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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0화 (50/380)

인조, 명군이 되다 50화

폐허가 놀이의 장소로 전락하기 전, 폐허를 찾을 이유라면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따금 박수나 무당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폐허의 방문자는 겁 없는 장사꾼이거나 절박한 빈민이게 마련이었다.

여기서 예외인 폐허가 있으니, 바로 경복궁이다.

일전 경복궁의 방문자는 왕이었다. 그는 남들 모르게 남이공과 김신국을 벌줄 장소가 필요했고, 수도인 한양에서 그것이 가능한 장소는 오직 깊은 산속과 경복궁뿐이었다.

어쩌면 왕은 녹음 속에서 노신들을 벌주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일일이 주시당하는 왕이 사사롭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는 후자밖에 없었다.

왕이 재차 경복궁을 방문한 건 이 때문이었다.

뒤이어 한성부 판윤이 동행과 함께 경복궁에 이르렀고, 일행은 비린내 풍기는 연못과 그을린 기둥들 사이에서 예를 표했다.

“전하.”

늦은 밤이었다.

구굉의 인사에 왕은 친히 나아가 고생한 외숙을 환대했다. 판윤은 가슴에 용배가 닿자 고개를 숙여 망극함을 드러냈다. 이어서 왕은 일행 너머로 포박된 사내를 보았다.

“저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은 사내에게 다가가 안대를 벗겼다. 손톱이 콧등을 지나가며 피부를 벗겼고, 스며 나온 진물이 번들거렸지만, 사내는 상처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충혈된 두 눈으로 용안을 빤히 마주할 뿐이었다. 확장된 두 동공에는 불을 뒤로한 인영이 비쳤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유응형이라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용강龍岡에서 현령직을 지냈지요.”

왕은 창백하게 굳은 낯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떻게, 외숙께서는 잘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현령 이전에는 숙천부사를 지냈습니다.”

당상관 바로 아래인 종삼품의 관직.

구굉은 곧장 덧붙였다.

“고작 달포쯤 지냈을 뿐입니다만.”

“달포라면 임지를 왕복만 해도 끝나겠습니다. 그새 대단한 사고라도 쳤단 말입니까?”

“평가가 안 좋았습니다. 부임한 직후 비변사의 건의로 용강현령과 자리가 바뀌었지요.”

이례적인 사건인지라 나름 명성을 얻었던 유응형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사직했겠으나, 유응형은 철판을 까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가 오늘날 신세가 된 건 현령으로 전락하고도 학정을 일삼은 탓이었다.

“왜 이딴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지 잘 알겠습니다.”

“어디서 우두머리나 할 법한 자는 아니옵니다. 어수룩한 놈이 자기보다 더 어수룩한 놈들을 속이고 다녔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필요한 정보만 빼내고 조용히 없애야지요. 인성군과 병조판서, 서사관 모두 위태로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논란이 벌어지면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꼭 세 사람 신세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종친이 살해되었으니 낮이 되면 무척 시끄러워질 텐데, 굳이 지체할 게 있겠습니까.”

구굉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유응형의 흘러내린 안대를 다시 씌웠다.

* * *

조선의 주인과 한양의 관리가 옛 시절 궁궐에서 면담하는 동안, 밤새 칼부림이 일어난 저택에서는 볼일을 마친 사내가 대문을 나섰다.

사내에게 익숙한 경험은 아니었는지, 그는 지친 얼굴로 이마를 닦아냈다. 소매를 따라서 땀 대신 검붉은 자국이 남았다.

뒤늦게 자각한 사내는 속으로 탄식하고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깜짝 놀라서 주저앉았다.

거리에서 한 노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기실 사내의 손에 칼을 들려준 장본인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요?”

이전이 거리의 좌우를 확인하고서 묻자 박홍구가 일렀다.

“자네도 바보가 아닌 한에야 깨닫는 게 있겠지.”

설령 깨달은 게 없더라도, 이만하면 뒤 구린 내막이 있음을 시인한 셈이니 이전은 자연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요?”

“그렇더라도 자네가 어쩔 텐가.”

이전은 안색을 굳히며 환도를 들이밀었다. 막 종친마저 베었는데, 좌의정이라고 베지 못하겠는가.

“한번 보시겠소?”

“탈출에 실패하고 머리만 남아 성문에 걸리는 것을 말인가?”

종친에게 들어간 칼이 의정대신이라고 못 들어갈 리 없건만 박홍구는 물러나지 않았다. 고작 날붙이 하나에 질겁할 정도로 유약하게 살지도 않았으나, 목숨의 위협이라면 질릴 만치 겪어보았으니까.

환국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위협은 애송이의 장난에 불과했다. 이전은 가벼운 부채질에 놀아나 흥안군을 베었으니 과장된 평가도 아니었다.

박홍구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여유롭게 상대하니 이전도 칼끝을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대감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으니, 지금은 대감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차례요!”

겉으로는 부친의 복수를 표방했으나 실상 제 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나선 이전이다. 살인한 벌을 받아야 한다면 부친을 독살한 구제 불능의 패륜아가 되느니 아버지를 대신해 복수한 편이 가망 있으니까.

손에 진짜 피를 묻히고도 생존의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은 이전이다. 꾐에 넘어가 칼은 휘둘렀으나, 부친을 독살한 것과 종친을 주살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형을 받을 일인지 긴가민가하였으니까.

최선은 한양을 탈출해 잠적하는 것이었다.

“나가는 문을 알려주시오!”

“어렵지 않지. 창의문을 열어두었으니 그곳으로 빠져나가게. 사람이 지키고 있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이전은 발을 뗄 수 없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건 좋았지만, 다 알고 미리 준비하였다니 참으로 수상했다.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제가 박홍구였어도 자신의 입을 막아 차도살인을 깔끔하게 마무리했을 터다.

그런 속내가 들리기라도 한 양 박홍구가 말했다.

“나를 의심한다고 다른 길이 생기는 건 아니잖나?”

실로 그런지라 이전은 어렵사리 발을 옮겼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고, 조금씩 현장에서 멀어졌으나 고개는 박홍구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러다 어둠 너머로 사람의 안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이전은 달음박질하여 사라졌다.

그 광경을 마지막까지 주시한 박홍구는 옅게 한숨 쉬었다.

* * *

도망자가 창의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가는 동안 경복궁에서는 때아닌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본디 폐허가 된 채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경복궁에는 이따금 북악산 등에서 내려온 짐승이 활보하곤 했으나, 지금 울부짖는 짐승의 출처는 야산이 아니었다.

반 개혁의 행동대장 노릇을 한 유응형은 구굉의 바람과 달리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그의 품성을 생각해 보면 누가 목숨을 걸고 이자와 신상을 공유할까, 하는 합리적인 추측은 들었다.

그러나 추측의 합리성이야 어떻건, 구굉은 왕업에 훼방을 놓는 자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이 땅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분별하는 기능을 잃고 실정만을 일삼았던 폐주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왕은 성군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알량한 이익을 위해 불충하는 적신들 때문에 대업이 지체하여서 되겠는가?

유응형의 주둥이에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뽑아내어 이참에 삭초제근하리라 다짐하였던 구굉으로서는 썩 납득하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주, 죽여주시오……. 아는 건 다 말하였다지 않소?!”

유응형이 애걸했고, 그의 어깨를 붙든 위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아도 더 고신拷訊한들 유응형이 쓸 만한 정보를 토설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저 못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불과할 뿐. 안 좋은 의미에서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올 사람이었다.

수하마저 이렇게 반응하니 구굉도 더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유응형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구굉은 위사들을 해산시키고 경덕궁으로 향했다.

그 내부 깊숙한 곳에서 왕의 처소인 즉조당은 새벽 별 아래에도 밝았다. 본래 제때 잠들기 어려운 왕의 일정에 야간의 업무마저 끼어들었으니 더더욱 수고할 수밖에 없으리라.

반하여, 썩 만족스럽지 못한 성과를 낸 구굉은 민망한 얼굴로 어전에 이르렀다.

“유응형이 거론한 인물은 정주목사 이신李愼과 구성부사 이윤서李允緖였사옵니다.”

각기 목사와 부사로 품계는 높지만, 이신은 남의 첩을 빼앗아 임지로 데려간 머저리였고 이윤서는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한 사람이었다.

각기 탐욕과 무능에 가리어 역사에 오명 외에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허깨비는 아니라는 듯 그늘에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았어요, 판윤.”

왕은 치하와 함께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구굉은 망극하다는 듯, 하나 집어 들고는 허리 숙였다.

* * *

다음 날 새벽.

한여름답지 않게 시원했던지라 격무에 시달렸던 몸이 가벼워졌다.

아니면, 간밤에 앓던 이를 하나 뽑았기 때문일까?

볕 들지 않는 곳을 쏘다니며 곡식 파먹는 쥐의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듯, 최근 한양에도 나라의 내실을 갉아먹으려 애쓰는 인간이 몇 있었는데 며칠 사이 굵직한 놈을 하나 잡아냈다.

비록 쥐의 소굴을 알아내어 일망타진하는 통쾌함은 없었으나, 이만해도 어디인가?

이괄을 숙청할 때부터 소매에 감춰둔 비수로 같잖게 설치던 종친도 처단하였으니 이만하면 몸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입맛이 돌아 기꺼운 마음으로 조수라를 들고 약식 조회인 상참을 짧게 가진 뒤, 곧장 영의정 이원익과 박홍구를 인견했다.

“부르셨사옵니까.”

“그간 한양에서 수상쩍은 일이 많이 벌어졌지요?”

이원익이 무언으로 긍정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정주목사는 행실이 나쁘니 구실을 잡아 유배 보내고, 구성부사 이윤서는 무능하니 파직하겠습니다.”

또 수작을 부려 더 끌려 나오는 놈이 없나 캐볼 수도 있겠으나, 이제는 자중하는 게 좋았다.

한양의 긴장도도 한계에 다다랐으니까.

어사로 파견되었던 사람이 수도에서 독살당하고 그의 아들은 조사를 받던 중 탈옥해 종친을 살해했다.

당쟁과 엮이지 않아 망정이지 절대 작은 혼란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당상관급인 목사와 부사까지 또 어떻게 하려다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잃을 각오까지 할 수는 없잖은가?

이원익에게는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던지라, 그는 곧장 받드는 대신 박홍구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행차할 일이 있었던 박홍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전이 일일이 사정을 늘어놓을 장소가 아니기도 했지만, 애초에 떠들어도 될 만한 내막은 아니었다.

그렇게 박홍구가 퇴궐 직후 들어올 영의정의 추궁을 어떻게 면피해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좌의정에게서 수긍을 받아낸 이원익은 썩 개운치는 못한 심정으로 답했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러나, 이원익도 이윤서와 이신을 부득불 현직에 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왕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하나는 무능했고 다른 하나는 행실이 나빴으니까. 되돌아본다면 어떻게 두 사람이 각기 부사와 목사에 제수되어 오늘날까지도 공임公任을 맡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만 고작 그뿐인 구성부사와 정주목사가 왕에게 찍혔다는 것이 의외일 따름이었다. 간밤에 두 사람을 평가한 평안감사의 장계라도 들어온 것일까?

이원익이 속으로 수소문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 왕이 한 마디로 상념을 깨뜨렸다.

“양전 사업은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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