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48화
고작 반 근이라면…….
김신국은 기왕 왕이 제안했으니 부득불 못 해볼 건 없겠다 싶었다.
“덜어왔습니다.”
약장藥匠이 바가지에 화약을 담아오자, 김신국은 못내 민망해하면서도 말했다.
“이제 물을 섞어서 반죽해 보게.”
왕이 언급한 새로운 보관법은 어전만 아니라 군기시軍器寺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곳의 장인들은 군기軍器와 관련된 일이라면 염증부터 느낄 정도로 익숙했고, 특히 약장이라면 한평생 화약만 만지고 살았던 전문가였다.
이들은 화약을 뭉쳤다가 다시 빻는 행위가 화약 보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대개는 헛고생으로 치부했고, 또 다른 대개는 왕이 어디서 기괴한 술수를 익혀왔는지 뒤늦게 궁금해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왕이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라서, 군기시의 관리와 장인들은 혹여 하는 마음으로 현장에 모였다.
그리고 약장은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바가지에 물을 채웠다.
“솔직한 생각을 아뢰자면, 이게 잘 먹힐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번에 염초가 넉넉하게 들어온다니 실험해 보는 것이지.”
약장은 금세 시커멓게 변한 손으로 화약을 반죽했다.
많은 사람의 예상처럼 화약이 물맞은 소금처럼 녹아내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습기를 머금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번들거리는 화약의 반죽은, 불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구덩이에 처넣어도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 보였다.
대강 반죽을 이어나가던 약장은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는지 화약을 원형으로 곱게 빚어내고는 바가지에서 손을 덜었다.
“보기는 좋군.”
보기에만.
“이제 어떻게 할까요?”
“말려야지. 볕 잘 드는 곳에 놓아야지. 바싹 말라서 속까지 갈라지면…….”
김신국은 변변찮은 볼거리에 실망한 얼굴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때 다시 만나자고.”
* * *
김신국의 바람과 달리 화약은 건조조차 쉽지 않았다.
화약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장마철이었을 뿐.
하늘은 우중충하고 공기는 습하며, 여차하면 장대비가 종일 쏟아내리니 반죽이 볕 볼 일이 흔치가 않았다.
김신국은 뒤늦게 화약을 작은 덩어리들로, 기왕이면 잘 마르게 넓적한 형상으로 빚는 게 편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쪼개놓을까?’
김신국은 방석에 놓인 무광택의 검정 구슬을 쳐다보았다.
금일 역시 하늘에서 비를 쏟아내는 관계로, 실내에 들여놓은 참이었다. 그리고 잘 말리기 위해 근처에 화로도 놓아두었다.
위태로운 광경을 보며 반죽의 분쇄를 고심하던 김신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상태로 쪼개면 부스러기만 날리겠지.’
김신국은 검정 구슬을 굳이 쪼개지 않기로 하고서, 병조에서 가져온 수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귀의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그간 조정이 신경 쓰지 않는 사이 변진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변했다.
장부에 적힌 숫자만 본다면, 임진년 왜란을 정면으로 맞은 경상도의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북적이 지금 쳐들어온다면 조정은 당장 파천을 결행해야 하리라.
지면으로나마 변방의 사정을 알게 된 김신국은 이귀의 심리를 짐작했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파란을 불러올 터다. 응당, 이전부터 변진의 문제를 시정하고자 애쓴 이귀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지겠지.
그런데 그 끝을 보기도 전에 자신이 갑작스레 판서로 부임했다. 혹 공로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근심이 들었겠지.
‘하지만,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직책이 병조참의에 머무르고 있는 이귀다.
반정한 공로가 있으니 함부로 괄시하는 이는 없겠지만, 당상堂上 말석인 정삼품 관리의 의지가 나라 끄트머리마다 닿을 수 있을까. 왕의 전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행을 저질러 온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더욱이, 판서인 자신에게도 불청객이 찾아오지 않았던가.
왕이 어전에서 내놓은 수상한 비책으로 조정이 부산스러울 때였다. 오래전 얼굴만 얼핏 보았던 종친이 통기도 없이 방문하여서는, 연신 나랏일에 대한 운을 띄우려 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던지라 거듭 화제를 돌려 종친이 정확히 무엇을 거론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게 되었으나, 자신이 병조판서에 제수된 직후 이렇게 되었으니 일의 근본이 변진의 참담함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을 터였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병조참의가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김신국이 부담 주지 않고 이귀에게 협조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퍽!
느닷없는 파열음이 사랑방을 울렸고, 김신국은 화들짝 놀라 웅크렸다.
혹 화약 반죽이 폭발하는 게 아닌가 하였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반죽이 저 혼자 쩍 갈라졌을 뿐이었다.
십 년 감수한 김신국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죽을 거두어 살폈다.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 손가락이 다 들어갈 정도였고, 안쪽은 잘 말라 있었다.
이제 남은 절차는 잘게 분쇄하는 것뿐이었다.
* * *
김신국은 깨달았다.
비전문가가 화약을 다루었다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것을 며칠 전 식겁하면서 새삼스럽게 느꼈던 김신국은, 반죽의 분쇄를 약장에게 맡겼다.
그날 군기시의 마당은 비워졌고 약장은 홀로 남아서 반죽과 망치를 떠안았다.
그리고 김신국과 다른 사람들은 전각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외부인이 본다면 꼴불견이라 하겠으나, 언제 화약이 폭발해 누가 죽고 몇 명이 다쳤다는 일화가 셀 수 없이 많은 군기시였다.
훗날 제 이름 석 자를 폭발사고 기록과 함께 남기지 않으려면 체면 불고하고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칩니다?”
약장은 세상 아니꼬운 얼굴로 얼굴을 반쯤 내민 김신국을 쳐다보았다.
마치 손에 든 망치로 반죽이 아니라 상관의 면상을 찍어버릴 분위기였다.
“쳐, 쳐, 쳐.”
김신국은 종용과 함께 슬쩍 얼굴을 더 가렸고, 약장은 한숨을 내쉬며 반죽을 두드렸다.
톡
“그렇게 쳐서 되겠나?”
“…….”
톡!
툭
툭!
마치 갓난아기를 대하듯 세심했던 약장의 망치질에 감정이 실려갔다.
화약 반죽은 그저 검은 흙 반죽처럼 부스러지기만 했고, 그 광경에 반쯤 숨었던 군기시의 장인과 관리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은 아쉽기까지 한 분위기였고, 누군가는 약장이 들으면 서러울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었다.
“안 터지네?”
그 발언에 약장은 팔을 무릎에 걸쳐놓은 채 주변을 노려보았고, 아닌 밤중에 머리 깨지기 싫었던 구경꾼들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사소한 소란이 있은 뒤 약장은 다시 반죽을 분쇄해 나갔다. 이즈음 되어서는 관리와 장인들 모두 약장의 주변으로 다가와 가까이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약장은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빗질하듯 화약 파편을 걸러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부순 것 같은데, 더 잘게 부숴야 합니까?”
“전하께서는 완전히 가루로 만드는 것보다는 깨알 정도의 크기가 좋다고 하셨네. 채반에 걸러서 가루는 털어내고 작은 덩어리만 모아서 시험해 보세.”
“예.”
약장이 팔을 다시 무릎에 걸쳐두고서 관노를 쳐다보자, 관노가 눈치껏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화약 파편들을 골라낸 약장은 조총의 안과 화문火門을 채웠다. 시험사격이니 연환鉛丸은 물론 넣지 않았다.
용두에 화승이 걸리고 약장이 자세를 취하자 모여들었던 관리와 장인들은 각자가 숨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
약장은 총구를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팡!
시원한 폭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총성이 생소할 군기시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약장은 새삼스럽게 숨을 삼켰고, 멀리서 구경하던 관리와 다른 장인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량을 넣은 게 맞는가?”
“예에……. 2돈, 정확히 맞춰서 넣었습니다.”
약장은 정량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투였으나, 정량이 맞았고 구경꾼들은 그저 당혹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약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처리법이 보관에만 용이한 게 아니라, 성능까지 증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전자의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기정사실로 치부한 약장이었다.
“전하께서는 화약의 성능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네.”
“일부러 아니 하셨겠지요.”
“성능이 좋아지는데 굳이 말씀을 아낄 필요가 있으셨겠는가?”
“보관만으로도 모두가 긴가민가하였는데, 성능까지 좋아진다고 하셨다면 믿으셨겠습니까.”
확실하게 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 전하께 여쭤보지. 일단 몇 번 더 사격해 보세. 단순히 이번이 이상했던 것일 수 있으니.”
“예.”
시험사격이 거듭 이어졌으나 화약의 성능은 일관되게 좋았다.
약장은 후끈하게 달아오른 조총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어쩌면 화기별로 화약의 정량을 다시 정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 * *
“들라 하세요.”
윤허와 함께 병조판서 김신국이 들어섰다.
탄 냄새가 나는 걸 보아, 가공한 화약을 시험해 본 모양이지?
과연 김신국은 예상대로 말했다.
“조금 전, 하교하신 방식으로 가공한 화약의 시험을 마쳤사옵니다.”
“어땠습니까?”
“이상은 없었사옵니다.”
“그렇다면 보관은 잘 되는지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예.”
김신국은 짧게 답한 뒤 숨을 들이쉬었다.
“하온데, 의아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의아한 일이요?”
“가공을 마친 화약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사옵니다.”
“아.”
그렇겠지.
21세기에서도 화약은 알갱이 형태로 가공해서 쓴다. 단순히 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분말은 공기와의 접촉면이 좁다. 컵에 담긴 물을 생각하면 쉽다. 더욱이 장약하는 과정에서 화약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러니 연소가 느리고 불완전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알갱이 형태로 가공한 화약은 쌓아도 내부에 무수한 공간이 생긴다. 산소와의 접촉면이 늘어나니, 그만큼 연소가 빠르고 깔끔하게 이루어진다. 그만큼 위력도 올라가고.
“전혀 놀라지 않으시니, 알고 계셨던 듯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단순한 작업으로 위력까지 올라간다고는,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김신국은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벼워진 어조로 물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가공으로 화약의 성능이 증대될 것을 알고 계셨사옵니까?”
어전에서도 이 같은 질문이 나올 것 같아, 어떤 책에서 봤다고 둘러댈 생각이었으나 지금 김신국의 기세를 보니 반드시 출처의 실체를 확인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미래에서 익혔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누가 이 가공법을 최초로 개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게 되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고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사고실험이라니요?”
나는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으로 실험을 해봤다는 겁니다.”
김신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못할 게 어딨습니까. 실제로 실험하기 전에 결과를 상상한다면, 그게 사고실험이지요. 내가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니 다행입니다.”
“예……. 예에.”
김신국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했지만, 못 믿으면 어쩔 텐가?
현실이 이렇다는데.
“화약에 섞을 물의 비율이나, 건조하기 적합한 반죽의 형상을 찾아내어 책으로 만들어놓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더라도 기술이 실전되거나 변조되는 일 없이 후대에서도 금문으로 삼아 지켜 나가겠지요.”
“……예.”
의문을 해소한 김신국은 예를 표한 뒤 터덜터덜 어전에서 물러났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이게 최선이다. 내가 보장한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수입한 책에서 봤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실체가 없어도 아주 옛날에 얼핏 보았으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먼 훗날을 생각했다.
21세기 가서 중국이 너희들 왕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고 이 가공법의 원조를 주장하면 속 터지지.
기왕 미래의 기술을 가져왔다면 이 나라의 업적으로 만드는 게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