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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41화 (41/380)

인조, 명군이 되다 41화

한양 서쪽에 자리 잡은 인왕산은 풍류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자주 찾기로 유명했다.

인왕산의 기암괴석들을 끼고서 한양을 내려다보는 경관은 독보적이니까.

그러나, 이따금 풍류와는 별개의 목적으로 인왕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떠한 문제들은 해결보다 장소의 선정이 중요한 법.

민가 사이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은 자들에게 산기슭은 실로 적절한 대안이었다.

“아는 게 없다?”

인왕산에서 아주 깊고 으슥한 곳.

사나운 인상의 사내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에게 둘러싸인 선비는 죽상을 한 채 의문을 드러냈다.

“왜, 왜들 이러십니까…….”

그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사내 중 하나가 코웃음 쳤다.

엄밀히 따져보면 피해자는 사내들이었다. 문중의 한 머저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목숨이 위태해진 것이다.

박유장은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잔뜩 움츠러든 박성장의 턱을 움켜쥐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런 관대한 제안을 했는데, 조금도 의심을 안 해봤다는 말이냐?”

박성장은 시선을 깔며 고개를 숙였다.

박유장이 생각해도, 이런 머저리를 포섭하기 위해 신분을 노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한 가치가 없었으니까.

매수에는 썩어나는 재화만으로도 족했겠지.

“설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보, 본다면 바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자네 친구는, 자네와는 다르게 아직도 한양을 돌아다닐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까.”

신분을 숨겼다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라는 뜻이다.

패거리는 한양에 남아서 동향을 살펴보겠지만, 얼굴을 드러낸 자는 진즉 몸을 뺐겠지.

“나는 얼굴의 특징을 말하는 거야. 그걸 알아야 수소문이라도 해볼 게 아닌가?”

“…….”

“박성장이.”

“……예.”

“자네 친구의 얼굴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나? 커다란 점이나 사마귀, 흉터나 얼룩. 그런 것들 말이야.”

박성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부터 통교하던 사이가 아니라 기생집에서 우연히 한 번 어울렸을 뿐이며, 그때 박성장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나마 상대방의 얼굴에 눈에 띄는 특징이라도 있었다면 어렴풋이나마 떠올랐겠지.

하지만, 그런 인상조차 없는 걸 보아 상대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했으리라.

“몰라?”

박유장의 은근한 물음에 박성장이 입을 열었다.

“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에…… 한 이쯤…….”

박성장은 한껏 움츠러든 채 자신의 볼을 찍었다.

물론, 박유장은 그것이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함을 바로 알아챘다.

퍽!

“꺽!”

“네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었구나.”

박유장은 내심 감탄했다.

조용히 썩어만 있던 작자들이, 이익을 침해당하기 무섭게 이런 짓을 꾸몄으니까.

박유장은 뒤를 돌아보고서 말했다.

“아버지.”

좌의정 박홍구는 조금의 단서라도 얻기를 바랐으나, 조카는 생각보다도 훨씬 한심했다.

그래도 같은 집안사람이라고, 살려둘 이유가 있다면 마지못해서라도 목숨은 붙여둘까 하였으나 이래서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보내자.”

박홍구가 탄식하듯 내뱉자 박성장은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서 물었다.

“예? 어디로 보내신다는 말입니까?!”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박유장은 허리춤으로 손으로 가져갔다. 그곳에는 그간 차고만 있었던 환도가 있었다.

“……!”

찰나에 칼끝이 박성장의 목을 그었다. 박성장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는 흘러내렸다.

한 보따리 금을 꿍쳐두어도 목숨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대가로, 박성장은 주저앉은 채 천천히 식어갔다.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다. 보이지 않게 처리하자.”

박홍구가 혀를 차고서 일렀고, 박유장이 끄덕였다.

“소자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래라.”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외관들이 어떻게 나설까요. 다른 머저리를 사주해서 똑같은 일을 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유장은 지극히 못마땅해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했다.

문중이 화를 입는 일은 면했으니까.

개혁도, 반개혁도 이제는 남의 일이었다.

“인성군 대감이 우리의 사정을 살펴주었으니, 대감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설 수밖에 없다.”

“……다른 집안이 연루되면 이런 수는 쓰기 어렵습니다.”

“어찌 죽이는 것만이 방법이겠느냐?”

남의 일이라는 박유장의 생각도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박홍구의 집안이야 몰락한 대북의 잔당으로 약점이 많았고, 그래서 극단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이 다르면 대응 방식도 달라지겠지.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인성군에게 갚아야 할 빚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남의 집안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네가 뒷정리하는 동안 나는 전하께 보고해 두마.”

“전하께요?”

박홍구는 반개한 눈으로 장남을 마주했다.

“……아닙니다.”

“금상께서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무서운 분이시다. 하물며 아무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사복시정이 사라졌는데, 전하께서 모르시겠느냐?”

“송구합니다.”

“뒤탈 나지 않도록 잘 처리해라. 먼저 내려가마.”

“예.”

* * *

경운궁 즉조당.

부르지 않았는데도 좌의정이 찾아오길래, 그새 이전李栴을 가둬놓은 줄로 알았다.

그 이외에는 좌의정이 딱히 찾아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좌의정이 내게 알린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좌의정께서도 한 성격 하십니다.”

좌의정이 아들들과 공모하여 사복시정을 지내던 조카를 살해했다.

참으로 극단적인 사건인데,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 말도 없이 사복시정을 죽인 건 너무했습니다.”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의미는 없는 말이었다.

나 역시, 이 일이 비화하면 잃을 게 많았으니까.

한창 추진하는 일들이 지체되는 건 둘째치고 개혁을 원치 않는 자들이 신나서 활개 칠 게 뻔했으니까.

전생에서는 연예계에 이슈가 발생하면 정치적인 논란을 덮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갖은 호들갑으로 관리와 식자들의 관심사를 개혁에서 떨어뜨리려 들 거다.

그러면 내가 곤란하지.

“내가 좌의정의 사정은 다 아는데, 어떻게 본인이 청한다 한들 벌을 내리겠습니까?”

“망극하옵나이다.”

그렇다고 약점을 안 잡겠다는 뜻은 아니고.

“이 일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

박홍구는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다.

왜?

겁이 났다는 건 알겠지만, 내가 어쩌지도 못하게 미리 손 써놓고 나중에 보고하는 건 괘씸한 게 맞지.

“내가 설마 좌상에게 목숨이라도 걸라고 하겠습니까?”

“…….”

박홍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가락을 비벼댔다.

“아니, 정말로요? 내가 이괄은 원래 죽일 생각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단지 그냥 죽이는 대신 잘 죽였을 뿐이지요. 좌의정은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박홍구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못 믿으실 거면 벌은 왜 내리라고 하셨담? 그리고 내가 이괄에게는 너 죽여도 되냐고 물어보고 죽였겠습니까?”

죽일 생각이라면 나중에 빚 갚으라고는 말 안 하지.

응하지 않을 게 당연한데.

김자점이나 이괄처럼 통보 없이 알아서 잘 써먹을 따름이다.

그것을 박홍구도 부정하기 어려웠는지, 조금은 안도한 얼굴로 끄덕였다.

나 없었으면 일가가 사라졌을 사람이 겁은 왜 이렇게 많으실까.

“아무튼, 인성군이 노려지는 것이 이번만은 아닐 터이니 인성군에게는 꼭, 다음에는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뒤늦게 소식 듣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달라 전해주세요.”

“예.”

“사복시정 이름으로 사직서 올려주시고요.”

“알겠사옵니다.”

“사복시정이 못난 인간이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 제 발 저려서 도망갔다는 식으로 소문 조금 깔아주시면 알아서 정리될 겁니다.”

“예에.”

사복시정의 건은 이렇게 대강 정리될 듯해서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거의 의례적인 절차인지라 박홍구는 평소처럼 하나를 집어가서 야금야금 먹다가, 흠칫 놀라더니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내가 좌의정 잡아먹는대요?”

“아, 아니옵니다…….”

내가 이괄 어떻게 죽였는지 알았구만.

하나만 알려주어도 열을 알아버리니, 몰락했을지언정 수십 년 녹봉 타 먹은 짬바가 어디로 가지는 않은 듯했다.

“나중에라도 단서를 알게 된다면 알려주시고요.”

사복시정을 조종한 사람이 누구인지.

“여부야 있겠습니까.”

박홍구는 시원하게 답했지만, 솔직히 기대하고서 한 당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단서를 공유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건 박홍구도 알고 있겠지.

박홍구가 혼자서 또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성장을 사주한 놈들이 보통 철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괄을 독살한 건 개혁을 반대하는 자에게 반-개혁 세력이라는 허상을 씌워 숙청해 버리기 위함이었는데, 정말로 허상이 아닌 반-개혁 세력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자신들을 잘 숨겨왔다는 거다.

예전부터 있던 놈들이 아니라, 나의 개혁에 맞서 급조된 세력이라고 해도 더러운 것들끼리는 끈이 있었을 테니 결속력은 만만치 않겠지.

그리고 이놈들은 결정적으로, 저들이 이괄을 독살한 게 아니라는 걸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겠지.

이러고서 개혁이 끝내 정착하면 누가 왕의 뒤통수를 긁으려 들었냐는 듯 입 싹 닦고 정상인 코스프레나 할 게 뻔했다. 개자식들.

“전하.”

“말씀하세요.”

“혹시나, 서인 강경파들이 사주한 일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청산되지 않은 대북 잔당이 제 발을 저렸다.

“그건 가능성이 작지요.”

대북과 관련된 사건을 터뜨려 나의 퇴로를 막고 잔당을 쓸어버리겠다는 건, 솔직히 나에게 같이 죽어보자고 하는 꼴이다.

“내가 대북 숙청을 바라고, 실현을 위한 명분을 원한다면 모를까요.”

왕이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는데 이런 식으로 일을 꾸민다고?

반란 한 번 더 할 생각이 아니라면 무모한 짓이다.

어떠한 권력도 십 년은 가지 못하는 법.

기축옥사 이후에도 지금처럼 서인의 세상이 펼쳐졌지만, 고작 2년도 안 되어 정철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 발생하면서 조정의 세력도는 반전했다.

그런데 굳이?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움직이는 건 아닌데, 서인 강경파 중에서 가장 무모한 인간은 자기 일감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음모를 꾸밀 여유는 없단 말이지.

“서인 강경파는 이번 사건의 배후보다는, 배후가 이용하려던 쪽에 가깝지요.”

“……알겠사옵니다.”

“만에 하나 그렇더라도, 내가 옥사를 반기겠습니까?”

“아닐 것이옵니다.”

“아시면서도 물어보십니다. 안심하세요.”

“예.”

이 주제는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단서랄 것도 없고, 또 단서가 생기리라는 기대도 크지 않은지라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좌상…….”

은근히 호명하니 박홍구가 바짝 굳어서는 답했다.

“하명하시옵소서.”

내가 또 무슨 일을 꾸민다고 생각하나 본데, 전혀 아니다.

“세자는 공부 잘하고 있습니까?”

본인은 공부를 즐긴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아빠가 선생님에게 자식이 공부 잘하고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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