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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2화 (52/380)

인조, 명군이 되다 52화

궁중의 사람인 대비는 보통 누군가와 같이 식사할 일이 없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문안은 뻔질나게 가르면서 불효할 기회는 놓치지 않는 주상이 동석한 덕이었다.

“덕분에 사서史書가 두꺼워지겠소. 주상께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데 거침없으니 말이요.”

기왕이면 공주가 와서 함께 밥을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대비가 불퉁하게 말하자 맞은편에서 자신만의 밥상을 낀 왕이 말했다.

“그러니 후대의 사가들은 소자가 혼자서 먹여 살린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제사상은 잘 차려주려나?”

“제사는 둘째치고 종묘에 자리가 있기나 할지 의문이요.”

왕은 후릅, 국을 떠넘기고는 답했다.

“소자가 골로 가기 전에 확장공사를 해둬야겠습니다. 빈방이 많은데 굳이 비워두지는 않겠지요?”

“그럼 봉안은 되겠지만, 오래 머물리라는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겠소이다. 자리가 부족해지는 순간 다음 차례는 주상 아니겠소?”

“차라리 벼락 맞고 죽으라고 하지 그러십니까.”

“내가 이미 발원하였는데 효험이 없는 걸 보니 주상이 상제의 편애를 받나 보오.”

“이제 아셨습니까.”

왕의 생명을 두고 수위 높은 농담이 오갔다.

본디 대비라도 왕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니, 이 같은 대화는 꿈에서라도 불가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뻔히 일어나고 있으니 분명 금상은 사서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 이런 자리에 사관이 있어야 하는데.”

“나를 죽일 심산이시오?”

“이것도 실록에 남아야 의미가 있지요. 야사에 남아 봐야 무슨 소용이랍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야사라도 남으면 안 될 일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왕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주상이 왕실의 체면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알겠소.”

이 잡담이 새어나가리라는 전제를 한 대화에, 동석한 궁인들은 그저 성삭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맛있네.”

왕의 혼잣말에 대비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왕은 수라상궁에게 뚜껑을 받아 찬기를 덮고 있었다.

“맛있다면서 손도 대지 못하게 덮어놓는 건 뭐요?”

“소주방燒廚房 나인들도 밥은 먹어야지요.”

왕의 식사를 준비하는 소주방의 궁녀들은, 독을 탈 수 없게 반드시 왕이 먹다 남긴 수라로 식사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은 대비도 알았으나 본디 수라는 왕 혼자서 비울 양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부러 남기지 않아도 나인들이 굶을 일은 없거늘, 저 좋다는 찬을 덮어버린단 말인가.

대비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대비는 다른 호기심을 풀기로 했다.

“북병사를 독살한 범인이 흥안군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오?”

“대개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저택을 뒤져보니 출저를 알 수 없는 고순도의 은화가 발견되었는데, 뇌물로서 지급되는 은화라더군요. 개혁에 반대하는 외관들이 종친을 매수해서 일을 벌인 게 아니겠습니까?”

“골치깨나 썩겠소이다.”

“뭐어, 그렇지요.”

종친이 사주를 받아 중신을 독살했다.

진실과는 크게 멀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지라, 세간은 대비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에 이귀와 일부 서인은 폐모론에 찬동한 종친들을 이참에 죽이고자 들었고 종친들은 벌벌 떨면서 폭풍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왕은 애먼 종친이 유탄 맞는 것을 원치 않았던지라 백방으로 중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대비의 말은 왕의 예상 밖이었다.

“종친을 죽인 것이 절대 가벼운 죄는 아니나, 북병사 아들이 누명을 쓰고도 전말을 고하지 않은 이유는 직접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잖소?”

골치깨나 썩인다는 게 나랏일 때문이 아니라, 이괄의 아들 이전의 처분을 말한 것이었다.

종친부의 존립이 시험받고 있는 현재 상황과 비교하면 세인들에게 이전의 처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종친을 살해했으니 어차피 사형을 면치 못할 텐데 운이 좋으면 교형이고 나쁘면 참형 아니겠는가?

이따금 이전이 부친의 복수를 한 것을 호평하였지만, 그뿐.

그간 불가침의 존재였던 종친들의 명운에 쏠리는 관심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일 따름이었다.

“여론을 양형에 반영할 수도 있겠으나, 죄인이 아예 도망쳐 사라졌으니 치죄를 논하는 의미가 있겠습니까.”

“훗날 잡히게 되면 의미가 있지 않겠소? 예로부터 효자는 포장하여 널리 알리고 불효자는 엄벌하여 일벌백계하였으니, 비록 북병사 아들의 죄과가 무겁다고는 하나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바라오.”

“……이 반찬도 맛있네.”

“주상.”

“좌의정이 하던 조사도 종결하고, 방백方伯에게 따로 채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이렇게까지 살펴주었는데 그래도 잡힌다면 소자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입막음을 할 수 있음에도 그냥 보내주었으니 목숨은 이미 한번 살려준 셈이었다.

“나중에 종친들이 탄원이라도 올리면 다 대비마마께서 시킨 일이라고 둘러대겠습니다.”

“아니, 주상.”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자를 닦달하셨으니 응보를 치르셔야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안 볼 때라면 모를까, 궁인들이 왕 밥 먹는다고 같이 있는데 공개적으로 닦달하지 않았나. 뻔히 의도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이전을 배려하였다가 모두의 앞에서 이실직고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사정이 종친의 귀까지 닿는다면 책임은 괘씸한 어머니가 지는 게 옳았다.

“아니 그렇습니까?”

왕이 애꿎은 기미상궁에게 물어보니, 기미상궁은 차마 누구에게도 밉보일 수 없어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그 애처로운 광경에 왕이 화제를 돌렸다.

“여기에 세자도 있었어야 했는데. 제왕학이 별거겠습니까?”

“주상께서는 금쪽같은 자식에게 패륜을 가르칠 생각이시오?”

“패륜도 잘하면 능력이지요. 아, 광해군 같은 패륜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태종 대왕 같은 패륜을 말하는 겁니다.”

패륜도 능력이라는 망언에 인상을 찌푸렸던 대비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이제는 나만이 아니라 열성까지 욕보이시는 게요?”

“욕보이는 게 아니라, 추켜세워 드리는 겁니다.”

“허! 정녕 주상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니, 내 세자가 꼭 태종 대왕 본받기를 바라겠소.”

“어차피 그럴 일도 없겠습니다만 다른 왕자들을 해치지만 않는다면야……. 자식이 잘 배우고 잘 깨우쳐서 아비를 능가한다면 가상한 일이지요.”

“미쳤소?”

“진심입니다.”

태종이 비록 피는 많이 흘렸지만, 그 단호함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고려를 벗어나지 못한 당시의 제도와 분위기를 완전히 쇄신했으니까.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나 전성기의 영광은 다 퇴색된 채 대전쟁의 후유증으로 빌빌대는 지금, 조선에는 또 한 번 태종 대왕이 필요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왕들이 선조, 광해군, 인조네.’

나라에 미친 영향만 따지면 태조, 태종, 세종에 버금가지 않을까. 공과는 정반대라는 게 문제지.

“음, 아들 대까지 가면 늦겠습니다.”

“뭐가 늦는단 말이오?”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재위 십 년을 들여 아비가 망쳐놓은 조선을 재건해 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에 지나지 않으니, 앞서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박고 역사에도 대못을 박아놓았으니까.

효종이 잘못했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인조 같은 왕이 하나만 더 이어졌으면 조선은 더 이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사후약방문을 아쉬워할 따름이다.

그러니 달라진 역사에서 가장 잘해야 할 사람은 세자가 아니었다.

“후금이 발호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는 이 시기에 태종이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세자보다 소자가 먼저겠지요.”

“잘 방비하고 계시잖소?”

“열심히는 하고 있지요.”

군적을 갱신했고, 피역자들을 붙잡았으며, 이들을 수용할 군대를 신설 중이다.

김신국은 도원수를 믿을 만한 자로, 부원수는 한명련이나 정충신이 좋다고 추천했는데 나는 각기 장만과 정충신을 내정했다.

장만은 부원수의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력자로 그려지지만,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정충신이 부원수를 맡으면 부하의 재량을 존중해 좋은 조합이 될 거다.

장만도 열세의 병력으로 이괄과 맞선 만큼 충성심은 검증된 인물이고.

그리고 신설된 군대를 뒷받침하고자 선혜법을 확대했다.

신용화폐로 돌아가는 미래 경제에서는 (부작용은 차치하고) 돈을 더 찍어낸다는 편법을 쓸 수 있지만, 실물경제에서는 그런 반칙이 불가능하니까.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광해군이 제도 개혁을 막아두어서 망정이다. 고칠 구석은 없는데 꽉 막히기만 했다면 나라 꼴이 역류하는 변기 신세를 면치 못했을 테니까.

아무튼, 방비는 열심히 하고 있다.

“이 정도도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지요. 이미 명을 격파하고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지 않습니까?”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 않소? 싸움에서 졌다고는 하나 한 번이요, 대명은 여전히 건재하니 합심하여 맞선다면 아무리 강성한 오랑캐인들 소탕하지 못하겠소? 너무 우려하지 않아도 되오.”

대비가 너그럽게 위로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인지라 순순히 안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투닥대면서 이럴 때는 진지하게 신경 써주는 대비가 고마웠다.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무얼 용서한다는 말이오?”

“모두의 앞에서 이전의 용서를 확언받으려 하신 것 말입니다.”

“허, 내가 못할 소리를 했소?”

그새 원래대로 돌아와 툴툴대는 대비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 * *

“각지에서 피역한 죄인을 사로잡은 수가 수천을 상회했는데 금일 경기감사의 전언으로는 더 많은 죄인을 추포하여 옥사獄舍에 자리가 없을 지경이라 하옵니다.”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병조판서 김신국이 고했다.

“이만 평안도로 올려보내 군을 창설함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렇게 하세요. 도원수와 부원수는 각기 장만과 정충신에게 맡기겠습니다. 해조에서 여러 달 고생해 준 덕으로 마침내 백성들을 더 징발하지 않고도 북적을 대비할 계책을 실행하니, 매우 기쁩니다.”

예정된 일이었던지라 더 논의할 게 없었다. 마찬가지로 예정된 대답으로 응하니 김신국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의가 특히 고생해 주었사옵니다.”

짦은 미사여구도 없이 공로를 참의에게 돌리니, 상관의 시선을 뚱하니 마주하던 이귀는 뒤늦게 놀란 얼굴이 되어서 허리를 숙였다.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군. 아직은 일방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말이다.

곧 나의 명령에 따라 장정들이 팔도에서 평안도까지 이동할 생각을 하니 막상 성취감보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조선 시대에서 자동차가 있나, 기차가 있나? 그나마 말은 있지만 일일이 나눠줄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설령 그게 가능했더라도 승마는 고급 기술이니 십중팔구는 다루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장정들이 이동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타고난 두 다리를 열심히 놀려서 평안도까지 가는 것이다.

본도本道나 가까운 함경도, 하다못해 경기도에서 출발한다면 그나마 양반이다.

산세가 험준하여 이동이 곧 등산일 평안도나 강원도 출신이라면 어떻겠으며, 아예 땅끝에서 땅끝으로 가야 하는 경상도나 전라도라면 어떻겠는가.

병조판서가 어련히 대비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노파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상경하는 피역자들의 숙식은 어떻게 해결할지 정해두었습니까?”

“예에. 일차적으로 피역자들이 상경하는 경로의 고을에서 숙식을 전담하고, 각지 감사들이 비용을 취합하여 청구할 생각이옵니다.”

이에 호조판서 이광정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섰다. 지방 단위의 최고 관리인 감사들이 비용을 청구한다면 그 대상은 하나밖에 없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숙식의 비용은 각 도에서 부담하는 편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피역이 발생한 이유는 목민관들이 고을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옵니까?”

그런데 왜 책임지지 않고 빠듯한 중앙의 재정을 축내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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