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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44화 (44/380)

인조, 명군이 되다 44화

이괄 독살 사건이 일어난 지도 달포.

절기는 어느새 소서小暑에 이르러, 맑고 드높았던 하늘은 우중충하게 변했다.

마치 언제라도 장마를 내리겠다 위협하는 기세여서 지상의 백성들은 물오른 더위와 차오르는 물을 두고 원치 않은 양자택일을 하게 됐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따름인지라, 농군들은 제방이나 미리 고쳐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농군들은 가을보리를 거둔 땅에 작물을 심는 등 농번기를 맞아 한참 바빠졌는데, 쟁기 들 일 없는 한양의 관리들이라고 마냥 태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농사에는 철이라도 있지, 기실 사시사철 바람 잘 날이 없는 곳이 한양이었다.

좌의정 박홍구는 독살 사건의 조사를 맡고도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해 탄핵과 규탄이 뒤이었다.

일각에서는 박홍구가 의도적으로 조사를 방해한 것이 아니냐 의심하였고, 심지어는 그가 독살 사건의 배후가 아니냐며 극단적인 주장까지 내놓았다.

하여 왕에게 박홍구의 체직과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박홍구의 평판이 더 나빠지면서 누군가는 그의 조카, 사복시정 박성장이 갑자기 사직하고 사라진 책임을 박홍구에게 묻기도 하였으나 워낙 억지였던 터라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오직 박성장과 알고 지내던 소수만이 조용히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그와 같이 탐욕스럽고 기고만장한 인간이 무엇이 아쉬워서 사라진단 말인가?

그러나 환국 이래로 불안, 또는 불만을 이유로 사직하는 사람은 잦았던지라 박성장의 존재는 금방 잊혔다.

마치 김자점 때 그러했던 것처럼.

내막을 아는 왕과 일부 관리들은 인성군의 주변을 주시하였으나, 실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반-개혁 세력의 무리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박성장이 사라진 내막을 짐작했기 때문이리라.

대신 의외의 사람이 인성군을 방문했다.

무식하고 탐욕스럽기는 박성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놓인 위치가 다른 인물이었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그는 인성군에게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그러니 일단은 가족인 셈이나, 평소 연락이 뜸하였고 행사 때나 얼굴을 보는 정도였는데 급작스레 방문을 받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금 놀라울 뿐이나, 흥안군이 박성장이 앉았던 자리에서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펼치니 인성군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이제는 종친까지 회유했으니까.

인성군은 일전의 일로 왕에게 당부를 받았고, 본디 종친의 정점에는 왕이 있는지라 그는 적당히 틈을 보아서 흥안군의 방문을 전했다.

이에 금상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안심하라는 짧은 비답만 내릴 뿐이었다.

박성장 때는 어떠한 단서도 잡아내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공을 들여볼 심산일까?

인성군은 자문하였으나 이내 관심을 끊었다. 면죄부는 받았으니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수면 위에서도 사건은 있었다.

다수의 양전어사가 파견된 강원도에서는 관찰사 임석령을 위시한 현지 수령들과 어사들이 경쟁적으로 장계를 쏟아냈다.

대개는 공문이라는 양식과 어울리지 않게 고백과 자백, 정당화와 변명, 지적과 비난 따위가 천태만상으로 뒤섞여 무엇이 진실이고 날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무수한 장계의 분석은 의정부가 맡게 되었으며, 여기에 대북 인사들로 편중된 본청의 신뢰도를 의심한 일부 인사들이 타의 반으로 협조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필도 각지의 수령들이 새로 갱신된 군적을 잇달아 올리면서 각 도 감영과 병조의 업무도 가중됐다.

그 과정에서 현황 일부가 노출되어, 한양의 여론이 순식간에 난삽해졌는데 문무백관과 식자들이 무너진 방위를 두고서 저마다 목소리를 낸 탓이었다.

특히, 쟁점에 선 병조는 고질적인 예산 부족을 문제 삼았고 호조에서는 판서 이광정이 직접 군축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이광정은 일전에도 왕에게 군축을 건의하였다가 반응이 나쁘지 않았음을 의식한 것이리라.

이러한 사연들로 현재, 한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창의문 문루 아래를 지나온 남이공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웠던 한양 도성의 공기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 것이다.

‘반정이 일어날 때 꼭 이러했지.’

남이공은 그 역사가 새겨진 창의문을 돌아보았다.

반정군이 한양으로 진입했던 길목이었으며, 그와는 대조적으로 폐주를 위해 순절한 무관의 비문이 새겨진 곳이기도 했다.

그새 한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아도 좋겠지만…….

남이공은 평안도 철산부까지 나아가 배를 타고 가도를 왕복하고 온 참이었다.

골수까지 지긋지긋하게 찌든 세월 탓인가, 아니면 가도에서 모장에게 두고두고 놀아난 탓인가?

철산부에 귀환하는 뱃전을 댄 지도 한참이거늘 여전히 뱃멀미가 치미는 듯했다.

오늘 당장 궁궐이 폭발할 게 아니고서야, 그리운 내 집에서 한숨 푹 쉬고 집밥이나 먹고 싶은 게 남이공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이공은 가솔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사랑방에 퍼질러져 등판을 지졌다.

그렇게 반나절 피로를 떨쳐낸 남이공은 상다리 부러지도록 상을 내어오게 했다.

아들 남두북南斗北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석을 청했으나, 남이공은 단호히 거절했다.

자식이 그동안 부친을 걱정하고 그리워한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오롯이 그의 휴식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잠시 후.

남이공은 반쯤 비워진 상을 밀어내고서 대大자로 뻗어 다리를 꼬았다.

지긋한 연배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청춘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천박한 모습을 어찌 아들에게 보일 수야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했다.

“흐흠…….”

남이공은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건들거리다가, 그것마저 질리고 정신이 몽롱해질 즈음에야 자세를 고쳐 앉고 서안을 끌어당겼다.

마저 퍼질러서 자면 좋겠으나, 해둘 건 해두어야 했으니까.

문방사우를 갖추고서 연적에도 물을 채운 남이공은 먼저 승정원으로 보낼 글을 써 내렸다. 자신의 귀환을 밝히고 모장과의 면담을 간략한 내용이었다.

일필휘지로 장계를 써 내린 남이공은 이어서 또 하나의 백지에 편한 초서草書체로 안부와 만남을 청하는 편지를 채워갔다.

유려하게 손끝을 휘날리던 남이공은 끝내 붓을 벼루에 걸쳐놓고서 밖을 향해 일렀다.

“게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곧장 대답이 돌아오자, 남이공은 방문을 열고서 글을 건넸다.

“두꺼운 것은 승정원으로 보내고, 얇은 것은 후추後瘳에게 보내라.”

“알겠습니다.”

노복이 글을 받아들고서 꾸벅 허리를 숙이니, 남이공은 곧바로 방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 * *

다음 날.

후추後瘳 김신국은 예정보다 늦은 악우의 방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을 내달라던 사람이 이렇게 지각해도 되는 건가?”

김신국이 예의를 들어 꼬집었으나 남이공은 태평하게 늘어진 얼굴로 풀썩, 김신국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대답조차 없이 남의 집 노복을 부려 다과상을 내오게 하고는, 그제야 집주인을 보고서 말했다.

“언제 우리가 그런 것 따지는 사이였던가?”

“후우.”

김신국은 부정하지 않고 푹 한숨만 내쉰 뒤, 가벼워진 어조로 물었다.

“자리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가?”

“귀신이로다!”

김신국은 남이공의 장난기 섞인 반응을 대강 무시하고서 근래의 일을 밝혔다.

막상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남이공은 헛소리하지 않고 귀담아듣다가, 대강 정리될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북병사가 독살을 당했다는 건 정말로 믿기지 않는군.”

“석연찮은 구석도 많지.”

“설마하니 좌의정이 북병사를 독살한 건 아닐 테고.”

“집안 말아먹을 일 있나?”

대북의 원로인 박홍구를 살려두는 건 전적으로 왕의 자비다.

그런데 왕명을 수행하는 어사를 해칠 리 없잖은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대북 식구들과 자기 집안을 물귀신 삼아 저승으로 떠나고 싶지 않은 한에야.

하지만 분란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따름이겠지.

“감정에 휘둘리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좋은 기회로 여기고서 논란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당분간은 처신에 유의하는 게 좋네.”

“그래야겠군.”

“가도는 어떻던가?”

“……하!”

남이공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찬식부터 내쉬고 말했다.

“철산부에서 배를 타고 가도로 넘어갔는데, 뱃멀미가 아주 사람을 잡더라고!”

“가도는 어땠냐니까.”

“이 사람! 성격 급하기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닌가?”

남이공은 자, 하고 숨을 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가도에 닿았을 즈음에는 내가 거의 초주검이 되었어. 멀미하는 와중에 배는 계속 흔들리지, 수행원들은 야단법석에, 사공은 미쳐서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튼 땅을 밟으니 바로 드러눕고 싶더군!”

“…….”

“그런데 모 장이 이미 부둣가에 나와 있는 거야. 그러니 별수 있겠나? 빨리 인사하고 들어가서 쉬자 싶었지.”

“잘 안 풀렸던 모양이군.”

“그래! 그 미친놈이 가도를 구경시켜주겠다면서, 또 배를 태우더라고!”

남이공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두 팔을 들었다. 막 노복이 다과상을 내온 참이라 소반을 끼지 않았다면 두 다리도 들었으리라.

“내가 그 개자식 때문에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들었을 거야……. 그 뒤로 기억이 하나도 없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이더라고!”

남이공이 말을 안 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원색적인 표현을 거듭 꺼내니, 김신국은 악우가 가도에서 정말 고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았으면 됐지. 그래서, 모 장이 뭐라던가? 유람만 시켜주지는 않았을 테고.”

“어제 이미 올라간 말이긴 한데…….”

쯧!

남이공은 혀를 차고서 덧붙였다.

“뻔한 소리 좀 하고. 전하의 즉위를 축하한다면서 자잘한 선물도 보내고. 또 뻔한 소리 하더라고.”

“어떤 뻔한 소리 말인가.”

“응? 뻔한 소리야 뻔한 소리지. 귀방에 소란이 있었다니 유감이다, 내부는 빨리 정리해 두고 힘을 합쳐서 함께 북적을 몰아내자, 우리 사정은 대강 이렇다……. 그러니 재물이나 내놓으라는 거지, 흥!”

뻔했던 만큼 예상도 뻔히 했던지라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북인이 몰락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조선 안에서의 사정이다. 아무리 자신이 팔자가 기구하게 꼬여서 가도를 되었다 한들, 엄연히 일국의 대표로서 방문한 것인데 응대가 그게 뭐란 말인가?

사치스럽고 망측한 장식을 늘어놓은 방에서 술판을 벌이고 대담을 이어가니 이것이 외교인지 농담 따먹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패잔병들 두목 주제에 벼락출세했다고 뵈는 게 없는 거지.

새삼 왕의 밀명을 긍정한 남이공이 김신국을 똑바로 보고서 물었다.

“만약에 말일세.”

김신국은 악우가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대니 의아하였으나, 그래도 또 헛소리는 하지 않겠다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가도를 친다면 어떻게 쳐야겠나?”

“……미친 건가?”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건 알지만, 진지하게 물어보는 걸세. 자네는 군략에 정통하니 해줄 말은 있겠지.”

“자네가 미쳤다는 거?”

김신국의 연이은 반응에 남이공은 짜증이 난 얼굴로 무릎을 때렸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라니까?”

“자네가 모문룡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방금 잘 알았네만, 그자는 명나라에서 총병으로 제수받은 인물이야. 그런 사람을 치겠다는 발상부터가 진지하지 못한데, 내가 어떻게 진지하게 답할 수 있겠나?”

참으로 시큰둥하였으나 정론은 정론이었다.

모문룡을 대적하겠다는 소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리라.

그러니 왕도 밀명을 내린 것이겠지.

남이공은 이러한 내막을 말해줄까, 잠시 고민하였으나 아무리 생사를 같이 한 죽마고우라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게 있었다.

“하, 됐고!”

남이공은 대강 뭉개 버리고는 물었다.

“그래! 내가 미쳤다고 치세. 미쳤다고 치고, 고민을 한 번 해달라는 거지!”

김신국은 완고한 악우의 요청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으나, 고작 고민뿐이라면 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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