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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49화 (49/380)

인조, 명군이 되다 49화

흥안군 이제李瑅는 모래라도 씹은 심정이었다.

이복형 인성군에 이어, 최근 병조판서로 제수된 김신국까지 방문했으나 두 사람 모두 말을 제대로 섞어주지 않은 탓이다.

‘다들 언제부터 금상의 충신이었다고 이렇게 쉬쉬한단 말이냐!’

인성군은 폐모론에 찬동했고, 김신국은 북인계 인사였다. 이를 누군가 걸고넘어진다면 금방이라도 죽을 신세들이거늘 죄 아무런 생각이 없다. 금상이 과시하는 얄팍한 관용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정녕 왕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과 담을 쌓은 것이라면, 만용이었다. 왕이 누군가를 쳐내야 할 때가 온다면 가장 만만한 저들이 우선순위가 될 텐데 말이다!

이번에 방문할 사람은 앞선 둘보다 현명하기를 바랐다. 제 목에 이미 칼이 들어왔으며, 살아남을 방법은 금왕의 위세를 미리 꺾어두는 것뿐임을 알 장도로.

“퉤!”

흥안군은 길가에 가래를 뱉어내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막상 하잘것없는 행인들과 같은 길을 거닐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종친 신분에 이 짓거리도 자존심 상하는데, 벌써 세 번째 아닌가.

“명령만 해놓으면 다 되는 줄 아는군, 제기랄……. 제깟 놈들도 별수 없어서 닦달만 하는 주제에.”

흥안군은 과거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을 떠올렸다.

일면식도 없는 종자가 불쑥 찾아와 사랑방 한구석을 차지하더니 감언이설을 늘어놓지 않겠는가. 낯빛마저 희희낙락하였으니 실로 교언영색 문자 그대로였으나 간사한 본의를 감추지는 못했다.

떠들어댄 말은 많았으나 본론만 추리면 알량한 푼돈으로 자신을 매수해 장기 말로 부리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망언을 낯짝 뻔뻔히 들고 잘도 지껄이는 걸 보아 배후에 세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잡것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모인들 감히 종친을 능멸한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심 매우 불쾌하였지만, 흥안군은 감정을 뒤로하고 불청객과 손을 잡았다.

그들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만큼 자신 역시 그들을 이용하면 되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서10남이라는 궁색한 팔자를 비관해 온 그다.

하지만, 이 일로 권력자들의 약점을 잡는다면 막후에서는 왕 못지않은 힘을 가질 수 있으리라. 자신이 입만 벙긋하여도 목이 날아갈 텐데 따르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리고 거기서 운이 조금만 더 따라준다면…….

‘막후에서만이 아니라, 양지에서도 왕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야.’

잡것들의 하찮은 수작에 어울려 주는 건 오직 그 때문이었다.

“……흐흠.”

원대한 야망에 이어서 낙관적인 미래를 그려낸 흥안군은 기분 좋은 얼굴로 콧바람을 흘렸다.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상상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인지라, 흥안군이 문득 현실을 의식했을 때는 어느새 목적지 앞이었다.

“이리 오너라!”

흥안군의 준엄한 부름에 대문이 끼익,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노복은 불청객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는 당황했다.

“혹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감히, 라는 단어를 전제한 듯한 흥안군의 추궁에 노복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흥안군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계단에 올라서자 노복은 질겁한 얼굴로 물러났다.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흥안군은 기분이 좋았다.

그것이 세인들이 마땅히 자신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였으니까.

솟을대문의 문턱마저 넘어선 흥안군은 한때 노복이 자신을 맞이했던 자리에 서서, 비켜선 노복에게 물었다.

“집주인은 안에 있겠지?”

“예에.”

노복은 대답과 함께 슬쩍 사랑채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이 사랑채에 있다고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주인이 그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어 도와주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사랑채의 방문들은 꾹 닫혀 있었다. 노복은 더욱 깊게 허리를 숙였다.

“네 주인과 인사를 나눠야겠다. 너는 술이나 한 병 가져오거라.”

친히 행차한 탓에 목이 칼칼하던 참이었다.

“예, 예에.”

노복은 그저 받들 수밖에 없었다. 흥안군은 제가 무소불위의 신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외인이 남의 집 마당에 쳐들어 와 남의 집 종을 부려대니 이쯤 되어서는 집주인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왈칵!

사랑방의 한 방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집주인은 행패를 부려대는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흥안군. 선왕의 서10남.

왕자는 적서를 불문하고 품계를 능가하니 원칙적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영의정이라도 먼저 허리를 숙여야 했다.

이를 집주인 유몽인이라고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는 껄끄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안군 대감 아니십니까.”

집주인의 냉대에 흥안군은 콧대를 치켜들고 비소를 머금었다.

퇴물이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유몽인은 흥안군이 이전에 본 두 사람보다 더 위태로운 처지였다. 당색이 북인인데 북인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으니까. 의지할 데 없이 무주공산에 덩그러니 던져진 한 점 고기 같은 신세다.

그러니 까탈스럽게 굴어봐야 흥안군 눈에는 가소롭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런 처지라면, 자신이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그런 태도는 좋지 않소이다, 서사관. 내가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안다면 후회할 테니까.”

“…….”

“이렇게 손님을 계속 세워둘 거요?”

유몽인이 문지방에서 물러나자 흥안군은 때마침 노복이 바친 술병을 낚아채고서 섬돌에 올랐다.

그렇게 병나발을 불며 방으로 들어서는 흥안군의 모습은 영락없이 왈패라는 평판 그대로였다.

“얼마나 대단한 소식을 가져오셨기에 이렇게 친히 걸음하셨습니까?”

흥안군은 유몽인이 막 물러선 상석에 풀썩 주저앉고서 답했다.

“도봉산에 틀어박혀 살던 사람이 갑자기 중임을 맡게 되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지 않겠소?”

“…….”

“내가 글 쓰는 재주만은 그대 같지 않아서 서사관 일에는 조언하기 어렵지만, 처신에 대해서라면 드릴 말이 있소이다. 요즈음 들어 무수한 사람이 같은 의견을 품게 되었으나 금상이 워낙 강경하여서 공론을 발하지 못한 채 뭇 옳은 선비와 식자들이 속으로 앓기만 한 지 오래요.”

“그것이 이 사람의 처신과 무슨 관련이랍니까?”

“그대가 간언을 올린다면, 공론이 한마음으로 지지할 테니 예전의 명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거요.”

이이첨의 추천을 받아 종이품 예문관 제학을 지냈던 유몽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환국과 함께 몰락했고, 가까스로 목숨만은 건졌다가 근자에 능력만은 인정받아 서사관으로 제수된 참이었다.

그렇게 다시 출사하게 되었으니 조정에서의 대우는 천지 차이.

흥안군은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으로 여겼으나 유몽인은 냉담했다.

“이 나라의 주인과 대적해서 말입니까?”

“대적이라니!”

유몽인이 여전한 태도로 예리하게 지적하자 흥안군의 언성이 올라갔다.

“나는 그대에게 불경을 권하는 게 아니요!”

그저 신경질에 불과한 반응이었으나, 유몽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어째서 정치와는 거리를 둬야 할 종친이 이렇게 나서서 신하를 포섭하려 드는가?

분명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먼저 포섭되었기 때문이겠지.

직접 나서지 못하고 또 다른 화살받이를 구하는 이유는 평판이 너무 나쁜 탓이리라. 평소 행실이 이처럼 극악하니 어떤 주장을 하건 반대편에 힘이 실릴 테니까.

그러니, 이어지는 말에 유몽인은 어처구니없을 따름이었다.

“나는 서사관이 올바르게 선택하기를 바랄 뿐이요.”

“단지 그뿐입니까?”

“당연히 그뿐이오.”

흥안군은 문득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제가 말하고도 우스웠으니까. 그새 술병을 비우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흥안군은, 여전히 떼를 쓰며 버티는 유몽인이 가소롭고도 건방지게 느껴졌다.

“아니지, 아니야……. 진솔하게 말씀드리리다. 서사관이 간언을 올리지 않겠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당신 같은 고집불통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망신당했는지 아시오?”

유몽인으로서는 당연히 모를 노릇이었다. 다만 이번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흥안군의 포섭시도가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 일이 공론화된다면 흥안군이 다시는 큰소리를 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대감, 내 집에서 당장 꺼지시오.”

* * *

한양, 야심한 시각.

인정이 울리고 사위 고요한데 한 행인이 발소리 없이 거리를 거닐었다.

그가 멈춰선 곳은 초가들 사이로 희게 회칠한 벽돌담을 드높게 세운 저택이었다. 해가 떨어져서 망정이지, 백주였다면 집주인이 강박적으로 관리한 흰 담에 눈이 부셨으리라. 그러나 오밤중인 지금에는 그저 초가들을 거느리는 성채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행인은 언덕을 오르는 기분으로 십수 개 계단을 타고 대문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검지를 말아 미약한 힘으로 방문을 알리니, 문이 기다렸다는 듯 개방됐다.

행인은 문지기인 노복을 마주하였으나 피차에 말은 오가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은 물러섰으며, 다른 사람은 나아가 불 켜진 사랑방에 이를 따름이었다.

그곳에서도 행인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집주인은 늦게까지 얌전히 대기하는 게 쉽지 않다는 듯, 술병과 빈 접시가 여럿 놓인 반상을 낀 채였다.

“드디어 오셨군! 얼굴 보기가 참으로 힘들어?”

“이때 오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행인이 도포자락을 늘어뜨리며 방석을 차지하자, 집주인 흥안군은 태연하게 술병을 내밀었다. 천성에 어울리지 않게 취기로 나눔을 베푼 것이었으나 손님 유응형柳應泂은 손을 저어 마다했다.

그가 야심한 시각에 종친을 찾아온 건 고작 술이나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종친의 신분으로 손님을 기다리다가 흔치 않은 제안마저 거절당한 흥안군은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건방지기는.”

“설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흥안군은 내밀었던 술병을 제 입술로 거두고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똑같지.”

짧지 않은 정적이 있었고, 그동안 수 차례를 거듭하며 발언을 교정한 유응형이 인내심이 바닥나 따졌다.

“또, 실패하셨습니까?”

“이봐!”

흥안군은 손가락 대신 술병으로 삿대질하며 되려 따졌다.

“그대들이 처음부터 설득이 될 만한 사람을 지목했어야지, 왜 나를 추궁하려 들어?!”

“세 사람 모두 설득의 여지는 충분했습니다. 대감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

“이렇게 거듭 노출될수록 대감과 저만 위험해집니다. 우리가 하려는 게 금왕에게 목숨을 헌납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알았어! 다음에는 똑바로 하지!”

“다음은 없습니다.”

세 번째 시도에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따지자면 이번이 네 번째나 마찬가지였다. 흥안군 이전에는 박성장이 인성군을 방문했으니까. 그리고 박성장은 사라졌다.

만약 박성장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망친 것이라면 그만이겠으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리라. 박성장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한갓 금은에 목숨을 걸지도 않았을 테니까.

유응형은 왕의 추적이 턱 아래까지 쫓아온 기분이었다. 그가 흥안군의 처소를 또 방문한 건 무능을 더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럼…….”

“최후의 대안이 있습니다.”

“대안? 그런 게 있었으면 미리 알려줬어야지!”

“말 그대로 최후의 대안입니다. 대감께서는 세 사람이 평생 이번 일에 침묵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 중 하나만 입을 벙긋하여도, 다른 두 사람의 증언이 더해져 흥안군의 목을 옥죄게 되리라.

물론 유응형이 걱정하는 건 흥안군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가 죽기 전 어떤 말을 늘어놓을지가 신경 쓰일 뿐.

“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지요.”

마침 세 사람 모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 안에 한양이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대감께서 거론될 수도 있지만, 절대 당황하지 마시고 뚝 잡아떼십시오. 곧 죽을 사람들이 살려고 발악하는 것으로 비칠 테고, 금세 조용해질 겁니다.”

“내,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잖나!”

“세 사람이 먼저 선수친다면 반격의 기회도 없이 당합니다. 대감께서는 그편이 좋으십니까?”

“…….”

“대감이 위험해지면 저 역시 위험해집니다. 이 사람 혼자 이롭기 위해서 하려는 일이 아닙니다.”

유응형은 자신이 가명을 알려주었으며, 어지간해선 한양을 나설 수 없는 종친 신세와 달리 언제든 탈출 가능하다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가 보겠습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유응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안위가 위태로워진 흥안군은 진즉 술이 깼지만, 붙잡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늦게 흠칫하여 손을 뻗었으나 이미 유응형은 방문을 넘어선 후였다.

착잡해진 흥안군은 지금이라도 쫓아가 붙잡을까, 하였으나 자존심과 취기가 허락하지 않았다.

체통을 잃어가며 더 따진들 무엇이 달라질까? 소란이 벌어지면 눈과 귀를 막고 여차하면 잡아떼기만 하면 된다지 않던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면서도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던지라 흥안군은 방문을 열었다. 노복을 불러 술 심부름을 시킬 요량이었다.

“대감…….”

노복은 이미 방문 앞에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내가 신기가 생겼는지 너를 부르려니까 알아서 오는구나. 가서 술병 몇 개 더 가져오거라. 안주도 새로 내오고.”

“저어…….”

노복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가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흥안군과는 일면식도 없는 자였다.

아까 그놈과 같은 패거리인가.

너무나도 당당히 종친의 저택에 쳐들어오니 흥안군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였군.”

“뭐? 뭔…….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한평생 너, 라고는 선왕 앞을 제외하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흥안군이었다.

그러니 흥안군은 불청객의 무례가 황당하다 못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으나, 사내에게는 부친의 원수가 뻔뻔하게 잡아떼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흥안군이 당장 멍석을 말라고 명한 찰나.

스캉!

사내는 환도를 뽑아 들었다. 흥안군과 노복은 경악하였으나 충격이 잦아들 새도 없이 사내는 아닌 밤중의 칼질로 노복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도포 자락이 채 내려앉기도 전에 사랑방으로 뛰어들었다.

우당탕!

사내의 난입에 흥안군은 집기를 밀치며 물러섰다.

“무슨 짓이냐!”

그것이 흥안군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비록 죽기 전까지 갖은 수작은 다 부렸다지만, 이괄의 죽음과는 추호도 관계가 없었던지라 흥안군은 의식이 멀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억울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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