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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42화 (42/380)

인조, 명군이 되다 42화

세자는 서궐을 거닐었다.

마침 날씨도 좋았으므로, 부왕의 성지聖旨를 받든 것이다.

평소 지붕 아래에만 있다가 실외를 유람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니 세자는 금방 버릇이 들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정신을 차리니 그새 서연書筵 때가 코앞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다고?’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린 채 얼핏 중천의 태양을 확인한 세자는, 궁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궁인들이야 굳이 청하지 않아도 뒤를 쫓겠으나 세자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존경하는 아버지, 흠모하는 군주가 보인 모범이다.

과거를 생각하면 부왕의 변화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본래 세자의 아버지는 아랫사람들과 말도 섞기 싫어했으니까. 마치 같은 공기를 마시면 천박함이 옳기라도 한다는 양 말이다.

부왕께서는 세자 자리에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본인께서도 부담을 피하지는 못하신 거겠지.

세자는 아버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그것을 본받고자 했다.

곧 인경궁 중휘당重暉堂에 도착한 세자는 궁인들을 해산시키고 대청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자신을 기다리는 이는 없었다.

학생이 되어서 선생님들을 기다리게 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

먼저 자리 잡고서 하나둘 찾아오는 서연관들에게 인사와 안부를 건네는 게 세자의 자부심이었다.

짧은 기다림이 있었고, 신하들이 하나둘 찾아와 배석했다.

“강녕하셨사옵니까, 저하?”

“덕분에 평안합니다. 우의정께서는 평안하시고요?”

“평안합니다.”

세자의 인사에 세자시강원 부傅를 겸하는 우의정 조정이 흐릿하게 웃었다.

이처럼 열의를 가진 학생은 흔치 않았으니까.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존재만으로도 뿌듯함을 안겨준다.

학생의 뛰어난 지성이 열의 못지않다는 점이 더욱 호평하는 이유다.

세자는 이어서 들어서는 서연관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다들 바쁘신가 봅니다.”

“근자에 들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는 하였지요. 머잖아 다들 도착할 것이옵니다.”

조정이 허리를 숙이면서 답했다.

나랏일이 아무리 중요하여도, 세자를 교육하는 일만 하겠는가? 그 역시 나랏일의 일환이기도 했다.

장차 군주가 될 사람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것이니.

세자도 부왕이 신하들에게 내린 일이 많아 다들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양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세자는 이런 시간에도 먼저 배석한 서연관들과 잡담을 나누며, 친교를 쌓고는 했으니까.

다만 오늘따라 더 늦어질 따름이다. 근래에 설상가상으로 벌어진 사건 때문이겠지.

“어사가 급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세자는 흘러가듯 던진 말이었으나 서연관들은 입술을 오므리고서 눈치를 살폈다.

이괄의 독살 사건.

사석이라면 모를까, 세자의 앞에서 공공연하게 떠들 주제는 아니었다. 드러난 것이 많지 않아서 온갖 극단적인 주장이 첨예하게 교차하고 있었으니까.

대저, 정치가 묻은 사건은 본질이야 어떻건 공석에서는 언급을 지양하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비결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말에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모두를 대신해, 참석한 서연관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조정이 수염을 쓸어내리고서 답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불미스러운 일이긴 하나, 좌의정이 전담하여 배후를 파악 중에 있으니 금세 정리될 것이옵니다.”

조정이 현황을 알리자 세자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어쩌다 나온 화제였으나, 이괄의 죽음은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다. 오죽하면 궁인들마저 그 이괄이 죽었다며 수군댔을까?

떠드는 사람은 많았으나 정작 내막을 아는 이는 없었다.

자신이 세자여서 말을 아끼는 것인지, 정말로 드러난 게 없는 탓인지.

우의정에게서도 모두와 똑같은 대답을 듣자 세자는 살짝 빈정 상하여서 물었다.

“어사는 왕명을 받들어 목민관을 감찰하는 자리인데, 그런 어사가 화를 입었다는 것은 목민관들이 감찰을 감수하지 못할 정도로 죄과를 쌓았기 때문입니까?”

조정은 지나갈 줄 알았던 화제가 이어지자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로서도 쉬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단순하게 답할 수도 있겠으나, 세자가 뻔한 대답이나 듣고자 물어본 건 아닐 테지.

그렇다고 모두의 앞에서 구구절절 조정의 내밀한 사정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건 세자가 알아서 득이 될 것도 없었고, 득이 되어서도 안 되니까.

“제가 저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어사의 불미스러운 죽음이 외관 모두가 작당하여서 벌인 일은 아니라는 것이옵니다.”

세자는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

일부가 경천동지할 일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세자가 모든 신하를 싸잡아 잠재적인 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피해야 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어도 두 다리 없이 뛰지는 못하듯이, 왕이 제 두 다리가 되어줄 신하들을 불신한다면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테니까.

이어서 조정은 이 사건의 귀책을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약점도 잃을 것도 많은 조정이라 분란이 생길 만한 발언은 지양하는 게 옳았고, 사실 이게 꼭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이와 같은 소란이 벌어진 궁극적인 이유는, 폐주가 용인用人에 있어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건 지극히 중요한 일이므로 사람을 뽑고 기용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여야 하는데, 폐주는 그렇지 않고 권신에게 국정을 의탁한 채 본인의 향락과 사치만을 일삼았을 뿐입니다.”

조정은 이유를 끌어다 결말까지 이어붙였다.

“하여, 시야가 잘 닿지 않는 외방에는 오늘날에도 일부 부적격한 사람들이 관직을 지내고 있는 탓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게 다 폐주 잘못이다!

북인도 서인도 이견을 달지 않을 명안이었다.

“저하께서는 이를 반면교사 삼으시어, 폐주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셔야 하옵니다.”

조정은 나름 답변하였으나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세자가, 그럼 폐주 때 기용된 사람을 전부 잘라 버리면 되지 않느냐 순진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면 폐주 때 우의정이 된 자신은 어떠한 대답도 궁색할 수밖에 없다.

조정은 서둘러서 화제를 돌렸다.

“저 역시 소식을 접하고 놀람을 면치 못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어찌 의정이 되어서 경거망동하겠습니까? 전하께서도 다만 신하들에게 할 일을 정해주셨을 뿐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없으셨사옵니다. 윗사람이 동요하면 아랫사람은 절로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지요.”

왕이 침착했던 이유는 우의정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지만…….

“저하께서도 이 점을 유념하셔야 하옵니다.”

오래간만에 진땀 흘리게 된 조정은 소매로 이마를 닦아냈다. 노년에 심장이 혹사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세자도 만족했겠지.

과연, 세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우의정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망극하옵니다.”

조정은 대답과 함께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짧은 대담이었으나, 세자는 많은 교훈을 얻어냈다.

왕의 용인술이 얼마나 중요하만이 아니라, 우의정이 어째서 대답을 피하는 느낌을 주는지, 또 부왕은 어째서 폐주가 기용한 사람들을 모조리 내치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

세자는 자문에 자답을 이어가다가 감탄했다.

부왕께서는 이런 고민을 일상적으로 하시겠지, 하고.

더욱이 부왕의 고민은 이미 벌어진 일의 해석보다는 일이 벌어지기 전의 예상과 대응에 집중되어 있을 터였다.

부왕은 무엇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롯이 판단하고, 오롯이 책임져야 했다. 이 나라에서 왕 이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이라는 위치에서는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을 놓아버린다면, 연산군이나 폐주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역시 아버지께서는 대단하시구나.’

세자는 감상을 갈무리하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여전히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괄은 누가 죽였으며, 왜 죽였다는 말인가?

세자는 같은 의문을 부왕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부왕이라면 무언가 말해줄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는 어사의 죽음에 대해 더 알고 계시겠지?’

사소한 기대감은 평소 부왕을 향한 믿음과 얽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아버지라면 어사의 죽음을 예상하지 않으셨을까?’

막상 떠올리니 썩 내키지는 않는 가정이었다.

부왕이 신하의 죽음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불경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세자는 상념을 중단할 수 없었다.

해결되지 않은 의혹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많이 쌓였다.

이내, 세자는 어사의 죽음이 의도된 것이라면 부왕이 얻을 이익이 막대함을 깨달았다.

부왕은 이 나라의 해묵은 조세 구조를 뜯어고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반감을 가진 자도 많았는데, 어사의 죽음은 그런 신하들에게 내려칠 채찍이 될 수 있었다.

‘……!’

사고의 저변을 넓힌 세자는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도, 감히 단정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가설을 증거도 없이 받아들이는 건 섣부를 뿐만 아니라, 세자는 여전히 신하를 도구로만 여기는 부왕의 모습을 쉬이 그릴 수 없었다.

세자가 생각하는 부왕은 둘도 없을 명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없이 자상하고 친절한 아버지였으니까.

그런 분이 사람의 목숨을 이용하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우의정 대감.”

세자의 나지막한 부름에 조정이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시옵소서.”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되는 것입니까?”

조정은 세자의 질문이 느닷없이 느껴졌으나, 먼젓번과 비교하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의문이었다.

“공자께서는 제자가 농사짓는 방법을 묻자, 나는 능숙한 농부만은 못하다 겸양하며 이르시기를, 윗사람이 예禮와 의義, 신信을 다하면 백성이 대신 농사를 지어줄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정은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구절을 인용하고서 또 다른 고사를 언급했다.

“또한, 공손추公孫丑는 맹자께 묻기를, 선생님이 제나라의 중책을 맡으면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느냐고 하니 맹자께서는 불쾌해하시며 답하시기를, 왕이 인의仁義로서 다스리면 막아낼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은 맹자 공손추편의 내용까지 인용하고서 세자의 의문에 답했다.

“말단을 쫓지 않아도, 성현의 가르침을 잘 지키면 대업은 알아서 성취되는 법입니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이야 아무래도 되지 않느냐 의혹하는 것은 앞뒤가 잘못되었지요. 어찌 뿌리 썩은 나무가 열매를 맺겠습니까?”

조정은 세자의 안색을 살피고는, 자신의 대답이 충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세자의 면면에는 여전히 의혹이 가득했으니까.

“이렇게 말로 전해 듣는 것보다, 직접 깨달으시는 게 더욱 와닿으실 수 있습니다. 언젠가 활을 잡으신다면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는 것과 과녁만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잘 맞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세자가 질문한 의도를 알 리 없는 조정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새 공석이 메워진 주변을 돌아보고서 말했다.

“인원은 갖추어졌으니 본격적으로 서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의문에 따라 많은 가르침을 내렸지만, 오늘 공부할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세자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책을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평소 서연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세자다.

오죽하면 신하들보다 먼저 착석하여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까지 건넬까?

그런 세자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으니, 서연관들은 다그칠 생각은 전혀 못 하고 그저 의아해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조정은 책을 덮고서 말했다.

“저하께서 고민거리가 생기신 모양입니다.”

“송구합니다.”

“저야말로 저하의 의문을 분명히 해결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뿐이지요. 수업은 이쯤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르지 않습니까?”

세자가 당황해서 묻자, 조정은 역시 세자가 변한 건 아니구나 안도하고서 답했다.

“정심正心하지 못한 채 공부를 이어나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지 몸만 서안 앞에 앉아 있을 뿐이지요. 차라리 수업은 일찍 마치고, 저하의 의혹을 해결하는 게 이로울 것입니다.”

“……예.”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드렸으니, 남은 의혹을 해결하는 건 저하의 몫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수업이 되겠지요. 항상 누군가가 대신 고민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세자는 아쉬운 기색을 금치 못하였으나, 조정은 그저 웃어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엉덩이를 달싹이던 다른 서연관들도 우후죽순 일어나 기립했다. 그리고 조정을 따라 세자에게 인사를 돌린 뒤 차례대로 물러났다.

세자는 평소처럼 문간까지 서연관들을 배웅했다가, 그들이 사라지자 지친 얼굴로 주저앉았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어.’

우의정이 주의할 정도라면 티가 많이 났으리라.

세자는 익선관을 곁에 내려두고서 괜스레 간지러워진 머리를 긁어댔다.

서연을 앞두고 사사로운 의문을 드러낸 것부터가 실수였을까?

……하지만 우의정이 말하지 않았던가, 정심하지 못한 채 공부를 이어나간들 무슨 소용이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의혹을 다음 서연까지 짊어지고 갈 게 아니라, 그때는 정심으로 수업에 응할 수 있도록 미리 의혹을 해소해두는 것이다.

세자는 하늘을 보았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세자는 외출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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