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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8화 (38/380)

인조, 명군이 되다 38화

삼국지 원작의 드라마가 생각나네.

거기에서도 조조가 순욱에게 빈 도시락을 보내 자결을 유도하고는 상갓집을 찾아가지.

조조의 뻔뻔한 인간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가 그 조조가 될 줄은 몰랐지.

‘이래서 어르신들이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셨던 거군.’

상갓집 문턱을 넘어서니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삼켰다.

왕이 신하의 장례에 참여하는 건 흔치 않은 일. 품계에 따라 형식적으로 부의賻儀를 내리는 게 보통이다.

흔치 않은 광경에 식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달라지자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 있던 상주가 고개 돌렸다.

“……전하?”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이다.

원래 이괄을 죽음으로 모는 건 그의 역할이었는데, 내가 선수를 치고서 마주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어쩌다 보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상황.

이전은 앉은 채로 왕을 맞이할 수는 없다는 듯 곧장 멍석을 짚고 일어났다.

“이런 곳까지는 어인 일로…….”

사포로 목구멍을 몇 번 후벼낸 듯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곡한 걸까?

신하 대부분이 간밤에 벌어진 일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는 두 눈 시뻘건 이전이 다소곳하게 모아놓은 손을 붙잡고서 흠칫하는 이전을 다독였다.

“신하가 나의 일을 맡았다가 유명을 달리하였거늘 어찌 걸음을 아끼겠나.”

이전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말했다.

“망극하옵니다.”

“원망하여도 좋네.”

이전은 놀란 얼굴로 숨을 삼켰다.

“어찌 그러겠사옵니까? 목숨을 다하여서 군주를 모시는 건 신하의 도리이옵니다. 부친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이전의 손을 붙든 채로, 다른 손으로는 움츠러든 어깨를 잡았다.

“과연 자네의 부친께서는 신하 된 도리를 다하였지. 충신을 멀리 떠나보내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아도 되겠나?”

“예.”

이전은 앞장서서 빈소가 마련된 대청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관 앞에 무릎을 꿇고서 관 덮개의 나뭇결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가, 결심한 얼굴로 덮개를 밀어냈다.

고작 어젯밤 보았던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인조 수준으로 진짜 사이코패스여야 가능한 경지고, 나는 그보다 끗발이 달리는지라 고양감만 일었다.

중대한 위험 요소가 제거됐으니까.

‘……흠. 진짜로 인조 다 됐네.’

이괄의 신용은 역사가 증명했고, 여차하면 반역을 일으킬 사람인지라 살려 둘 수가 없었다. 내가 이괄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건,

“경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목숨을 얼마나 유용하게 써주느냐지.

이 정도면 죽은 이괄도 만족할 결과다.

본래 이괄은 역적으로 전락해 효수당하고, 일가는 파탄을 면치 못했으나 나의 세심함으로 오명을 지는 일을 피했으니까.

대신 나는 개혁을 더욱 강경하게 추진할 명분이 생겨서 좋고, 백성들은 내전에 엮이는 일 없이 어제와 같은 오늘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 정도면 스스로 노벨 평화상을 수여해도 되지.

이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이전에게 고개를 끄덕이니, 이전은 조심스럽게 관 덮개를 다시 닫았다.

마당으로 나오니 좌의정 박홍구가 멋쩍은 얼굴로 있었다.

박홍구는 나를 마주하더니 곧장 고개를 숙였는데, 마치 시선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궐을 나서기 전에 내막을 알려주기는 했지.

그것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박홍구가 사건 수사를 맡았으니까.

내막을 알아야 쓸데없이 열의를 보이다 나를 찌르는 일이 없지.

“왜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습니까?”

“아니옵니다.”

“다행입니다.”

이 정도로 나를 냉혈한이라 생각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내가 한 말은 들었겠지요?”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는.

“예.”

“개혁이 어그러진다면 충신의 목숨만 아깝게 되겠지요?”

고작 운만 떼었을 뿐인데 박홍구는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경악하기는 이르지.

“전하, 누가 감히 개혁에 반대하겠사옵니까…….”

박홍구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목숨이 아깝고 가정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절대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괄을 독살한 반개혁파의 허상을 뒤집어쓰고 삼대가 멸족할 수 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수담手談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이 종친이나 대신을 앞세워서 훼방을 놓을 수도 있어요.”

송사리가 이런 상황에서 설쳤다간 바로 어죽이 되겠지만, 거물이 방패가 되어준다면 다르다.

종친이나 대신을 무작정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 거물에 개혁을 원치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여론까지 실린다면, 개혁이 주저앉는 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개혁이라는 게 한 번 엎어지면 다시 추진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못된 것만 배워서 말이지.

“시작했으면 한 번에 끝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박홍구에게 내막을 알려준 또 다른 이유였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면 그 상황에 대응할 방법도 생각해 두어야 하는 법.

“내가 좌상이 해야 할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명하소서.”

“내가 알기로, 충신이 죽기 전에 식사를 같이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어요.”

박홍구는 일순 마당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전이 다시 멍석으로 돌아와 엎드리고 있었다.

“너무한 처사이옵니다.”

“그도 신하의 직무가 무엇인지 안다지 않습니까?”

목숨이 다해도 왕을 보필하는 거라며.

본인도 안다니 문제 될 건 없지.

“누가 되었건, 개혁에 훼방이 될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이전을 가두고 내게 알려주세요.”

박홍구는 이어질 일을 예상하는지 입술을 말았다.

뭐, 뻔하지.

이전이 설령 효자가 아니어도, 억울하게 패륜아의 오명을 쓰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도모하지 않을까?

부친을 독살한 반개혁파의 수괴를 직접 처단함으로써, 패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참작 사유를 인정받아 최악의 경우만은 피하는 거다.

대마불사도 바둑판 위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지.

정치적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면, 물리적으로 해결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반면교사가 되어준다면 또 안일하게 본인 입지와 여론만 믿고서 덤비려는 인간은 없어지겠지.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나는 이 나라에 수백 년 동안 찌든 폐단을 최소한의 목숨만 써서 고치려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게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라니까?

“그리고 괄은, 내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더 살면 역적이 되고 제때 죽으면 충신으로 남을 상이었습니다.”

역사를 아는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하는 말이다.

“……신은 어떤 상이옵니까?”

“잘 아시면서 물어보십니다. 그야, 좌상께서는 왕년에 누린 게 많아 말년에 구를 상이지요.”

박홍구는 본인이 물어보고도 죽상이 되어 늘어졌다.

그래도 지금 팔자가 박홍구에게는 훨씬 낫지.

원래 역사에서 박홍구는 이괄의 난이 터지니까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고 처형되어 버리거든.

* * *

‘독하구나, 독해!’

박홍구는 감탄했다.

왕이 짓궂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박홍구는 상갓집을 나서는 왕을 수행하지 않았다.

원치 않게 알아버린 사정이 많아,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박홍구는 주변을 둘러본 뒤 적당히 빈자리를 차지했다.

평판이 안 좋아도 일단은 좌의정.

그의 합석에 주변 사람들이 인사했으나, 지친 박홍구는 어울리지 못했고 이내 상념으로 빠져들었다.

‘왕년에…… 많이 누리기는 했지.’

집권당인 대북의 원로로서 순탄하게 높은 자리를 거쳐왔으니까.

왕이 말이 옳았다.

특혜를 누리지 못하여 어중간한 위치만을 전전해 왔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테고, 환국 후 모두의 적이 되는 일도 없었을 터이며, 그래서 왕의 지시를 얌전히 따라야만 하는 처지가 되지도 않았겠지.

이것이 응보인가?

내가 잘나간 게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기에는, 원로이자 의정이 되어서도 폭주하는 군주를 바로잡지 못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일어난 환국이니, 고생하는 건 당연한 대가겠지.

‘그렇게 생각해 두는 편이 마음은 편하겠지.’

생각이 달라진다고 처지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박홍구는 멍석에 엎드린 이전을 바라보았다.

짧지 않은 세월, 갖은 일을 겪으며 어지간한 일에는 내성이 생겼다고 자신해 왔다.

그러나 왕이 이번에 꾸민 일은 놀랍다.

지난 왕은 서자에 장남조차 아니어서 제왕학을 익힐 기회가 없었으나 그보다 더 확실한 교훈을 익혔다.

목숨을 걸고 난세의 전장을 전전하였고, 전쟁 후 혼란해진 정국을 세자로서 거쳐왔으니까.

글자만으로는 익힐 수 없는 것도 있는 법.

어려운 시기였기에 많은 사람이 현실로 벼려진 세자의 등극을 고대했고 또 기대해 왔다.

하지만 세자의 즉위 후 벌어진 일들은 어땠던가?

그래서 박홍구는 더더욱 감탄했다.

금상은 폐주가 가지지 못했던 기회도, 폐주가 가졌던 기회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즉위하고서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벌써 나라를 조종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정상적으로 즉위한 것도 아니고 찬탈이거늘.’

원래 왕으로서 준비된 사람이었나, 아니면 왕이 되기로 준비해온 사람이었나?

박홍구는 금상의 정체는 더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어느 쪽이건, 얌전히 따라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으므로.

* * *

나는 세자를 위해 지켜낸 궁궐에 방문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하늘은 높아지고 순백의 구름이 떠다니는데, 지붕을 청기와로 도배한 인경궁의 전각들이 잘 어울렸다.

세자가 이런 곳에서 산다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

“아바마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자 생각을 하자 정말로 세자가 나타났다.

“그새 훤칠해졌구나.”

용포를 걸친 채 궁인들을 대동한 모습을 보니 언제까지고 철부지 같았을 세자가 진짜 세자처럼 느껴졌다.

예전처럼 아버지, 하고 불러주지 않는 건 아쉽다.

너무 성장해 버렸어…….

“강녕하셨사옵니까?”

세자는 이런 아비의 마음도 몰라주고서 해맑게 웃었다.

“덕분에 강녕하구나. 세자는 강녕하고?”

“예!”

힘차게 답하는 걸 보니 동심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 고생길이 구만 리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지치면 안 되지.

아버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왕이 되어야 하니까.

그런 세자가 걱정되어서 평소처럼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손가락을 말았다.

“……?”

오전에 시신을 만지고 와서 말이지.

딱히 문제 될 건 없다만, 내가 꺼림칙했다.

“아니다. 네 어머니는 잘 지내시더냐?”

세자는 대답하는 대신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잘 지내시지 않나 보네.

남편이 멀쩡히 있는데도 청상과부 신세가 되었으니 유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자나 봉림대군을 아들로 대하는 것과 오리지널 인조와 백년가약을 맺은 중궁을 부인으로 대하는 건 느낌이 다르다.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리고…….

기분 이상하고…….

슈X맨에게 크X토나이트가 있다면 내게는 중궁이 있다.

“세자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날 선 목소리와 함께 중궁이 나타났다.

왜 생각만 하면 다 나타나지? 누가 내 머릿속 생각을 읽기라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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