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0화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박성장이 채근하자 인성군 이공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불청객을 당장에라도 쫓아내고 싶었지만, 주변에 우군도 없이 적부터 만들었다간 먼저 공격당할 수 있었다.
적당히 구슬려 시간을 버는 수밖에.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충분히 고민해 봐야지.”
“대감, 이건 시간을 끌어도 되는 사안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새로 작성된 군적이 올라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군적에 실린 적나라한 현황은 왕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겠지.
선혜법 확대를 위해 양전과 함께 대대적인 감사가 이뤄졌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군적의 갱신까지 더해지면 수령들은 배를 불리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수령 및 그들과 결탁한 자들의 사정.
인성군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저들의 더럽고 추잡한 이익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사복시정은 내가 충동적으로 협조해 주기를 바라나? 다음에는 충동적으로 마음을 되돌릴지도 모르는데?”
“충동이 아닙니다. 계산이지요.”
박성장은 자신 옆에 놓아두었던 보따리를 서안에 올렸다.
쿵
그 소리가 과히 묵직해서, 인성군도 흠칫할 정도였다.
박성장은 그런 인성군의 반응을 원했다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비단 천이 흘러내리며 옻칠한 목함이 나타났고, 간단한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여니 안에서 금속성 광채가 흘러나왔다.
“…….”
박성장은 인성군의 시선이 내용물을 향한 것을 보고서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 제가 대감께 대가 없이 보내는 선물입니다. 만약,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다음번에는 은 대신 금으로 상자를 채워서 바치겠습니다.”
“매수하겠다는 건가?”
인성군이 고개를 들었다.
“이만큼 제가 절박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준비라도 했는지 변명은 청산유수였다.
“가지고 돌아가게.”
인성군은 상자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매수와 음모의 증거였지만, 그래서 더욱 집에 둘 수 없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그저 대감께 이유 없이 드리는 선물일 뿐입니다. 부디, 좋은 곳에 써주십시오.”
박성장은 인성군이 밀어낸 상자를 다시 밀어내고는 절대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는 듯 일어섰다.
돌아가기를 바랄 때는 그토록 무거웠던 엉덩이가 짐을 떠넘기기 무섭게 가벼워진 것이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박성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사랑채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인성군은, 상자에 켜켜이 쌓인 은자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달그락.
인성군의 손에 들어온 은자는 꽤 적당한 크기에 광채마저 심상치 않았다.
대강 순도를 짐작하면, 처음부터 거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매수를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매수만을 위한 은자가 통용될 정도로 썩어 있다는 거겠군.’
그리고 환국으로 인해 대북 수괴들이 숙청당하면서 본디 그들이 받아먹었을 은자가 자신에게로 온 거겠지.
이유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외관들의 부정한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던 내막이었다.
인성군은 은자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 * *
저택을 나선 인성군은 일단 종로로 향했다가, 오가는 인파에 몸을 실었다가 좌의정의 거처로 향했다.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굳이 거치고도 궁궐로 향하지 않은 건 박성장의 패거리가 자신의 뒤와 궁궐 주변에 있을 게 뻔한 탓이었다.
더군다나 박성장은 좌의정 박홍구의 조카.
무작정 찔렀다간 일이 대책 없이 커질 수 있으므로, 박씨 집안의 어른이자 조정의 대신인 좌의정에게 먼저 도움을 청하는 게 옳았다.
‘제기랄. 팔자가 꼬이니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되는구나!’
인성군은 대문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속으로 탄식했다.
폐주 때 능창군의 역모와 얽힌 뒤로 정치라면 질색이고 팔색이었다.
한데 그날부터 뭐가 단단히 잘못 씌었던지 다음에는 폐모론에 발을 담가야 했고, 이제는 구더기 같은 종자들이 자신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드는 판이었다.
“뉘시…… 옵니까?”
“좌의정 대감은 안에 계시느냐.”
“예, 하온데…….”
인성군을 알아보지 못한 노복이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인성군은 고작 좌의정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찾아온 게 아니었던지라 노복을 상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직접 소개하는 건 품위에 걸맞지 않았지만,
“인성군이다.”
“……!”
노복은 인성군의 얼굴은 몰랐어도 존재는 모르지 않았다는 듯, 황급히 물러나 허리 숙였다.
“모, 몰라뵈었습니다. 곧바로 좌의정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되었다. 비켜라.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
“예, 예…….”
집주인이 안에 있다니, 인성군이 알아야 했던 건 그뿐이었다.
그가 마당을 처벅처벅 가로질러 사랑채 앞에 서자 창호문 너머에서 말했다.
“누가 찾아왔느냐?”
“이 사람입니다, 좌의정 대감.”
인성군은 이만하면 소개로는 충분하다는 듯 마루에 올라섰고, 안에서는 소란이 일더니 곧장 문이 열렸다.
“인성군 대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왕자군과 정일품 대신이 마주했다.
좌의정 박홍구는 놀란 얼굴을 한 채로 문간에서 물러났으며, 인성군은 긴말하지 않고 문지방부터 넘어섰다.
턱!
메마른 소리와 함께 창호문이 닫히면서 실내가 살짝 어두워졌다.
인성군은 왕자로 왕이나 중궁처럼 품계를 초월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병풍을 등지는 상석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군림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거니와 인성군은 박홍구에게 비보를 가져왔으며, 그럼에도 협조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기색을 쉽사리 읽어낸 박홍구도 새삼스럽게 권하는 일 없이 막 앉아 있었던 방석을 다시 차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인성군은 자신이 가져온 은자를 달그락, 서안에 내려놓았고 그것을 본 박홍구는 입술을 말았다.
박홍구 역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폐주 때부터 의정을 지내왔으니 지극히 당연했다.
한데 환국 후로 보이지 않았던 물건이 어째서 인성군의 손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작금에 조정을 쥐고 흔들어대는 화제를 생각해 보면 사정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어코 왕이 우려한 일이 실현된 것이다.
‘……인성군이 무모한 사람은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박홍구는 왕의 안배를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의 시행을 준비하는 위치에도 있었다.
눈앞의 사람이 어쩌면 눈먼 칼에 맞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박홍구는 메마른 피부에도 닭살이 올랐다.
다만 박홍구는 이 의문에는 답할 수 없었는데, 어째서 인성군이 은자를 들고서 자신을 찾아왔냐는 것이었다.
그 의문을 구하고자 박홍구가 시선을 드는 순간 인성군이 말했다.
“사복시정이 찾아왔소이다.”
“……사복시정이요?”
박홍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때 자신이 그러했듯 칼끝에 선 심정일 인성군이 이상한 협잡질을 할 리도 만무했거니와 조카의 인품은 박홍구도 잘 알고 있었다.
폐주 때는 실권자들보다 그 곁가지들이 과분한 분수를 누렸다.
어디서 기어왔는지 모를 땡중에 점쟁이들, 자격도 인격도 미달인 문중의 찌꺼기들.
그중에서 사복시정은 후자에 속했다.
멍청한데 탐욕스럽고 음탕하기까지 했으니까. 외관이 아니면서도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하는 건 그 때문이리라. 포섭이 어렵지 않았을 터이니.
‘환국 후 얌전해져서 눈치나 보는 줄 알았더니……!’
천지 분간도 못 하고 집안 말아먹을 짓을 도모하고 있었을 줄이야!
천하를 농간하던 대북 영수들이 일시에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도 일말의 교훈조차 얻지 못했단 말인가?
박홍구는 눈치 없는 제 조카가 보낸 물건답게 눈치 없이 반짝이는 은자를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서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백안시하고 있다.
조카가 이딴 식으로 굴었다는 게 드러나면 자신까지 덤터기를 쓰겠지.
기축옥사 때 우의정을 지냈던 정언신鄭彦信은 9촌 친척이었던 정여립의 모반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 왕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학살을 벌일 인물은 아니었으나, 대신 사복시정 박성장은 자신과 족보상으로 가까운 인물이며 기축옥사는 기획된 숙청이나 박성장이 벌인 일은 빼도 박도 못 하게 불궤였다.
환국 후의 숙청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을 서인 강경파들은 이때다 하고 기축옥사를 재현하려 들겠지.
이건 절대로 키워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박홍구는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조카가 대감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박홍구는 깊게 허리를 숙이고서 덧붙였다.
“조카의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박홍구의 확언에도 인성군은 굳은 얼굴로 달그락, 달그락, 서안 위에서 은자를 굴려댔다.
그러기를 한참.
인성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 사정은 좌상 대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에……. 그래서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곧장 전하께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이 일이 커지면 좌의정께서도 곤란해지실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달그락…….
인성군은 은자 굴리기를 멈추고서 정중하게 말했다.
“잘 좀 해주세요.”
박홍구는 그저 고개 숙인 채 끄덕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예. 염려치 마십시오. 뒤탈이 없도록 잘 정리하겠습니다.”
나눠야 할 말은 다 나눴고, 달리 대담을 이어갈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인성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홍구도 곧장 일어나 마다하는 인성군을 골목까지 배웅한 뒤, 입술을 씹은 채로 돌아왔다.
서안에는 박성장의 손에서 나온 은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익!”
우당탕탕!
* * *
박성장은 자신의 방에 대大자로 드러누운 채, 움켜쥔 금관자金貫子를 바라보았다.
얼핏 동전 같은 형상에 한가운데 구멍 뚫린 이것은 망건網巾의 끈을 고정하는 부품이었다.
박성장은 오래도록 금관자를 염원하였으나, 그동안은 인연이 없었다.
관자는 관리의 품계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정해져 있는데 금관자는 이품의 관리만 착용할 수 있는 탓이다.
사복시정은 정삼품.
낮다고는 못할 위치였으나 금관자를 찰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금관자가 한 쌍도 아니고 무려 한 주머니나 생겼다.
고작 심부름 하나 한 것으로.
박성장은 한쪽 눈을 감은 채 관자 한가운데 뚫린 작은 구멍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좁은 홈 너머로는 부옇게만 보일 뿐이었으나, 그 주변이 온통 금색으로 반짝이므로 박성장은 뿌듯할 뿐이었다.
“……흐흐흐흐! 으흐흐!”
만족감에 그저 실소하던 박성장은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창 좋을 때 훼방이라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박성장은 다시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
집에 없는 척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과연, 조용히 버티고 있으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하기야 금 한 보따리 앞에서 무엇이 중요할까.
벌컥!
“……형님?”
대뜸 방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박유장朴有章. 좌의정을 지내는 친척 박홍구의 장남이었다.
이 인간이 왜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그것도 말도 없이?
박성장은 서안에 놓인 금관자 주머니를 보았다가 입구가 벌어져 있지 않은 걸 보고 안도했다.
박유장이 어디서 났냐고 추궁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박유장이 묵과하는 대가로 자신의 몫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박성장은 손에 쥔 금관자도 보이지 않도록 잘 움켜쥐고서 물었다.
“갑자기 어인 일이십니까?”
“……따라와라.”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필 한창 즐거울 때 훼방이라니.
어지간한 불청객이었다면 쫓아냈겠지만, 박유장은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성장은 얼굴에서부터 나오는 싫증만은 차마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말했다.
“차려입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에 쥔 금관자와 서안의 주머니를 숨길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박유장은 문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하고 중요해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못살게 군다는 말인가?
박성장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