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51화 (51/380)

인조, 명군이 되다 51화

환국과 함께 대북은 몰락했다.

극형을 받은 건 소수였으나 한때 팔도를 주름잡았던 이들이다. 부와 그 원천인 권력은 대북 당여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부도 권력도 없이 몸뚱이만 남았을 따름이니, 남들 눈에는 몰라도 저들이 보기에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신세였다.

이는 대북 원로인 좌찬성 이상의를 부친으로 둔 이지완도 마찬가지였다.

환국과 함께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린 이지완이 처음 생각했던 것은 도피였다.

가시방석이 되어버린 한양에서 나와, 과거의 자신과는 동명이인이 되어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 망신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사림士林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오늘날 북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자들 모두 과거 중앙에서 축출되어 낙향한 선비들의 후예이지 않은가.

하지만, 소망은 소망으로 끝났다.

이상의는 가문의 재건과 함께 한양에서 재기를 꿈꿨으니까. 대를 이어갈 아들이 벽지로 숨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하여 이지완은 낙향하지도 못하고서 방탕한 나날만을 보냈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파락호와 같은 삶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지완의 집안은 환국 때 이미 파락하였지만.

그리고 현재 이지완은 부친의 의사에 따라 양전어사로서 강원도에 있었다. 정확히는 강릉부와 함께 본도의 이름을 구성하는 원주목으로, 강원도를 총괄하는 감영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이지완의 역할은 양전어사로 본읍 수령을 감시 겸 보좌하여 양전을 차질없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도 말미에 이른 지금, 파직될 사람은 파직되고 빈자리에는 새로운 수령들이 임명되면서 양전어사의 역할도 달라졌다.

“선혜법이란 납공 대신 보유한 농지에 따라 공물작미만 바치는 제도일세.”

조세를 수취함은 국용을 충당해 나라를 존치하는 중대사이니, 세법은 곧 대법大法이다.

그런데 웃전끼리 세금은 앞으로 이렇게 거둔다, 결의하고 끝낸다면 말단에서는 얼마나 큰 혼란이 벌어지겠는가.

이러한 취지로 조정에서는 양전어사들을 부려 신법新法의 시행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좋은 겁니까?”

난데없이 소집된 농민들이야 그저 의아할 따름.

이에 이지완은 제 몫을 해나갔다.

“공납은 해마다 나라에서 정해주는데 불산공물不産貢物, 그러니까 고을에서 나지 않는 공물도 때로는 청구하여서 나라와 백성 모두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네. 선혜법이란 이런 건 다 때려 치우고 쌀만 받겠다는 뜻이야.”

“보리나 수수는 안 되겠습니까요?”

“나라에서는 쌀로만 수취하기로 하였네.”

이지완의 단호한 대답에 농민 여럿이 투덜거렸다.

따지자면 논 없는 사람에게는 쌀 역시 불산공물이라, 어디서든 잘 나는 잡곡으로 세를 치르면 피차 덜 곤란하자는 신법의 취지에 더 부합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리하면 나라가 대신 곤란해진다. 잡곡은 부피 대비 가치가 낮으며 종류 역시 다양하여 운송과 보관이 어렵다. 수취를 쌀로 일원화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라의 사정이야 농민들로선 공감하기 어렵고, 공감할 이유도 없는지라 이지완은 조정을 대신해 농민들을 설득하는 대신 능숙하게 대처했다.

“웃전들이 그렇게 법을 제정하였으니, 내게 항의하여도 달라질 건 없네. 혹 수령을 잘 설득한다면 이 고을 안에서는 편의를 봐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귀찮을 문답을 모조리 원주목사에게 떠넘긴 이지완은 신법의 소개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공납이 없어졌으니 점퇴點退도 없고, 점퇴가 없으니 방납防納도 없네. 자네들로선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네만,”

강원도에서는 이미 사대동私大同이라 하여 선혜법과 비슷한 제도를 고을 단위에서 시행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와닿겠지. 앞으로는 윤회분정輪回分定도 없네.”

이어진 이지완의 말에 농군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참말이십니까?!”

“그럼!”

윤회분정이란 농지를 8결 단위로 묶어, 그 안의 농민들이 돌아가며 요역과 공납을 부담하는 방식이다.

차례대로 돌아가며 부담을 진다는 점에서는 얼핏 공정해 보일지 모르나 한 데 묶인 농지들이라도 면적이나 토질에 차등이 있어 공정하게 부담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내부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농민이 자의적으로 부담을 분배하게 된다. 당연히 부정으로 이어지기 쉬웠고, 이는 군현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라 관청이 토호들과 결탁해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묶인 윤회분정에 부담을 떠넘기고는 했다.

하지만 공납이 없어지면 윤회분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라가 바뀌는 걸 보니, 정말 나라님이 바뀐 모양일세!”

“이번 나라님은 잘 다스리려나?”

힘없는 자들에게는 천하의 악법이었던 윤회분정이다. 그것이 없어진다는 말에, 사대동으로 선혜법의 시행을 체감하지 못했던 농민들이 환해진 안색으로 쑥덕거렸다.

“전이나 전전 같지만 않아도 천당일걸!”

“암!”

“쉬잇,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닐세.”

“윤회분정만 없어도 천당 아닌가?”

“하기야!”

두런두런 떠드는 농민들 사이로, 영 탐탁지 못한 얼굴을 한 자들이 있었다.

“흥, 정신을 못 차리는군.”

“일자무식들이 뭘 알기나 하겠나?”

“마냥 좋다니 그런 줄로 아는 게지.”

각기 유지로서 소작농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군림해 왔던 자들이다. 특권을 일부나마 상실하게 되었으니 그 성정에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이들은 얼굴을 맞댄 채 투덜거렸으나 다들 들으랍시고 한 말이었던지라 주변 농군들은 질색하고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부농들은 인파 속 부자연스러운 공터 한중간에 놓여 곧장 이지완의 이목을 샀다.

다들 다른 농군들보다 얼굴이 희고 차림새도 깔끔했으므로, 이지완은 곧장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양자의 시선이 교차하자 유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공물 대신 세미를 걷는 제도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빈번하게 한 해도 못 가 혁파되지 않았소이까?”

공공연하게 찬물을 끼얹은 유지는 주변 농군들을 다그쳤다.

“고작 이런 소식만으로 동요하기는! 전례 없던 일도 아니거늘, 지금까지 그대들이 한 해라도 공물을 내지 않은 적이 있었소?!”

좌중이 싸늘해지자 유지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 쳤다. 애당초 이럴 목적으로 이지완에게 말을 붙인 것이었다.

덕분에 공무를 방해받은 이지완은 따가운 눈총을 보냈으나, 할 말 다 한 유지는 사과 대신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인 무례에 이지완이 말했다.

“당신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소이다. 내 목사와 감사께 주의할 인물이 있다고 말씀드리겠소!”

“이보시오! 나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였을 뿐인데, 구차하게 수령을 내세워 핍박하겠다는 게요?”

“나라에서 백성의 부담을 덜고 폐단을 혁파하고자 백 년의 대계를 세웠는데, 갓 쓰고 태어나서 공로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이 뒤에서 구시렁대는 게 구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소?”

이지완의 면박에 농군들은 차마 대놓고 찬동하지는 못하였으나 군중에 묻힌 채 조소를 날렸다.

그간 부와 신분을 등에 업고 으스대었던 유지에게는 난생처음인 망신이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현직자에게 노기를 쏟아내자니 학문도 권력도 상대가 안 될 듯하여 차마 덤벼들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계속 망신당할 수도 없는지라, 유지는 주변 사람들만 도끼눈으로 흘겨보고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에 사정 비슷한 다른 유지들도 함께 발을 옮기니 이지완은 농군들을 향해 말했다.

“저런 사람들이 마다하는 법이라면, 그대들이 따라서 나쁠 건 없을 거요.”

공감이 뒤따르자, 이지완은 한결 편한 기분으로 선혜법을 홍보해 나갔다.

* * *

오후가 되어 이지완은 원주목 관아로 귀환했다.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은 뒤 때마침 대령한 석반을 들이고, 일대 선비가 내놓은 문집을 잠깐 뒤적거린 뒤 이부자리에 드러누우니 동헌 객사도 이제는 안방과 다를 게 없었다.

출타에서 귀환한 만큼 빠르게 수마가 뻗어왔으나 잠들기 직전 관노가 찾아와 목사의 호출을 전했다.

한창 좋을 때 일어난 이지완은 구시렁대며 의관을 갖췄다. 이것이 얹혀사는 신세의 유일한 설움이었다.

뺨을 때리며 객사를 나선 이지완은 곧장 동헌 집무실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영감.”

이에 원주목사 신경식申景植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자고 있던 사람을 깨웠군. 관노가 융통성이 없어서 말이야.”

“아닙니다. 잠깐 졸았을 뿐입니다.”

양전어사의 지위도 낮지는 않은지라 투정 정도는 부릴 법하였으나 이지완은 내색하지 않았다.

신경식은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목사에 제수된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색이야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게 서인이어서, 대북인 이지완이 신경식에게 할 말 다 한다는 건 생쥐가 고양이 무는 격이었다.

“내일 송현松峴만 들르면 끝이군?”

“그렇습니다.”

“어사가 달포쯤 원주에 계셨던가?”

“예.”

“오래 고생하셨군. 슬슬 원주도 질리겠어.”

“치하해 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면전의 목사와 비할까. 기실 달포보다는 더 오래 있었지만, 어쨌거나 어사였다. 임시로 파견되었고, 당장은 신법의 홍보를 위해 귀환이 잠시 지체되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송현 한 곳만 남지 않았던가.

이에 반하여 수령의 임기는 짧아도 두 해 반이다. 그전에 임지를 나가려면 조정에서 불러주던가, 혹은 파직되는 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 신세는 아니니 다행이었다.

“바로 돌아갈 생각인가?”

“노쇠한 아버지께서 홀로 한양에 계시니, 일을 마치는 대로 서둘러야지 않겠습니까. 송현의 일을 마치는대로 귀환하고자 합니다.”

“그럼 미리 송별연을 준비해야겠군?”

신경식이 흥이 돋아 물었고, 이지완은 목사가 잘 자던 자신을 깨운 이유를 깨달았다.

과거의 그였다면 주연을 마다할 일 따위는 없었겠으나 이지완은 멋쩍은 얼굴로 주저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왜?”

“금일 백성들을 모아놓고 신법을 가르치는데, 한 선비가 헛소리를 하더군요.”

“선혜법이 모두가 환영할 만한 법은 아니지.”

신경식은 이지완이 왜 갑자기 선혜법 소리를 하는가 의아했다.

“한데, 그 선비에게 한 소리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무슨.”

“내가 남 말할 때인가, 하고 말입니다.”

부친의 덕을 입어 관문에 오른 지 한참이거늘, 과연 내가 해낸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업적이 있던가.

갓을 쓰고 태어났으나 일평생 공로를 이루지 못한 건 피차 일반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들었어야 할 말을, 제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내심 통감하면서도 뻔뻔하게 질책을 이어나가는데 얼마나 민망하던지요. 아직도 부끄럽습니다.”

“그거야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겠나.”

신경식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였으나, 이지완은 그럴 수 없었다. 부친이 가문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이귀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신은 자식이 되어 술이나 마시고 다녔으니 패륜아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한 소리 들었다고 벽지로 내려가 살 궁리까지 하지 않았던가.

“잘해야지요. 그러니 말씀은 무척 감사하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 그래. 부담 갖지 마시게.”

신경식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 질색하고서 손을 저었다.

“망극할 따름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객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시게.”

이지완이 공손한 인사와 함께 집무실을 떠나자 신경식은 입맛을 다셨다. 술 마시기 좋은 기회였거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