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5화
밤이 되자 행인은 뜸해지고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소리가 한양에 울렸다.
인정이 친 다음에는 통행이 금지되나, 오히려 이때를 노려 집을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평소 밖으로 나올 일 없는 양갓집 규수나 막 제수되어 관청 선배들에게 밤낮없이 인사 다니기 바쁜 신입 관리, 늦은 시각까지도 연정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부모 몰래 밀회를 가지는 청춘 남녀들이 대표적으로 그러했다.
남이공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대문을 닫고서 거리로 나왔다.
금상의 부름이 있었다.
남이공은 가도로 떠나기 전 밀명을 받았다.
모문룡군이 주둔한 가도의 정세를 정찰하고 오는 것으로, 사신의 역할이 본디 그런 법이나 왕에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금상은 나라에 해악만 끼치는 모문룡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남이공이 김신국에게 자문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신국은 임란 때 의병을 이끌어 크고 작은 공을 세웠으며, 당대의 명신인 유성룡柳成龍에게 병법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
가도를 치게 된다면 한마디쯤은 할 수 있으리라.
과연 김신국은 자신의 식견을 아끼지 않았다. 사족이 많았지만, 그건 남이공의 부탁을 미친 소리로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이 전략의 출처에 관심을 가진다면 김신국은 자신에게 한없이 감사하게 되리라. 남이공은 그렇게 확신하고서 경운궁을 방문했다.
경운궁의 궁인들은 금상에게 받은 언질이 있었는지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즉조당으로 안내했다.
적막 내려앉은 밤의 경운궁을 배회하는 건 지극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단지 흔치 않은 광경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남이공은 자신이 환국에서 살아남더라도 이렇게 긴요하게 쓰이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으니까.
금세 즉조당에 이른 남이공은 위사들에게 몸수색을 받고서 어전에 이르렀다.
“부르셨사옵니까.”
남이공은 미닫이문을 넘어서 왕에게 인사했다.
왕은 서안 두 개와 여러 개의 장계를 펼쳐놓고 있었는데, 남이공의 인사에도 왕은 코를 처박은 그대로 손만 까딱였다.
왕이 만기萬機를 다하는 건 지적할 일이 아니었다.
남이공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방석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왕에게 집중했다.
금상은 인상을 찌푸린 채 주변 장계들을 뒤적이다가,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여러 개의 비답을 동시에 내린 뒤 서안을 치웠다. 그리고 그제야 남이공을 마주 보았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남이공은 단호한 대답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가도는 어땠습니까? 내가 모장에 대해 유의할 게 있는지요.”
“모문룡과 이하 장수들은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았으나 병사와 난민들은 충분히 먹지 못해 앙상하였고 눈두덩이는 깊게 들어가 있었사옵니다.”
“흠.”
“이는 모문룡이 그간 조선과 명나라 양국에서 지원한 식량과 지금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고 착복하였다는 뜻이옵니다. 그들로서는 아조를 굳이 기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조선이 모문룡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비단 그가 명나라의 총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진년, 조선은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왜구를 격퇴했다.
만약 북적에 의해 같은 위기가 벌어진다면 명은 다시 한번 대국으로서의 모범을 다하리라. 그 선봉은 조선에서 가장 가까이 주둔한 모문룡이 맡게 될 터였다.
이것이 조선이 모문룡에게 거듭 후의를 베푸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니 모문룡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방법은 나약한 모습을 노출하여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강성한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다.
그편이 조선의 기대심리를 충족시킬 수 있으니까.
굳이 조잡한 몰골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한데 모문룡은 이를 숨기려 하지 않았거니와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사옵니다.”
“경이 보기에, 모장이 우리가 기대하는 역할을 해내겠습니까?”
“기대할 수 없사옵니다.”
속단이 아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확신을 가지고서 말할 수 있었다.
“나도 동감입니다. 만약 모문룡이 강대한 노적과 맞설 생각이라면 병사들을 그 같은 상태로 두지는 않았겠지요.”
실제로 모문룡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한 틈을 타 조선의 관청과 창고를 약탈했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도살한 뒤 수급을 청군으로 둔갑해 본국으로 보냈다.
그때가 되어서도 모문룡의 군대는 도적 떼로 전락한 패잔병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과분한 기대와 지원을 등에 업고서 덩치만 키웠을 뿐.
“내가 장담하건대 모문룡은 제가 족할 때까지 재화를 받지 못한다면 명에서 나의 즉위가 공인받는 것을 훼방 놓을 뿐만 아니라, 도적들을 풀어서 연안의 백성들을 약탈할 겁니다.”
이 시점에서는 실로 과감한 주장이었으나 몸소 모문룡의 천박함과 저열함을 경험한 남이공은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구중궁궐에서 저 먼 곳에 자리 잡은 도적 수괴의 본질을 꿰뚫어 본 식견만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왕도 어쩌지 못하는 게 있었다.
“다만 여론은 선공을 용납하지 못할 터이니, 기어코 백성들이 거듭 해악을 입은 다음에야 논의가 진행될 것이 걸립니다.”
그때가 되어서도 모문룡을 처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쨌거나 모문룡이 명나라의 총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인물을 조선에서 처단하였다간 대후금 공조에 균열이 생길 것은 자명했다.
“전하…….”
남이공은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고서 말했다.
“평안도에 군사를 배치함은 어떻겠사옵니까?”
남이공의 제안에 왕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발언의 저의를 파악한 것이리라.
그러니 이어질 설명은 사족에 불과한 셈이었으나, 남이공은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마저 입을 열었다.
“아조로서 북적을 대비함은 지극히 당연하옵고, 또 북적이 요동을 장악하고 저들의 소굴로 삼았으니 저들이 아조를 노린다면 반드시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를 노릴 것입니다. 평안도에 군사를 주둔시킨다면 일거양득을 누릴 수 있사옵니다.”
“……일거양득이라 함은, 모장이 돌발행동을 벌였을 때 즉각 대응과 반격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남이공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서 덧붙였다.
“신이 근자에 오가는 말들을 들어보니 군사를 하루아침에 모집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군적이 갱신되면서 아주 부산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하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군사를 줄일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군적이 개편되면 불법으로 피역한 자를 다수 적발하게 될 터인데, 각자 청산할 죄가 있는 몸들이니 다시 변진邊鎭으로 돌려보내는 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들로서 평안도에 군사를 마련하자는 뜻입니까?”
남이공이 허리를 숙였다.
“당위성은 충분하나, 불법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피역하려는 자들인데 과연 대적對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군사가 처음부터 정예하지는 않은 법이옵니다. 유능한 장수에게 일임하여 잘 조련케 한다면, 어찌 그 같은 자들이라고 싸우지 못하겠사옵니까?”
왕이 재차 턱을 매만졌고 남이공은 김신국의 발언을 옮겼다.
“도원수는 믿을 만한 자에게 맡기시되 부원수는 한명련이나 정충신이 좋을 것입니다.”
비록 두 사람의 출신은 미천하나 능력은 그 간극을 메우고도 남았다.
그러니 임란 때는 뛰어난 전공을 보여주었으며, 지금은 각자 순변사를 맡아 양계兩界의 군무를 감독하고 있지 않겠나.
더군다나 두 사람은 왕이 들쑤시기 전부터 변방의 참상을 솔직하게 보고해 왔다. 이만한 강단이라면 유약한 피역자들에게도 모범이 되어주겠지.
“흐음…….”
왕은 침음을 흘렸다. 이 일로 개혁이 지체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리라.
하나 후금의 위협과 모문룡의 해악은 현재 진행형이다. 개혁만 바라보기에는 주변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양보도 없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는 둘 다 놓치게 되리라.
왕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경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남이공은 황송하다는 듯 깊게 허리를 숙이고서, 미뤄두었던 말을 꺼냈다.
“말씀드린 계책은, 송구하오나 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옵니다.”
남이공이 고백하자 왕은 침묵했다.
밀명을 노출하였냐는 추궁이리라. 하지만, 그런 단순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는지 이내 출처를 물었다.
“그럼 누구 머리에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김신국이옵니다.”
남이공은 대답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김신국은 그와 마찬가지로 북인에 속했으나, 금상은 당색만으로 인재를 가려서 쓰지 않았다.
허울을 제한다면 남는 건 실속뿐이다.
그리고 김신국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용처만 생긴다면 다시 기용되라. 남이공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오자 나선 것이다.
“내, 내일 두 사람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남이공은 허리를 숙인 채 미소를 숨겼다.
아무래도 김이 직을 제수받을 것 같았다. 아니더라도 금상에게 얼굴도장을 찍을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망극하옵나이다.”
* * *
“그때 자네가 뭐라고 했더라……. 미친 소리?”
남이공은 기고만장한 얼굴로 김신국을 바라보았다.
악우 덕분에 다시 어전으로 나아가게 된 김신국으로서는 그저 헛기침만 연발할 뿐.
“크흠흠.”
“어디 전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지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잠깐. 그 말은 전하께서 상식적이지 않은 명을 내렸다는 말인가?”
“…….”
김신국은 이대로 놀림감이 되느니 입을 꾹 닫아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남이공은 몇 번 더 깐족거렸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챙겨주어도 의미가 없어.”
“내가 챙겨달라고는 했고?”
“나는 우리가 굳이 엄살 피우지 않아도 서로 챙겨줄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이공은 실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보군.”
“배로 갚을 테니 엄살은 그만 피우시게.”
“아, 자네가 염치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다행일세. 그제 편지를 보내면서 안 건데, 벼루가 갈라져 있더군. 참고해 두게.”
악우의 헛소리가 질렸다 싶었던 김신국은 광화문을 바라보고서 말했다.
“잡설은 이쯤 하세. 궐에 도착하였으니.”
“잡설이라고?”
남이공은 퉁명스럽게 반응했으나, 김신국의 침묵에 재차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한때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으로 들었다.
조선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경복궁은 일국 최대의 위기와 함께 전소되었고, 그로부터 십수 년이 더 지난 지금은 폐허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담장들과 전각의 토대들만이 한때 이곳에 궁궐이 들어섰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산한 바람을 등지고서 왕이 그들을 호출한 경회루慶會樓로 향했다.
방대한 석조호수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오늘날에는 석조 기둥들만이 불에 그을린 채 덩그러니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왕은 그 너머에 있었다.
“잠시.”
주변을 지키는 위사가 두 사람의 소지품을 확인했고, 그들이 걸친 건 펄럭이는 관복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 위사는 직접 몸을 돌려서 안내했다.
“전하.”
왕은 경회루의 낚싯대를 드리운 채였다.
터무니없이 태평한 모습이라 남이공은 눈을 비볐고, 이내 왕이 든 것은 낚싯대도 아니라 나뭇가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수한 세월을 녹을 받아먹은 남이공이었으나 왕의 기행에 저의를 읽어낼 수 없었고, 혹시나 친우는 다를까 하여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두 사람은 서로의 눈만 마주칠 뿐이었다.
이에 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쓸 만한 인재를 아깝게 놓칠 뻔하였는데, 경이 소개해 주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남이공은 제 말을 하는 것을 알고서 한 발자국 나섰다.
“누군가는 신이 사사로운 의리로 인사를 전횡한다면 욕하겠으나, 어찌 나라를 위한 일에 사감을 두겠사옵니까? 쓸 만한 사람이 거두어져 국용國用을 다하기만을 바랐을 뿐이오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망극하겠나이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신국을 바라보았다. 김신국은 용안을 마주하게 되자 허리를 숙이고서 예를 표했다.
지금은 백 마디 말도 모조리 사족에 불과하리라.
만약 상께서 제수하신다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여 자신의 기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낼 따름이었다.
“경은 문안사問安使가 고견을 청했을 때 의문을 느꼈습니까?”
의외의 질문.
“……예.”
거듭 미친 소리로 치부하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니,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문안사가 비밀스럽게 맡은 일과 관련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으십니까?”
추궁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남이공은 입술을 말았고, 김신국은 조심스럽게 답할 따름이었다.
“잠시 의중에 두었으나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사옵니다.”
왕은 빙긋 웃고서 남이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아하니, 김신국은 어수룩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경은 누구를 바보로 여기고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남이공은 숨을 삼키고서 덧붙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다만 만약을 들어서 의견을 청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왕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 말했다. 온화했던 이전과 달리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게 수상하다니까?”
“…….”
“문안사.”
“예.”
“입수.”
“……?”
느닷없이 나온 단어에 남이공은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왕은 웃으면서 근처의 연못을 가리켰다.
“입수해. 아니면 내가 밀어드릴까?”
“아, 아니옵니다…….”
남이공은 꼴깍 침을 삼키고는, 몇 번 눈치를 보다가 석조연못의 가장자리를 붙들고서 느릿느릿 입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혀 관리되지 않았던 경회지慶會池라, 진한 녹조와 부평초들이 물결 따라 출렁거렸다.
“김 공께서도 그걸 가만히 듣고만 계셨네?”
“…….”
“당신도 입수해.”
“……예.”
김신국은 남이공에게로 다가가 악다문 이를 보여주었고, 남이공이 고개를 돌리자 발끝으로 물을 튀기고는 똑같이 입수했다.
“더럽잖나!”
남이공이 속삭이면서 화를 내자 김신국은 재차 이를 보이고서 속삭였다.
“이, 씨! 닥쳐!”
대감 소리까지 들었던 두 사람이 시궁창이 되어버린 연못에 빠지자, 왕은 낚싯대처럼 드리운 나뭇가지를 까딱이면서 말했다.
“내가 김 공에게 일을 맡기기 전에 능력을 한번 검증해 보고 싶습니다.”
“……하명하소서.”
김신국은 남이공과 함께 서로 수면 아래에서 푹푹 찔러대며 답했다.
“과연 여기에 물고기가 살고 있을까……. 그런데 여간 똥물이 아닌지라, 위에서 봐도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예.”
왕은 고개를 돌린 채, 나뭇가지를 까딱이면서 말했다.
“먼저 찾는 사람이 반 시진 먼저 출수出水.”
남이공과 김신국은 서로를 밀어내고서 연못을 파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