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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3화 (53/380)

인조, 명군이 되다 53화

“잘못이 있는 고을에 책임을 지게 하자…….”

“그러하옵니다.”

호조판서 이광정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되뇔 필요까지 있었냐는 투였다.

따지자면 불충한 태도였으나 나라의 재정이 긴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정이어서, 불쾌하지는 않았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과도한 지출을 우려한다는데 어떻게 질책할 수 있겠는가.

김신국도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직접 반박하지는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북방군의 설립과 유지에는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므로, 직접 호조판서와 맞서기는 부담스러울 테지.

최고 결정권자인 왕이 직접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 피역이 발생한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고을에 전가할 게 아니라 관리 감독의 책임이 있는 수령들에게 물어야겠지요? 또한, 피역자가 근 몇 달에만 발생한 것은 아닐 터이니 처벌의 범주에는 현직 수령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개혁으로 인한 외관들의 반발이 양지에서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경관京官 대부분이 외관과는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타지로 나가본 적 없는 하급 관리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중신이라도 이미 즐길 것 다 즐기고 손 털고 나온 입장이니 사다리 걷어차는 데 딱히 유감이 있지도 않겠지.

하지만 현직만 아니라 전직 목민관들까지 책임을 묻겠다면 사정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

이광정은 무수한 관리를 적으로 돌릴 수 있음을 깨닫고서 유구무언이 되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피역자 문제에서 결백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러니 더욱 근본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면, 관리들의 기강이 이토록 해이함에도 방관한 조정의 잘못이 크지요. 이것이 우리가 비용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명분이 그렇고, 현실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피역자가 발생한 고을에서 책임을 지우자니 수수방관할 위험이 있다. 죄는 피역자가 저질렀고 잘못은 전대 수령들이 했는데, 왜 현재 고을 단위에서 책임져야 하냐며 억울하게 생각할 테니까.

피역자들 고생 좀 하랍시고 손을 놓아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피역자들에게 숙식비를 청구하자니 이건 더 부담스럽다. 피역한 게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처벌로써 가장 위험한 군역을 지게 되었는데 재산까지 강탈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지켜야 할 게 목숨뿐인 군인이 전장에서 분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또 피역할 게 분명했고, 창대를 반대로 돌리지나 않는다면 다행이다.

저들의 가정과 그것을 유지할 재산을 남겨두는 건 관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 같은 사정을 모를 이광정이 아니었다. 경력만 따지자면 승정원에서는 차관인 좌승지까지 지냈고, 육조에서는 형조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곳에서 참의와 판서를 거쳤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텐데 정작 이광정은 알맹이는 쏙 빼놓고 명분만 말하지 않았던가.

“……호조에서 비용을 지급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직설적으로 물어보니 이광정은 가타부타 없이 입술만 말았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정적이 길어지고 곳곳에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대자, 이광정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호조는 북방군 유지를 위한 식량 확보만으로 한계이옵니다.”

이에 병조참의 이귀가 쏘아붙였다.

“북방군의 신설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었던 일인데, 어떻게 아직도 준비가 안 되었답니까?”

“일군一軍을 먹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요.”

“그러면, 쉬운 일은 있답니까?”

“…….”

다분히 감정적인 이귀의 공격에 병조와 호조 관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예산을 두고 왈가왈부가 많았던 사이다. 호조는 이광정을 중심으로 군축을 통한 재정의 회복을 주장했고 병조는 북적을 마주한 채로 무슨 안일한 소리냐며 도리어 지원의 확대를 요구했다.

둘 다 옳은 주장이지.

여종들이 다투자 너도 옳고, 너도 옳다, 하였던 황희는 아니다만 어쨌거나 어느 쪽도 틀린 소리는 아니잖은가?

군축을 통한 재정 회복? 옳은 말이지.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할 지원 확대? 마찬가지로 옳은 말이다.

잘못된 건 나라를 국밥처럼 말아먹어서 어느 쪽도 쉽지 않게 만들어놓은 선조와 광해군이다. 목릉穆陵을 까뒤집는다고 돈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참는 거지…….

아무튼, 이렇게 호조와 병조가 각자의 소임을 다 하겠다고 의견 충돌이 나버리면 다시 최고결정권자가 중재할 수밖에 없다.

“다들 그만하세요.”

손을 휘저으며 이르니 관리들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호조가 재정 회복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일개 도의 세제구조를 개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물은 부피 대비 가치가 높아 운송이 쉽고 자유롭지만 세미稅米는 그렇지 않다.

기존에 사용하던 길이 대규모 운송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서, 때로는 지형을 조사하고 창고와 부두도 새로 지어야 하니까.

그런데 선혜법을 시행하는 건 조세 과정의 부패와 비효율을 일신하는 개혁이지, 근본적으로 세입을 확대하는 게 아니어서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효과가 없다.

정치적인 부담을 다 제하고 장부에 찍히는 숫자만 봐도 당장은 마이너스다.

‘여기에 신설될 군대의 비용까지 대야 하니…….’

앓는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없는 쌀알을 혓바닥 좀 놀린다고 허공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반전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개혁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도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그렇다면 누군가는 배가 수리될 때까지 새는 물을 막고 있어야겠지…….’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신하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쾌척해 국난에 기여한다는, 가상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는지라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수사에 여유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볼 테니 호조에서는 부족분을 올리세요. 최대한 충당하겠습니다.”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폐조 때만 하여도 이 같은 일은…….”

나는 손을 휘저어 입에 발린 소리를 끊어냈다.

“폐주가 나라만 방탕하게 운영한 게 아닐 터이니, 내수사가 여유가 얼마나 있을지는 나도 모릅니다. 설령 여유가 있은들 언제까지고 화수분처럼 재물을 토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다만 전하께서 곳간을 열어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게 말뿐이 아니라면 결과로 보여주세요. 올해 강원도 세미를 옮길 때 차질이나, 뭐 그런 비슷한 단어가 튀어나온다면 판서를 경회지에 던져 버릴 겁니다.”

유경험자인 병조판서 김신국은 관복의 목을 늘였다. 그가 언젠가 남이공과 함께 똥물에 던져졌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던지라, 이광정은 내가 농을 한다는 게 아님을 알고서 침을 꼴깍 삼켰다.

“……명심하겠나이다.”

그래, 명심하라고.

똥물에 던져졌다간 고생하는 수가 있다. 남이공은 며칠 설사를 앓았다더라고. 바로 목욕까지 시켜줬는데도 말이다.

‘경회지에 던지지 말고 경회루 기둥 위에 세워놓을까?’

추락하지만 않으면 괜찮은 처벌이 될 테지.

* * *

회의가 끝난 직후 김신국과 장만을 불러들였다.

“전하.”

부름을 받은 장만이 김신국에 이어 입시했고, 나는 맞은편에 놓인 빈 방석을 가리켰다.

“소식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예에.”

“늘그막에 고생시킨다고 화나지는 않던가요?”

환갑에 가까워진 장만이다. 외직을 맡는 게 부담스러울 연배고, 하물며 군의 사령관이라면 수고로움은 말할 수조차 없다. 이미 폐조 때 거듭하여 병으로 사직을 청하지 않았던가.

장만은 황송해하며 답했다.

“나라에 인재가 무수한데도 신을 특별히 원수로 삼아주시니 그저 망극할 따름이지, 어찌 사양하는 마음이 들겠사옵니까?”

빈말 같지 않았던지라 안도하고서 충고했다.

“직접 뛰는 일은 부원수에게 맡기세요. 쓸 만한 사람입니다.”

“명심하겠나이다. 마침 신 역시 순변사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전하께서 실로 적임자를 차임하셨습니다.”

“그래요? 도원수라면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둘 줄 알았습니다.”

원 역사에서 장만은 부원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추천했으니까.

“신이 재주 있는 사람 여럿을 새겨두었는데 그중 순변사가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안목은 좋지 못하여서 순번은 뒤에 둔즉슨, 신에게 부원수의 적임자를 하문하셨다면 이서李曙를 꼽았을 것입니다.”

이서는 반정 때 장단부사로 참여하여, 현재는 형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북병사가 죽지 않았다면 그 또한 좋았을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장만은 두 사람을 추천했고 최종적으로 이괄이 발탁됐다. 그 결과로써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장만이 어떤 이유로 이 같은 인선을 보여주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점에서 두 사람이 부원수로 적합합니까?”

“이서는 강단이 있으며 부원수는 용맹합니다. 신의 기질이 단호하지 못해 피역자를 호령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을까, 내심 우려하여 두 사람이라면 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기에 적합하리라 사료했사옵니다.”

이런 이유로 이서와 이괄을 추천했구나.

원래 역사에서는 신군新軍이 피역자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논리는 비슷했으리라. 자신의 약점을 알고 보완하겠다는 태도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장만은 안목이 좋지 못했다.

이괄이 용맹함으로 저지른 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새로이 부원수로 제수된 이서는 일군을 맡고도 이괄의 계략에 휘둘려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았으니까.

‘둘 중 하나도 맞지를 않냐…….’

난이 종결된 뒤 이불을 몇 번이고 걷어찼으리라.

“순찰사는 논외로 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신이 미천한지라, 휘하 장수들이 불응할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과연 그 점은 나도 우려되었다. 원래 역사에서 정충신은 이괄을 꺾음으로써 맹점을 보완했다. 자칫 나라의 주인이 바뀔 수 있었던 상황을 막았으니, 누가 어떤 배짱으로 신분을 걸고넘어질 수 있을까. 돌아올 말이 뻔한데.

다행히 나의 역사에서도 정충신은 비슷한 기회를 얻을 예정이다. 북방군의 설립의 표면적인 취지는 북적을 방비하기 위함이지만, 그전에 결판을 내야 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정충신이 확실한 전공을 세워준다면, 출신을 걸고넘어질 사람은 없어지겠지. 그래서 이건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부원수를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옵니다. 순변사는 지난 대전쟁에서 더없이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북쪽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명석한 면을 드러냈으니 부원수를 맡음에 부족함이 없사옵니다.”

“그래요. 순찰사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니, 막 차임한 사람을 체직하기보다는 경과를 두고 봅시다.”

“예에.”

“그리고…….”

슬슬 화제를 바꿔야 할 때였다. 잠시 장만의 안타까운 안목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를 불러낸 건 이미 정해진 부원수의 적임자를 다시금 논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도원수에게 당부할 게 있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나는 재차 입을 여는 대신 김신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장만이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김신국이 자세를 고쳐 앉고서 말했다.

“아조의 위협은 북적만이 아닙니다.”

“……왜노들 역시 못 믿을 종자들이긴 하지만,”

김신국이 고개를 저었다.

뭐, 왜적들 역시 위협이기는 하지. 만약 열도가 임란 후 내부정리에 들어가는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이어받았다면 조선은 세 번째 침략을 당했을 테니까.

하지만 장만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왜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적도, 왜적도 아니라면 또 어떤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소거법을 적용하면 후보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데도, 장만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조선의 펠레여서가 아니라…….

조선의 절대다수가 명나라와의 대적을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임진년 때 조선을 망국의 위기에서 구해준 나라가 어디인가?

그런데 그로부터 고작 스물 몇 년 지난 지금, 조선이 명나라와 싸운다든가 명나라가 오랑캐에 멸해 사라진다든가 하는 건 물이 거꾸로 흐를 가능성을 논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지금처럼 운만 띄워서는 의논의 진전을 기약할 수 없는지라, 김신국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가도에 있는 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만은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은 아닌지 의심하는 투라, 못을 박아주기로 했다.

“나는 모 장이 아조의 변경을 침노하리라 확신합니다.”

“……전하, 모문룡은 명나라에서 총병에 제수된 사람이옵니다.”

“그래서 모 장이 침탈하고 노략하더라도 가만히 지켜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장만은 ‘숨이 턱턱 막힌다.’라는 표현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황당하고 당황하여 난색을 띄운 채 끓는 숨을 흘렸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은 장만이 여전한 난색으로 말했다.

“북적이 양국 모두에 위협이 되고 있거늘, 모문룡이 왜 코앞의 적을 내버려 두고 아조를 침노하겠사옵니까?”

그런데 그게 실화가 된다니까?

조선 펠레의 연전연승은 끝이 없었다. 그만 이겨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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