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3화
무작정 나선 외출이었다.
막연히 방황하다 보면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해서, 당신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라 말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이 진심이었다.
그래서 한없이 간소한 차림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세자를 알아보고서 꺼리는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부왕을 뵐 생각은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뵈어서야 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바라지 않았던 부왕의 면모를 알게 된다면 최악이겠지.
그래서 차라리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가지고서 궐을 나섰다.
아무래도 좋으리라.
상념에 빠진 채 정처 없이 거닐다 보면, 의혹이 바람을 맞은 먼지처럼 흩어질 수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니까?”
담벼락 너머에서 따지고 드는 소리가 있었다.
세자는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예가 아님을 알았지만, 홀린 듯이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전과는 다른 사람이 태평하게 말했다.
“이 사람아. 대법이 세워진 게 무려 중종조인데, 아직 별 탈 없이 지내오지 않았나?”
“별 탈이 있으니까 바꾸려는 게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세자는 금세 나라의 세법을 떠올렸지만, 정말로 저들이 세법을 논하고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세자는 계속 경청했다.
“자네는 도성 밖은 안 나가봐서 모르겠지만, 외방에서는 양민들 죽는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다네.”
“그거야 양민들 사정이지. 그리고 양민들이 언제 앓는 소리 안 냈던 적이 있던가.”
“양민들 사정이라고 남 일인가? 성현께서는 군주민수君舟人水라고 하였네. 백성들이 요동치는데 나라가 잘 나아갈 수는 없어!”
신경질적인 사람은 설득이 안 되어서 신경질이 나 있었고, 태평한 사람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태평했다.
세자는 어쩐지 두 사람의 인상이 그려지는 듯했다.
전자는 얼굴이 날렵하거나 인상이 굳셀 듯했고, 후자는 넉넉한 얼굴에 염소수염이 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얼굴 날렵할 사람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아무리 앓는 소리를 그치지 않고, 설령 그것이 백성의 본질이라 하여도, 정치의 본분은 백성들이 만족하고 기뻐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지!”
세자가 듣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정론이었다.
그러나 태평한 사람의 이어진 말에 신경질적인 사람은 단번에 침몰하고 말았는데, 이건 세자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정치를 잘 알면 공부도 잘해서 출사하지 그러나?”
“……이익! 이 사람아!”
신경질적인 사람은 호통을 치려다가도 할 말이 궁해졌는지, 호명만 하고는 말았다.
……옳은 말이지.
문제가 있다면 직접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르다. 안타깝게도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직 출사를 이루지 못한 듯했다.
세자는 속으로 신경질적인 사람을 응원했다.
성격은 조금 나쁘지만,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론을 전개하니 나랏일을 한다면 부왕께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흘러가는 대화였는지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시답잖아서, 세자는 다시 발을 옮겼다.
궁을 나섰을 때보다는 걸음이 가벼웠다.
부왕의 개혁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자는 마치 자신이 응원받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나아간 세자는 어느새 운종가에 이르렀다.
행인들이 워낙 즐비하여서, 동행한 위사가 찰싹 따라붙을 정도였다.
“이곳은 피하시지요.”
출궁 전 위사는 억지 부리는 세자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서 언짢아할 왕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끝내 그는 미래가치에 투자했다.
평복으로 갈아입고서 세자와 동행한 것이다.
장차 세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이때의 은혜를 조금은 생각해 주시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각오하지는 않았다.
세자가 이 혼란 속에서 위해라도 입는다면 자신에게 남는 건 미래가치가 아니라 왕의 진노뿐일 테니까.
“차라리 조금 돌아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위사는 재차 속삭였으나, 세자는 어색하게 웃어버리고는 계속 인파를 파헤칠 뿐이었다.
“…….”
본래, 투자란 얻는 만큼 위험도 존재하는 법.
선진경제학의 편린을 맛본 위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마주 오는 행인들을 노려보았다.
절반은 스리슬쩍 피하고, 또 절반은 미친놈이라도 본다는 양 하였으나 이것이 위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악이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하였지만.
“가만히 따라오세요. 도리어 눈에 더 띄지 않습니까?”
“……예.”
위사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세자에게 따라붙었다. 한 소리 들은지라 눈에서는 힘을 풀었지만, 그래도 환도 손잡이를 쥔 손까지 힘을 풀지는 않았다.
불시의 상황은 대비해야 하므로.
다행히 대개의 행인은 위사가 등 뒤로 잡은 환도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평소처럼 바쁘게 돌아다녔고, 세자는 느긋하게 거닐었으며, 위사는 그런 세자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세자는 전전긍긍하는 위사 대신 거리 좌우에 펼쳐진 좌판과 상인들을 시야에 담았다.
그가 운종가를 방문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신분이 지금과는 다른 때였을 뿐.
왕과 장차 왕이 될 사람을 제외하고 종친의 공부는 권장되지 않았다. 과거에 그는 즐길 거리가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운종가의 모습은 상전벽해구나.’
지금처럼 상인들이 마음껏 좌판을 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재물을 거리에 늘어놓으면, 분호조의 조도사들이 좋은 곳에 쓰겠다며 가져가고, 평시서平市署의 관리들이 이것은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아서 또 빼앗으며, 마지막으로 왈패들이 권력과 알량한 끈을 믿고서 한 줌 남은 것까지 강탈하니, 상인들은 감히 좌판을 펼칠 수가 없었다.
오직 대상인만이 권력자들을 뒷배 삼고서 장사할 수 있을 뿐.
그들이 시전을 장악하고서 폭리를 취했기 때문에 상인은 물론 손님들까지 없어져, 운종가雲從街가 그 이름처럼 오가는 사람이 구름 같다던 말은 소싯적 이야기로나 전해 들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소싯적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다시 실현됐다.
다, 폐주를 대신해 나라를 주름잡았던 권신들이 숙청되고 백성들을 도적질한 분호조가 혁파되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부왕께서 단호하게 결행하신 일.
시전의 상인들은 부왕의 성세聖世를 믿고서 다시 점포를 채웠고, 손님들은 그들과 거래하고자 거리의 의미를 되살렸다.
세자는 흐뭇한 얼굴이 되어 위사에게 물었다.
“요즘도 시정잡배市井雜輩가 횡행합니까?”
“아니요. 새로 부임한 판윤이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무리는 흩어진 지 오래입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였던 자들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지만, 그건 야생이나 무법지대에 한할 따름.
부왕이 외숙을 복상까지 명하여 기용한 것은 이 때문이겠지.
“빠져나갑시다.”
세자가 만족한 얼굴로 이르자, 위사는 기다렸다는 듯 못을 박았다.
“모시겠습니다.”
운종가를 벗어나자 초가집이 삐뚤빼뚤 들어선 거리가 펼쳐졌다.
구석마다 언제부터 처박혀 있었는지 모를 생활 쓰레기들과 며칠 묵어 녹색 이끼가 낀 진창이 즐비했다.
일개 종친에 불과했던 시절에도 찾아온 적은 없는 동네.
세자 역시 어쩌다가 흘러들어 왔을 뿐이었다.
거리 구석에서 시선을 떼고서 고개를 든 세자는 지저분함의 새로운 지평을 마주했다.
새하얗게 삭은 지붕 위 이엉과 처마 밑에 직물처럼 쌓인 거미집, 벽의 쩍쩍 갈라진 틈을 타 횡행하는 흑색과 적색의 벌레들.
선왕의 왕자를 부친으로 둔 세자로서는 상상치도 못한 광경이었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았으나,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니, 이미 한쪽이 무너져서 지붕이 기울어진 초가마다 흐릿한 인기척과 재잘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세자는 난생처음 고시원을 방문한 재벌가 3세 같은 얼굴을 하고서 굳어버릴 뿐.
폐주는 이런 사람들을 수탈하여서 지금 자신이 지내는 궁궐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세자는 어째서 몇몇 신하들이 극렬하게 서궐의 철폐를 주장했는지 이제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삶이 이래서야, 서궐은 진정 고혈로 쌓아 올린 궁궐이 아니냐.
세자는 즉위식이 있던 날 부왕의 당부를 통감했다.
그날 부왕은 백성들이 먼저 원하지 않는 한, 경복궁과 동궐은 재건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당부했다.
신하들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 부왕이 서궐을 존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차피 이 나라의 주인이 언제까지고 행궁에 불과했던 경운궁에서 계속 정사를 볼 수는 없다.
반드시 제대로 구성되고 기능할 수 있는 궁궐을 갖춰야 했는데, 서궐을 해체하였다간 백성들에게 같은 고생을 시키게 된다.
부왕께서는 후대의 왕과 만천하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일신의 불편과 오명을 오롯이 감내하신 것이었다.
“…….”
세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히, 이런 부왕을 두고 어찌 그런 걱정을 했단 말인가?
이토록 마음이 넓고 깊으신데.
되돌아보니 참으로 불경한 발상이었다. 세자는 마치 죄인이 된 듯했다.
“이만 환궁하시겠습니까?”
세자의 분위기를 읽은 어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럽시다.”
고개를 숙이고서 거리를 나선 세자였지만, 의혹을 덜어버린지라 이내 발걸음은 금세 가벼워졌다.
그리고 또 한 번 종로를 관통하고서 서궐로 돌아가는데, 맞은편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마주칠 사람은 아닌지라 세자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서 다가오는 사람을 마주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오다가 말고 우뚝 멈춰서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허억.”
세자의 곁에서 위사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귀신이라도 본 양 뻣뻣해져서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맞은편 사내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척에 이르자.
세자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다가가서 속삭였다.
“아바마마께서는 어인 행차이시옵니까?”
“나야…….”
부왕은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금세 실소하면서 답했다.
“네가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나왔다.”
부왕은 동행한 좌의정 박홍구를 돌아보았다.
박홍구는 망극하다는 듯, 세자의 시선에 허리를 숙였다.
“……예? 소자를 찾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말도 없이 궐을 나서, 바쁘신 부왕이 직접 자신을 찾게 만들다니!
왕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어 싫어할 부모는 없지.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누구든 돕고자 궐을 나섰다.”
화들짝 놀랐던 세자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웃었다.
보기보다 부왕께서도 충동적인 면이 있으신 듯했다. 기분이 좋으시다고 백주白晝에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니.
어쩌면, 명분만 그렇고 조용히 산책을 나오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왕의 행차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뒤따르게 마련이니.
부왕께서는 그런 식으로 아랫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왕은 고개 들고서 위사와 마주했다.
세자가 말도 없이 출궁한 것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수행하고 있었던 위사는 눈을 질끈 감고서 허리 숙였다.
이렇게 모가지가 날아가는구나, 하고.
드넓은 한양을 오가던 중 왕을 마주하는 것도 대단한 불행인데, 심지어는 환궁 중에 딱 걸리다니?
참으로 고약한 운수였다.
세자는 미안한 얼굴로 위사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여기 있는 위사는, 간곡히 말렸지만 소자가 워낙 억지를 부렸던 탓에…….”
“되었다.”
부왕은 크게 개의치 않다는 듯 손을 휘젓고서 말했다.
“내 안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나섰는데, 마침 나타났으니 도와줘야지. 좌상?”
“말씀하시옵소서.”
“이 일은 불문에 부칩시다.”
그러자 박홍구가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신은 당최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미 새카맣게 잊어버렸다는 농담에 왕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이어서 위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세자가 공부를 잘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위사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왕의 관대한 처분은, 세자의 죄책감을 덜어주면서 위사 자신에게는 빚을 지워두기 위함이었다.
위사로서도 세자와 더욱 긴밀해진다면 망극할 일.
그는 기꺼이 세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하께서 소관을 살리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아바마마께서 살려주신 것이지요.”
위사는 이어서 왕에게도 인사를 올렸고, 왕은 고개를 몇 번 주억인 뒤 말했다.
“다음에 또 나서고 싶다면, 비답을 기다리지는 않더라도 미리 연락은 해주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갑시다, 좌상.”
박홍구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서 왕을 뒤따랐고, 한시름 던 세자는 멀어지는 부왕의 모습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위사에게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날씨만 아니라 기분까지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