풍기군수가 일으킨 일은 반역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까. 여기에 굳이 한발 걸치지 않아도 죽을 방법은 많았다.
* * *
다각거리며 나아가는 말 위에서.
이괄은 죽상을 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으으……!”
앓는 소리는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결국에는 수행원이 참다못해 물어볼 정도였다.
“편찮으시옵니까?”
“……아니!”
빌어먹을 역적 놈들과의 추격전으로 얻은 부상이 아직도 쑤셔대고 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다른 이유였다.
‘내가 왕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면 고개나 들 수 있겠나!’
이괄이 한양을 떠나기 전 왕은 그를 불러 더 크게 기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뿐이라면 참 좋았겠지만, 왕은 이괄에게 더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재주를 전제했다.
참으로 깐깐하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사람에게 무슨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공신이 많은 데 비해 정승의 자리가 적은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반정에 성공하기 무섭게 김류와 이귀가 각자의 파당을 이끌고서 갈라졌겠나. 다 얼마 없는 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땅한 새 관직도 내려지지 않은 채 임지로 부임하지도 않고 버티던 이괄에게 왕의 제안은 솔깃했다.
성공하면 정승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풍기군수와 떨거지들은 그야말로 미친 것들이었다.
뒤가 얼마나 구려야 왕이 보낸 사자를 대뜸 죽이려 든단 말인가?
예전부터 모반을 생각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여차하기 무섭게 칼부터 휘둘렀겠지!
“빌어먹을 반역자 새끼들! 찢어 죽여도 성치 않을 것들!”
이괄은 주먹을 휘두르며 격분했다.
이 손에 이잠의 머리통이 있었다면 꽉 쥐어 터뜨렸으리라!
“진정하시지요, 영감. 경상 감사가 모조리 잡아다가 가두었으니 죄인들이 중벌을 면치는 못할 것입니다.”
“네가 뭘 알아!”
이괄이 빽 소리치자 수행원은 입을 꾹 닫았다.
‘미친놈.’
내막을 모르는 수행원으로서는 이놈이 왜 위안해 줘도 지랄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말을 타고 나아간 끝에 이괄과 수행원들은 마침내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한양, 숭례문崇禮門.
수행원들은 오는 동안 혼자 지랄이었던 이괄을 상대하느라 무척 피곤했던지라 해산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관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수행원들은 짧은 인사와 함께 도망치듯 해산했고, 홀로 덩그러니 남은 이괄은 뒤통수를 긁어대며 숭례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이괄이 마지못해 입성하자 그를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수염 없는 자였다.
그의 말에 이괄은 일순 풍기군수가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전이 떠올랐다.
그때 풍기군수도 먼 길이 어쩌고 고생 어쩌고 하였지.
하지만 워낙 의례적인 표현인지라, 이괄은 뒷맛 구린 기분을 밀어내고는 내시를 맞이했다.
“내가 오는 건 어떻게 알고 계셨소?”
“언제 오실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남대문으로 나가 경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요.”
왕이 자신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건가.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그 의도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일지언정, 내세울 것이 없어진 마당에 위로란 자존심만 상할 뿐이니까.
“따라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내시를 쫓았다.
그리고 궐로 가는 동안 후회했다.
감사에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역적의 수급을 베어 왔어야 했거늘!
하지만, 경운궁에 도착해서 후회해 봐야 소용은 없었다.
이괄은 시위에게 자신의 환도를 건넨 뒤 터덜터덜 왕이 기다리는 침소로 향했다.
“들라 하시게.”
드르르……
“강녕하셨사옵니까?”
이괄의 인사에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풍기에서 고생을 꽤 했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군수의 초청을 받아 소수서원에서 자리를 가졌는데, 조사에 협조를 청하였더니 대뜸 아전들과 함께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사정을 설명한다는 것이 어째 변명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괄은 그칠 수 없었다.
왕이 일이 꼬이게 된 경위를 안다면 이해하고서 기회를 다시 줄 수 있으니까.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세요. 나는 어디 안 갑니다.”
이괄은 왕이 건넨 과자를 해치우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리에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아, 역적들에게 둘러싸였는데 기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탈출하였습니다.”
변명이 이어지자 감정이 올라왔다.
아니, 그러게 왜 자신을 암행어사 따위로 임명했다는 말인가?
현지의 감사나 병사로 제수했다면 일 처리가 훨씬 쉬웠을 텐데!
덕분에 부하들도 몇 없이 험지를 돌아다니다가 이 꼴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신에게 설욕할 기회를 주십시오! 풍기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 급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사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암행어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왕은 손바닥을 내보이고서 조곤조곤 말했다.
“많이 흥분하셨어요.”
“……송구하옵니다.”
이괄은 어렵사리 숨을 가라앉히고서 반쯤 들떴던 엉덩이를 내렸다.
“이렇게까지 피로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은 쉬어두시고, 내일 아침에 정신이 말끔하실 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예.”
이괄은 사양하지 않았다.
오는 동안 지친 건 사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