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6화
남이공과 김신국은 동병상련이다. 그러니 말을 아끼지 않았겠지.
덕분에 계책이 생기고 인재를 얻은 건 고맙다만, 밀명을 흘린 건 벌 받아야지. 안 짚고 넘어가면 나쁜 버릇이 들 수도 있다.
다만, 공개적으로 처벌하면 사람을 쓰는 데 문제가 생긴다.
남이공과 김신국은 모두 북인이라 입지가 위태롭다. 아예 대북은 아니지만, 서인들 눈에서는 거기서 거기니까.
“반성은 충분히들 하셨습니까?”
연못을 내려다보며 말하니 홀딱 젖은 노신들이 처량하게 답했다.
“……예, 전하.”
두 사람이 반 시진을 꼬박 보물찾기하였으나 물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뭐, 한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었을 양반님네들이다.
손으로 물고기 잡아볼 일이라곤 소싯적 신참례新參禮 때나 있을까 말까겠지. 이런 이들이 똥물을 방황하며 물고기를 잡는다는 건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내가 노신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이쯤 하겠지만, 다음에는 입으로 잡게 시킬 겁니다.”
“……예.”
“문안사께서는 사람을 추천하실 때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각골명심하였사옵니다.”
나는 궁인들을 시켜 목욕을 준비하라고 했다.
노신들을 똥물에 퐁당 담가놓아 시궁창 냄새를 풍기게 한 다음 알아서들 돌아가라 한다면, 그야말로 진짜 노인학대겠지.
기왕 하는 목욕이라 욕탕은 특별한 장소에 마련했다.
“……여기서 말이옵니까?”
바닥에 깔린 돌 틈 사이로는 잡초가 무성히 피어올랐고, 품계석은 왜구들이 표적으로 삼아 놀았는지 드문드문 깨져 나간 채였다.
그 너머로, 한때 왕과 대신들이 모여 국사를 논했을 근정전勤政殿 자리에는 거뭇하게 이끼 낀 계단과 토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지금이 아니고서야 언제 근정전 터에서 목욕해 보겠습니까?”
죽은 뒤라도 가져보기 힘든 기회였다.
노신들이 목욕하는 동안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수 없어 나의 욕탕도 준비해 두었는데, 용포를 벗어두고 먼저 빠져드니 눈치만 보던 두 사람도 끈적해진 관복을 벗고 각자의 욕탕에 들어갔다.
“경복궁이 세워지고 이 터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우리 셋이 처음입니다. 나도 그렇지만, 두 분께서는 참으로 진귀한 경험일 텐데, 감상이 어떻습니까?”
남이공과 김신국은 대답에 앞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각기 살아온 삶이 짧지 않아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을 받기 힘들다고 여겼으나, 이번 금상의 처분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왕과 함께 목욕한다니, 사람이 살갗을 드러내고 공간을 공유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 신하로서는 더없이 망극한 영광이겠으나 하필이면 위치가 폐허로 전락한 옛 법궁 터가 아닌가?
삼한의 땅에 새로운 기틀이 들어선 지난 이백 년 동안 대부분의 열성이 경복궁에서 생활하고 조회하였으니, 혹자가 금상은 종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물어보아도 두 사람은 할 말이 궁색할 정도였다.
남이공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혹 밤에 조상님들께서 나와 꾸짖지는 않으실지 걱정됩니다.”
“허, 그럼 내가 선대왕들께 못 할 짓을 했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오라…….”
말을 삼키면서도 내심 ‘알면서 일부러 이러나?’ 하고 의심했을 남이공이었다.
“압니다. 하지만 설령 선대왕들께서 꿈에 나와 책망하더라도, 현세에서 왕 노릇을 하는 건 나이니 어쩌겠습니까? 어디를 궐로 삼고 마는 것은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남이공과 김신국은 차마 거들지 못했다.
그러나, 왕에게 이 정도 호기로움은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선택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 공은 내가 병조판서로 제수할 생각이에요.”
각 분야의 실무를 전담하는 육조의 판서는 실직 중에서도 실직이다. 비변사가 대두한 이래 의정부가 반쯤 중추원처럼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한 지금에는 더더욱 그렇다.
하물며 병조는 모든 군무를 관장하는 요직.
서인의 천하가 된 현재 축출되었던 북인계 인사에게 병권을 전담하는 병조판서 자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어떻게든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김신국은 엄연히 북인의 일파를 이끌었던 영수다. 더군다나 북인 잔당이라면 이미 다수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
그래서 두 사람은 입은 열었으되 흉금을 차마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좋다고 찬동하자니 민망하고 부끄러운 짓이요, 마다하자니 왕은 이미 감수했을 뻔한 소리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유능한 사람을 재주에 걸맞게 쓰겠다는데 왜들 놀라십니까.”
왕이 태연자약하게 못을 박으니, 김신국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하께서 성심을 굳히셨거늘 어찌 신하로서 이견을 발하겠습니까. 다만 신은, 어떠한 자리에서도 소임을 다 해낼 것이옵니다.”
제는 괜찮으니 낮은 자리에 제수하시라는 뜻이었으나, 과연 왕은 이미 성심을 굳힌 채였다.
“경이 그리 호언장담하니 내가 마음 같아서는 의정부에라도 자리를 만들고 싶지만, 그곳은 다들 제 몫을 하는 중이니 병판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왕은 자신이 도리어 아쉽다는 듯 말하고는, 익살맞은 얼굴로 덧붙였다.
“자신 없으십니까?”
“아니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경은 문안사에게 쓸데없는 말을 듣고 쓸데없는 소리나 한 책임을 어떻게 질지 궁리하세요.”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않던가?
김신국을 병조판서에 제수한 이유는 그가 꾀를 낸 장본인이기도 했으나, 그것을 감당해 낼 사람이기도 해서였다.
분야는 다르지만 원래 역사에서 김신국은 호조판서를 맡았다.
그리고 장장 14여 년 동안이나 연임하는데, 본래 판서직이 왕의 의향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교체되는 자리라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그만큼 인조 역시 김신국의 능력만은 믿었다는 뜻이다.
병조판서의 역할이 지휘나 전투가 아닌, 행정과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김신국에게 기대하는 역량은 그가 원래 역사에서도 맡았던 호조판서의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게 맡기시고.”
신하가 제 소임에 집중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왕의 역할이니까.
목욕하던 중 장관에 임명된 김신국은 황망한 기분을 다 떨쳐내지 못하였으나, 왕의 전적인 신뢰만은 더없이 망극할 따름이었다.
왕이 반발을 각오하고도 인사를 단행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믿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신하로서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분골쇄신하여 받들겠나이다.”
김신국의 납득에 왕은 욕탕에 기대고서 말했다.
“후금을 두고 많은 사람이 오랑캐가 그저 시운을 타고 잠깐 기세등등해진 것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대의 신하들은 조짐을 보고도 당쟁에만 급급하였으니 경회지가 시궁창으로 전락하고 근정전에 욕탕이 놓인 건 그 때문이지요. 운이 조금이라도 나빴다면 이곳에서 몸을 씻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왜인들이었을 겁니다.”
“…….”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미련을 거두지 못하고 당쟁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노적은 뭇 사람이 숭상하는 대명을 물리치고, 그 땅을 점거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만약 저들의 창끝이 남쪽을 향한다면 그때는 누가 아조를 오랑캐에게서 구원해 주겠습니까?”
직접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한양은 또 한 번 오랑캐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끝내는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숙이며 목숨을 구걸하였으니, 오랑캐들이 궁궐을 욕탕으로 전용하는 것 이상의 치욕을 역사에 남겼다.
“나는 이곳의 정취를 노적들과 공유할 생각이 없어요.”
이에 김신국이 발언했다.
“성상께서 부족한 뭇 신하들을 포용하시고 진실로 오랑캐를 경계하시니, 반드시 천지와 창생이 감응하여 일심으로 노적에 대응할 것이옵니다.”
왕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뜻을 전달했고, 각오를 받았다면, 남은 건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말소리도, 물소리도 잦아들자 근정전 터에는 바람 소리만이 적적하게 울렸다.
최근 문안사의 임무를 마쳤던 남이공은 무언가가 더 이어지기를 기대했다는 듯, 축 늘어진 왕을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러나 왕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고, 저 혼자 실직을 받고 앞서나간 김신국은 그런 남이공에게 고개만 저을 따름이었다.
“…….”
남이공은 퉁명스럽게 입술을 말았으나, 김신국은 말없이 욕탕에 늘어졌다.
그렇게 받아줄 사람이 없어지자 남이공도 포기하고서 눈을 감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김신국은 정식으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서인들은 예정대로 극렬하게 반발했다. 그 선두에는 강경파들을 이끄는 이귀가 있었다.
그러나 다수파를 이끄는 김류는 김신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폐주 시절 김신국이 평안감사를 지낼 때 김류가 그의 밑에서 일하며 인연이 생긴 탓이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인연을 떠나서도 김류는 당색 옅은 실무자의 기용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만은 제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김류였고, 서인 천하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서라도 인재는 필요하다 여겼으니까.
당여들은 영수의 이 같은 태도에 당황하고 반발하였으나 김류가 적극적으로 내부를 단속하면서 여론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그 결과, 김신국의 기용은 뒤집히지 않았다.
대북 잔당이 눈치껏 입을 닫고 있어도 다수를 대표하는 김류가 찬성하고, 결정적으로 왕이 완고하게 원했으니까.
소수를 이끄는 이귀 혼자 왕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로 김신국이 병조에서도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그에게 유감 많은 이귀가 병조의 하관들을 꽉 붙들고 있었으니까.
* * *
경운궁 즉조당.
서안 위아래, 좌우로 권자卷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각 처에서 장계를 끊임없이 보내오고 팔도의 식자들은 앞다투어 상소를 올려댄다. 덕분에 붓끝 마를 날이 없을 정도.
방심하는 순간 처리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니 이것들이 반 개혁파의 사주라도 받고서 이러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다.
왕족 대신 왕을 직접 노리기로 한 거지.
대신, 비수나 독을 쓴다면 나라가 뒤집힐 테니 과로사를 유도하는 거다.
그러니 이 사주를 받아 작성된 문서들은 모조리 아궁이에 처넣어 땔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옳았다.
“크윽! 근처에 아궁이만 있었어도!”
아궁이가 없다면 반칙을 쓸 수밖에 없다.
“세자에게 들라 하세요.”
“예에.”
문밖의 내시가 물러나고, 나는 서안에 다리를 올리고서 늘어졌다.
켜켜이 쌓인 권자들이 밀려나며 와르르 쏟아졌지만, 뭐, 상관없지. 내가 볼 것도 아니고.
세자는 한 식경쯤 지나 도착했다. 나는 서둘러 다리를 내리고서 아들을 맞이했다.
“아바마마.”
세자는 앳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서 예를 표해왔다.
녀석이 나와 같은 경운궁이 아니라, 서궐에서 따로 산다는 걸 생각하면 한 식경은 정말 부리나케 찾아온 것이다.
예를 올린 세자는 서안 주변에 켜켜이 쌓인 권자들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내가 고생한다는 걸 새삼 느꼈겠지.
세자야, 감탄하기 아직 이르단다.
“이리 와서 앉거라.”
널찍한 용상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니 세자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가 어찌 감히……. 아바마마의 자리에 앉겠습니까?”
“아들아, 아직 네가 배워야 할 게 많구나. 과연 이 장식이 의자를 용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냐?”
나는 등받이 가장자리의 용머리 장식을 가리켰다.
“아니옵니다.”
“와서 편하게 앉아라.”
고작 방석 하나 깔고서 이 무수한 권자들을 처리하려면 귀한 아들의 귀한 무릎이 다 상할 거다.
세자가 민망한 얼굴로 옆자리를 차지하자, 나는 세자의 익선관 너머로 뒷머리를 매만졌다.
“많이 의젓해졌구나.”
“망극하옵니다.”
“공부는 잘하고 있고?”
“예에.”
“성숙하다, 성숙해.”
내가 이 나이대에는 안 이랬거든. 학교 땡 치면 바로 돌아와서 컴퓨터 전원부터 켰지.
아유, 성숙하다.
나는 세자의 머리를 더 쓸어내리고서 말했다.
“하지만, 국사와 정무라 함은 옛 성인들의 족적만 살핀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공부란 삶에 임하는 태도와 나아갈 방향은 가르쳐 줄지언정 네 소임은 직접 부딪쳐 봐야만 익히고 깨칠 수 있지.”
세자는 슬쩍 권자를 돌아봤다.
아주 똑똑해.
자신이 불린 이유를 벌써 깨달았잖아?
나는 꼿꼿이 앉은 세자와 용상이 등받이 사이에 드러누워서 아들의 등판을 두들겼다.
“예행연습이다, 생각하고 이 못난 아비 대신에 고생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