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7화
“……참말입니까?”
영의정 이원익이 예상치 못한 소식을 가져왔다. 호재였다.
“어찌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신 역시 믿기지 않으나, 동지사冬至使가 허언할 이유는 없을 것이옵니다.”
올해 초 동지사로 떠났던 이헌영李顯英이 염초 수만 근을 가져왔다.
염초는 화약의 75%를 구성하는 주재료.
조선은 임란을 통해 조총의 무서움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신무기를 도입했으나, 정작 그 신무기를 운용케 할 화약의 주재료를 얻을 광산이 없고 기술이 부족해 비효율적으로 수급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가 후금과 대적하는 데 보태라며 귀환하는 사신에게 통 크게 수만 근의 염초를 붙여준 것이다.
“실로 감읍할 일이 아닙니까.”
“예에. 다음에 사신을 보낼 때 당부하여서, 거듭 사례함이 좋겠사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지금 명나라 황제는 15대인 희종熹宗 천계제天啓帝다.
13대인 고려 천자 만력제萬曆帝의 뒤를 이은, 14대 광종光宗 태창제泰昌帝가 재위 29일 만에 허무하게 붕어하면서 뒤를 이은 인물이지.
순식간에 제위가 손자에게로 넘어간지라 천계제의 나이도 그만큼 젊다.
올해로 열아홉인가, 그럴걸?
아직 즉위 초반이기도 하고.
“대국의 황제에게 물산이 부족하지는 않을 터이니, 보화보다는 사연이 있는 물품을 통하여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또 잘 꾸민 사담私談을 통해 친교를 쌓아둔다면, 장차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천계제가 어리고 경력이 짧다고 얕보는 게 아니다.
설령 황제가 사리분간을 똑바로 못 할지라도, 주변에 유능한 신하가 있다면 어느 정도 통제는 되게 마련이다.
단지 천계제는 통제가 안 되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만력제에게 냉대를 받았고, 또 기대하지 않았던 제위에 급작스레 오른 탓인지 천계제는 좀처럼 정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대패와 망치를 들고서 목공에 몰두했으며, 제법 조예마저 쌓았는지 궁전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한다.
다만, 사연은 동정하겠는데 망국 직전에 황제가 그러고 있으니 명나라 백성들은 불쌍하지.
그런데 백성들 불쌍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왜놈들과 대판 붙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쟁이야?
역사에게 양심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정도다.
단지 그럴 재주가 없으니 감수성이 과하게 풍부한 황제에게 환심을 사 국용에 보태려 할 뿐이다. 명나라야 어차피 망할 나라인데 조선이라도 잘 살아야지.
이원익은 허리를 숙이면서 답했다.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오래도록 친교를 유지한다면, 진실로 전하의 하교처럼 될 것이옵니다.”
“오래도록…….”
내가 단어 하나를 곱씹자 이원익이 허리를 숙인 그대로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천계제가 장수한다면 영의정 말대로 하는 게 옳은데, 천계제는 재위 7년 만에 붕어한다.
지금 기준으로는 한 5년 남았지.
천계제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것처럼 친교를 다지기는 어렵다.
“사세가 위태로우니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민망하지 않게만 합시다.”
“…….”
이원익은 이미 민망하다는 듯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내가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그게 나라 단위가 될 수도 있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우려할 법도 하다.
명나라가 조만간 망할 거라고 천기누설을 할 수도 없고.
설령 천기누설하더라도 믿지 못할 사람이 십중팔구, 아니, 십 중 십이다.
21세기로 치환하면 천조千兆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 서쪽의 공산 비적이 북아메리카를 차지한다는 소리니까.
말하는 놈도 미친놈이고, 믿는 놈도 미친놈이다.
그게 이 시대에서 천조天朝가 무너지고 야만 오랑캐들이 중원을 탈취하리라는 발언이 받을 취급이다.
절대로 말 못 하지.
명나라가 조만간 망할 예정이라 뒤돌아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실직고할 수 없어 대신 화제를 돌렸다.
“황제에게 사은할 선물로는 무엇이 좋겠습니까.”
“지난 임진년 때 이 땅에 잠든 천병天兵의 무구가 어떠하겠사옵니까?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수배한다면 구할 수는 있을 것이요, 이를 거두어서 명에 보낸다면 황제는 아조가 지난날의 은혜를 잊지 않았음을 알게 될 터이니 전하의 뜻에 부합합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동안 망실할 수 있으니 천병의 무구는 미리 수배해 둡시다.”
“예에.”
“또한, 실수로라도 가품을 보내어 망신당하지 않도록 수취에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이런 선물에 사연까지 잘 엮어서 보내면 감수성 풍부한 천계제는 두 눈에서 과즙을 팡팡 터뜨리겠지?
그러면 나는 천계제의 달콤한 눈물을 받아 마시리라.
“서사관書寫官과 제술관製述官은 누가 좋겠습니까?”
서사관은 글을 예쁘게 필사하는 사람이고, 제술관은 이름처럼 글을 짓는 사람이다.
같은 주제라도 전개와 필체에 따라서 주는 인상이 다르니 유능한 사람을 기용해야 했다.
나는 천계제의 눈물샘을 간지럽히기만 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걸 아주 쪽 빨아먹을 생각이다.
“제술관으로는 이수광李睟光이 유망합니다. 그의 명성이 사해까지 퍼져서 안남安南이나 유구琉球, 섬라暹羅에서도 이수광의 시문을 구한다고들 하는데, 과장이 없지는 않겠으나 그의 시문이 정평 난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옵니다.”
이원익의 추천을 긍정하듯 뭇 중신이 끄덕였다.
그런데 섬라는 진짜 의외네. 섬라곡국暹羅斛國, 또는 섬라혹국暹羅斛國이라 하는데 태국을 일컫는다.
조선 초기에 딱 두 번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뒤로는 왜구들이 설쳐서 연락이 끊겼지. 이 시점에서 언급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거기까지 명성이 퍼졌다는 건 이원익 말처럼 과장이 아닌가 싶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는 법. 그만큼 이수광이 글을 잘 쓴다는 거겠지.
제술관은 그렇다 치고.
“서사관은 누가 좋겠습니까?”
대답에서 생략된 부분을 재차 물어보니 이원익이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달필로는 오정吳靖이 유명한데 몇 달 전에 죽었으니 매우 애석합니다. 이수광이 승정원에 오래 몸을 담아서 글씨가 나쁘지 않으니, 그에게 함께 맡기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일단 응하는 대신 조선의 명필들을 떠올려봤다.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한석봉韓錫琫은……, 선조 말년에 죽었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는 유명한 시구를 남긴 달필 양사언楊士彦은 그보다 더 전에 죽었지.
추사체秋史體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아예 백 년도 더 뒤의 사람이다.
‘인재 가뭄인가?’
이원익이 언급한 오정吳靖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도 대체할 사람이 거론되지 않는 걸 보아 진짜 인재 가뭄인 모양이었다.
‘잠깐…….’
얼핏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유몽인柳夢寅?”
나의 언급에 이원익이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유몽인이 글을 잘 쓴다는 말은 들었으나, 명성이 초서草書에 국한되었고 필체가 가볍다는 평가가 있어 황제에게 보낼 글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아닌데?
유몽인이 초서를 가장 잘 쓰긴 했지만, 다른 필체에도 능숙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원익이 언급을 꺼린 이유야 뻔하다.
유몽인은 북인이거든.
본디 유몽인은 서인의 거두인 성혼成渾 밑에서 수학하였으나, 두 사람의 마음이 맞지 않아서 쫓겨났고 사이마저 틀어졌다.
유몽인의 당색이 달라진 건 그 때문이겠지.
나아가서 북인들이 성혼을 삭탈관직까지 하여서, 유몽인의 평판은 동인으로 치자면 스승인 이이를 비판하고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정여립과도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유몽인은 인조 치세 초기 무고를 당해 숙청됐다.
“나와서 춤을 추라는 것도 아니고, 성토하라는 것도 아니거늘, 부르지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일단 오라고 하세요.”
“……예에.”
되로 주고 말로 받겠다는 작전은 실행이 빠른 편이 좋다. 내가 천계제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천계제는 자신이 보낸 염초로 조선이 후금에 대항하기를 바랐겠지만, 지금 조선은 염초가 수만 근이 아니라 수십만 근이 있어도 후금과 대적할 상태가 아니다.
내부부터 추스르는 게 급선무지.
그 과정에는 옆구리에 박힌 가시를 뽑는 것도 포함된다.
천계제가 보낸 염초는 실질적으로 가도의 도적들을 퇴치하는 데 이용될 가능성이 컸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고.
“이헌영이 가져온 염초 절반은 평안도에 두어 급변을 대비하고, 나머지 절반은 군기시로 가져와 화약을 제조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에.”
나는 인경궁의 푸른색 지붕들을 떠올리고는 덧붙였다.
“폐조의 폐단이 있음에도 염초로 청기와나 구슬을 굽는다면 적만 환영할 일이니, 염초가 수송되는 과정에서 망실이나 누락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이 일은 우의정께서 전담해 주세요.”
우의정 조정이 모두의 시선 속에서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조정은 대북 인사라서 입지가 불안하니, 이번 일을 철두철미하게 감독할 거다.
의정 자리가 비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거든.
서북단인 의주를 통해 들어오는 염초의 수송을 한양에서 철두철미하게 감독할 수는 없으니, 늦지 않게 떠나야겠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일흔이 다 되어가는 우상에게는 부담스럽겠지만, 경이 아니고서야 달리 맡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중하게 여기시는 일을 맡게 되어 도리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담담하게 응하는 조정에서 고개를 끄덕여주고서, 나는 김신국을 바라보았다.
“병조판서?”
김신국은 한 발자국 나와 허리를 숙였다.
“하명하시옵소서.”
“화약에 여유가 생겼으니, 내가 일전에 익힌 화약의 새로운 보관법을 실험해 봐도 좋겠습니다.”
신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날아왔다.
왕이 잡기雜技라고 할 수밖에 없는 화약의 보관법 따위를 익혔다니 의아하겠지.
누군가 출처를 궁금해한다면 수입한 서적에서 얼핏 보았다,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아쉬운걸.
대신 김신국이 운을 띄웠다.
“새로운 보관법이라 하심은…….”
“화약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이유는 쉽게 습기를 머금고, 재료가 저절로 분리되기 때문이지요?”
화약이 습기에 약한 건 주재료인 염초가 수용성이고 흡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기에 노출되면 염초끼리 뭉쳐 버려, 화약이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화약이 저절로 분리되는 문제는 화약이 단일 화합물이 아니라 분말 형태의 재료들을 섞어놓은 혼합물인 탓이다.
각 재료의 비중이 다르니, 미세한 진동에도 층이 나뉘며 분리되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가 화약을 운용한 이래 족히 수백 년은 기술자들을 괴롭혀온 문제였으나, 실상 해법은 허무하리만치 단순했다.
“내게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옵니까?”
“재료들을 반죽하여서 한데 뭉친 다음, 작은 부스러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신하들의 절반은 그런 헛고생이 무슨 비책이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다른 절반은 황당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김신국은 후자에 속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화약은 젖으면 쓸 수 없사옵니다.”
“염초가 물에 녹기 때문이지요?”
“예에.”
“그러나, 염초가 물에 녹았다고 어딘가로 도망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습기 먹은 화약도 잘 건조하면 다시 쓸 수 있으니, 우려할 바가 아닙니다.”
친절한 설명에도 김신국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모든 화약을 다짜고짜 반죽해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나의 말이 옳다면 효용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처음에는 반 근의 화약을 덜어 실험해 보고, 결과가 좋다면 백 근을 덜어서 실험해 보며, 그래도 좋다면 수만 근 염초로 만든 화약을 모두 편하게 보관하면 됩니다.”
언제까지 고려 시대처럼 쌓아두기만 할 거야?
지금은 조선 시대잖아.
신세대처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