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9화
“세자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까?”
“…….”
“직접 찾아오셔서 물어보면 확실해질 것을, 어찌 세자에게 물어보십니까.”
역시 중궁은 인간 크X토나이트야.
근처에만 있는데도 숨쉬기가 힘들어지잖아?
밖에서도 이 지경인데 한 지붕 아래로 들어가면 오장육부를 쏟아내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말하는 법을 잊으셨습니까?”
“음, 어…….”
“세자에게는 멀쩡하게 말씀하시던데 이상하군요.”
슬쩍 세자를 보니, 급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금쪽같은 세자가 쩔쩔매는 걸 보니 입이 열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신의 기적처럼 벙어리의 입이 열리니 중궁의 입꼬리가 동시에 올라갔다.
“말하는 법을 다시 깨치셨습니까?”
“네.”
“어째서 저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예 궁궐에서 쫓아내어 이곳으로 보내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쫓아내다니요!”
아들이 보고 있는데 큰일 날 소리를!
“폐주가 자기 모가지 걸고 세워놓은 인경궁이 낡아빠진 정릉동 행궁보다야 백 배는 살기 좋은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누가 오해하겠습니다!”
“안채가 사랑채 뒤에 자리한 이유는 부인이 지아비를 받쳐주기 위함인데, 전하께서는 부인을 담벼락 밖으로 몰아냈으니 쫓아낸 게 맞지요.”
“오해입니다, 오해에요. 제가 인경궁이 싫어서 옆집 아주머니와 경운궁을 지키는 게 아니잖습니까?”
광해군의 민생 파탄을 규탄하며 반정을 일으켰으니까, 광해군이 지어놓은 궁궐들은 내게 금지禁地나 마찬가지다.
“서궐西闕을 철거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만 해도 부담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온 가족이 옹기종기 경운궁에서 산다는 쉬운 길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서궐西闕을 해체하여 동궐東闕 재건하거나.
물론, 궁궐을 철거하건 해체하건 그걸 실현하는 건 징발된 백성들이 되겠지. 세자와 중궁을 서궐로 보낸 건 내가 어느 쪽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박아 둔 채 치욕과 불편을 조금만 감수하면, 멀쩡한 궁궐을 훼철하지 않아도 된다.
“사정을 아시는 분께서 이렇게 핍박하시니 참으로 처량합니다.”
뚫린 게 입인지라 실컷 변명하니 중궁이 미소 지었다.
눈은 싸늘한 채로.
“전하를 이 나라의 왕으로 만든 건 제가 아닙니다. 일을 벌이셨으면 책임지는 건 당연하고, 그 때문에 다른 것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었다면 전하의 부덕이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틀린 말씀이십니다!”
나를 왕으로 만들어준 건 지옥에서 이혼대법을 익힌 인조의 환생이라고.
“예?”
그런데 중궁의 반응이 싸늘하다.
감히 내 말에 반기를 드냐는 듯이…….
억울했다.
그렇다고 천기누설 할 수도 없고, 설령 천기를 누설하더라도 분위기를 봐서는 개소리하지 말라며 머리채만 붙잡힐 것 같았다.
도저히 세자에게 보여줄 만한 광경은 아니지.
“일개 도적에 불과했던 주원장이 황위에 오른 게 본인의 공로뿐이겠습니까? 마황후의 내조가 과반이었지요. 당연히 중궁께서도 나를 왕으로 만든 책임이 있습니다.”
내조를 너무 잘 해주어서, 중궁이 없었다면 왕이 되지도 못했을 거란 소리였다.
내가 전생에서도 아부는 안 하는 사람이었는데, 부인 아닌 부인에게 이렇게까지 아부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아버지란 본디 밖에서는 양보하지 않고 안에서는 양보하는 존재. 아들의 건전한 성장 환경 수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구나.
‘오늘따라 아버지가 참 뵙고 싶구나.’
웃지 마라, 세자야.
네 차례도 멀지 않았어.
“…….”
한데 웃지 말아야 할 사람은 웃고, 웃어야 할 사람은 웃지 않는다.
와…….
이제 어쩌냐?
이런 게 안 먹히는 사람이었나.
머리채 잡힐 준비를 하고서 모근에 힘을 주고 있는데, 중궁이 문득 입을 가렸다.
“……?”
뭔가 싶어 쳐다보는데 중궁은 소매를 들어 얼굴을 다 가리더니, 이내 헛기침과 함께 다시 팔을 내렸다.
얼굴은 여전히 냉담한 채.
“흠, 흠.”
중궁은 헛기침을 남기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식 앞에서 매 맞는 남편 신세는 안 되려고 난생 최고로 비굴해졌는데, 아예 무시라니.
세자는 여전히 웃고 있다.
내가 안 좋은 소리는 어지간해서는 지양해 왔는데, 아버지의 못난 모습을 비웃는 건 예절 교육을 위해서라도 가만둘 수 없지.
“세자야…….”
“예, 아바마마.”
“너는 아바마마 소리 안 들을 것 같으냐?”
한 소리 해주니 세자는 손을 들어 웃음을 가렸다. 그러고는 고개만 살짝 치켜든 채로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웃으셨습니다, 아바마마.”
“어?”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고는, 표정을 숨기시고서 소매를 내리신 것입니다.”
세자는 정색하고서 소매를 내렸다.
충실한 재현이로군.
“……네 어머니가 만족했다면 됐다.”
당분간은, 불시에 상투가 뜯겨 나가는 일이 없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공에 준 힘을 풀었다.
그나저나 세자의 반응 속도가 놀라웠다.
중궁의 귀신 같은 등장과 태도를 보아서, 내가 인정전에 나타날 순간만을 벼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중궁보다 세자가 먼저 나타났잖아?
이건 세자가 인경궁을 장악했다는 증거로 봐야겠지?
‘내가 없는 곳에서는 세자가 왕이긴 한데…….’
그 왕 노릇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는 건 아니더라고.
세자가 직접 궁인들을 포섭했건, 모범을 보여 자발적인 충성을 끌어냈건 이 정도면 정말로 만족스럽다.
될성부른 싹이라는 건 세자를 두고서 하는 말이겠지.
이 아비는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유일하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세자가 책임감도 부담감도 크다는 거다.
책봉식을 앞두었을 때는 거의 토끼 눈이 되어버렸지.
막상 책봉식을 치르고 나니 순식간에 성숙해졌다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때의 세자가 선했다.
나 없이 광대한 서궐西闕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도 부담스러워했는데, 어쩌다 그 이야기도 다시 나온 참이라 걱정이 들었다.
세자는 작고 소중해…….
내가 지켜줘야 해…….
“신하들이 너무 공부만 시키지는 않고?”
“염려치 마소서. 소자는 공부가 즐겁습니다.”
청각의 상태가 의심스러워지는 대답이었다.
공부가 즐겁다니!
세자는 어느 집에 났어도 사랑받았을 거야. 콩깍지 단단하게 씐 내가 보장한다. 이런 자식을 박대한다는 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 사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공부가 즐겁다니 기쁘면서도 염려되는구나. 왕이 되면 원하여도 매양 밖으로 나오기 힘드니 지금 마음껏 볕을 즐겨두어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말뿐이 아니라면 이 아비와 말벗 정도는 해주겠지? 서궐을 더 돌아보고 갈 참이다.”
공부가 즐겁다는 아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딱 좋은 날씨다.
외유하는 법을 익혀두어야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세종대왕처럼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지.
“집주인아. 안내하여라.”
허리를 세우고 짐짓 호령하듯이 이르니 세자가 빙긋 웃었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아바마마.”
* * *
종친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최고의 대우와 존중을 받는다.
특별한 노력도 없이 타고난 환경만으로 갖은 특혜를 누리니 이를 부당하게 여기고 질시하는 사람도 무수하고, 반대로 선망하고 경외하는 자들도 많다.
왕 그 자체만으로도 범인凡人과는 별개의 존재로 여겨지는 시대에서는 곁가지에 불과한 종친조차 특별하게 여겨졌으니까.
기실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자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은 절대 닿을 수 없는 특별한 위치를 향한 열등감도 없잖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종친도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설 때가 있다.
나라가 평온하지 못하여 정치적인 혼란이 횡행할 때.
왕을 제외한 모두의 위에 서는 입지를 가졌으나 그것을 직접 쟁취해 낸 것이 아닌 종친들은 떠받들어진 그대로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는 했다.
하물며 종친이 정치적인 사건과 엮인 이력이 있으면 더욱 위기에 얽매이기 쉽고, 세태의 변화로 과거의 행보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면 더욱 그랬다.
이번에 폐주의 난정亂政 끝에 터진 환국은 금상의 세심한 통제로 비교적 원만히 수습됐다.
죽을 사람들은 서둘러 보내 버리고 애매한 위치에 선 자들에게는 묵과에 가까운 관대한 처분을 내림으로써, 혼란을 가중하는 일 없이 빠르게 후폭풍을 잠재운 것이다.
그러나, 환국이란 땅과 하늘이 뒤바뀌는 일.
아무리 잘 수습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비교적일 뿐 여진餘震이 전무할 수는 없다. 환국으로 한때 조선에서 군림했던 자들은 시체가 되었거나,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었으며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오욕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처분은 종친일지라도 면할 수 없었다.
아니, 종친이기에 더더욱 면할 수 없었다. 폐주의 최대 악행이자 환국의 명분이 된 폐모론廢母論에 깊건 얕건 발을 담그지 않은 종친이 없는 탓이다.
머리는 다 잘려 나가고 잔당만 남은 북인 떨거지들은 진즉 안도한 반면에, 종친들은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여기에 이 난리까지 벌어지다니…….’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은 가시방석의 가시가 더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공은 폐주 때 능창군綾昌君의 역모 혐의에 엮여 거의 죽을 뻔했던지라 더더욱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찬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환국이 일어나면서 능창군의 형제는 왕이 되어버렸고, 폐모론은 천하의 악행으로 전락하였으니 이 정도로 지랄맞게 꼬인 팔자도 없었다.
이런 사정에 비하면 여느 종친들의 속앓이야 새 발의 피.
그런데 여기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이요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만행이 벌어졌으니, 바로 박성장朴成章이 쳐들어온 것이다.
본래 인성군은 서릿발 같은 추위가 가실 때까지 칭병稱病하고서 대문을 걸어 잠근 채 버틸 생각이었으나 박성장이 대문을 쾅쾅 두들기며 군호를 쩌렁쩌렁 불러대니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인성군은 박성장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서 일부러 그런 것인지 단순히 무식해서 무시한 짓거리를 저질렀을 뿐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확신했다.
이놈이 자신을 엿 먹이려 들 계책만은 분명히 있는 모양이다, 하고.
인성군은 감싸 쥔 얼굴을 슬쩍 들어 맞은편에 앉은 박성장의 낯짝을 보았다.
꼴에 진지한 얼굴로 발언의 허락을 기다리는 모습이 참으로 가소로웠다.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건, 다 같이 뒤져보자는 결말로 귀결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저 면상을 벼루로 찍어버린 다음 왕에게 알려야 하나?’
인성군은 얼핏 든 충동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심증은 가득하여도 증거 하나 없이 무작정 손님의 면상을 박살 낼 수는 없는 노릇.
‘끄어어어어어……!’
인성군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진정과 각오를 다지고서 입을 열었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내게는 어인 일인가?”
의도치 않았는데도 무척이나 지친 목소리가 나왔다.
“대감.”
“……귀 안 먹었네.”
“근자에 들어 여론이 심상치 않아졌다는 건 대감께서도 아시겠지요?”
“나는 모르지.”
“온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종친이라면 몰라도 되네. 모르는 게 맞고. 나는 사복시정이 여기에 있는 것부터가 편치가 않은 사람이야.”
“폐모론에 찬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성군이 겉도는 헛소리에 노골적으로 불편을 드러내자 똑같이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박성장이었다.
‘역시 이놈은 나를 엿 먹이러 왔구나.’
인성군은 질끈 눈을 감았다.
“대감의 위신을 회복할 방법이 있습니다.”
“…….”
“뭇 사대부들이 입을 모아 우려하는데도 전하께서는 기어코 끝장을 보고자 하시는데, 때마침 흉흉한 일까지 있어서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
“이럴 때 대감께서 나아가 진언하시면 전하께서도 가까운 사람이 하는 말이니 경청하시고 조금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않겠습니까?”
“…….”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위신을 되찾을 방법은 아니었다.
설령 여론을 등에 업고서 금상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과연 왕이 자신을 살려 두고 싶을까?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는 역사가 비수처럼 박혀 있다.
적당한 때를 보아서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
‘고작 한순간 유세 부리겠다고 목숨을 내걸어?’
미친 짓이다.
인성군은 한숨을 삼키면서 박성장을 마주 보았다.
과연 좌의정은 조카가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