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54화
“대비는 해두자는 겁니다.”
현시점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건 안다.
그러나 모문룡은 호란 때 피난하는 백성들을 공격해, 자른 머리는 적의 수급으로 위조했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창고와 민가를 약탈하여 무수한 관물과 사유재산을 강탈했으니 이들이 나라의 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기실, 모문룡의 이 같은 만행에 가장 분개했던 사람이 장만이었다.
그런데 아직 당해보지 않았다고 물렁한 생각을 하니, 보는 이로선 답답했다. 충분히 깨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렇다고 정신 차릴 때까지 백성이 해를 입게 둘 수도 없었으니까.
“원수는 탐탁지 않겠으나, 그동안 모 장이 보여온 행보는 지극히 신임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백성들에게 참극이 일어나는 건 용납하고 싶지 않아요.”
장만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말로만 들어서는 여전히 말 같지 않다는 거겠지. 그러나 현실이 된 다음에 깨우쳐서는 너무 늦다.
“당장 모 장과의 일전을 준비하지는 않더라도 방비는 충분히 해두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불의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군사를 이끌어 모 장과 교전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장만이 확언을 구했다.
본인이 믿거나 말거나 왕명이 그렇다면야, 목숨으로 항명할 게 아닌 한에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문룡의 본질이야 어떻건 명나라 감투를 쓴 자이니 맞서는 건 쉬워도 맞선 다음은 쉽지 않아서,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선조 때도 관직을 지냈던 장만이니까.
앞서 그가 모셨던 왕은 무책임하고 비열하여, 아무리 안목이 좋지 않아도 주변 사람이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보면 깨닫는 것이 있게 마련이었다.
왕이 명령은 내렸으되 두루뭉술한 지령으로 갈음하여 정치적인 부담은 다 떠넘기고 불이 번지겠다 싶으면 쳐내는 꼴을 몇 번이나 보았겠는가.
마침 오리지널 인조는 인품이 조부와 똑 닮아 책임지는 것을 싫어했다.
모문룡의 거듭된 배반이 반역으로 칭해지며 공격해 없애자는 주장이 거듭 나오자, 신하들의 극렬한 의견에도 난색만을 표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원수께서 단호하게 대응해 주기를 바랍니다.”
“양 군이 부딪히면 논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불의한 행위를 당하고도 소극적으로만 대응한다면 우리는 모 장에게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으로 전락하겠지요. 철부지가 맹수를 괴롭힌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듯이, 나는 마땅히 조선이 만방에 맹수로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 * *
장만이 떠나간 뒤.
남겨진 김신국이 입을 열었다.
“원수라고 백성들의 안위를 가벼이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아요. 원수는 분명한 명나라와의 동맹이 불투명한 배신의 가능성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는 거겠지요.”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또렷하게 아는 나는, 명나라와의 동맹이야말로 불투명했고 모문룡의 배신은 분명했다.
“당장은 나의 말이 체감되지 않겠지만, 막상 교전이 벌어지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모문룡이 끝내 기대를 저버리고 조선을 배신하자 장만은 칼을 뽑아 들기로 했으니까.
당장은 반신반의하여서 그렇지, 막상 그때가 오면 따로 설득할 필요가 없을 거다. 장만을 북방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삼은 이유다.
이에 김신국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황제가 보낸 화약으로 북적보다 황제의 신하를 먼저 처단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역설적으로 되었사옵니다.”
“모문룡의 떼거리를 박멸할 즈음에는 그들도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명나라 조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내가 마음 같아서는 불시에 기습하여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조신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터이니.”
먼저 이를 드러내는 건 모문룡과 떨거지들이 될 거다.
그러면 명나라야, 모문룡과 동강진의 실체야 어떻건 저들의 감투 쓴 종자들이 토멸된 게 자존심은 크게 상하겠으나 지금 같은 정세에서 끝까지 모문룡을 감싸지는 못할 테지.
하나뿐인 우방을 쳐내고 단독으로 국적 후금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겠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편이 고맙지. 곧 역사가 되어 사라질 명나라와의 의리를 위해서 조국의 운명까지 시험하려 들 인간이 적지 않으니까.
“병판께서는 북방군 신설을 차질 없이 잘 준비하고 계십니까?”
기습 질문에 김신국이 일순 멈칫했다.
“병조판서는 이미 경회지 물맛을 보셨으니까, 또 벌을 드릴 일이 생긴다면 경회루 기둥 위에 올려놓을까 합니다.”
“…….”
“그러니 차질이 생길 것 같다면, 비가 내리지 않기를 기원하세요. 춘추도 적지 않으신데 기둥 위에서 비 맞고 고뿔이라도 걸린다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김신국은 각오가 필요해졌는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유능하기로 따지자면 조정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라 설령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김신국만의 귀책은 아닐 거다.
나라의 사정이 좋지 못하고 신하 중에서는 여전히 당색에 연연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누가 닦달하지 않아도 나름의 고충이 작지 않을 테지.
하지만 북방군은 국가의 미래가 걸린 대사업이다. 일일이 사정을 봐줄 수는 없었다.
김신국이 해내지 못한다면, 다르게 말해서 누구도 해내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각심 정도는 가져줘야지.
미안한 건 미안한 거라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망극하옵니다.”
* * *
인생은 실전이다.
어디 실전 아닌 인생이 있겠느냐만, 생각 없이 살다가 한번 당해보면 어구가 주는 느낌이 달라진다.
내가 인조가 될 줄 상상이나 해봤겠냐고.
꿈에도 그리지 못한 일이 벌어졌지만, 하필이면 반정이 있던 날 떨어져서 곧바로 실전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인생은 예상치 못한 고난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실전에서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다. 회복할 수 있더라도 공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물며 나라 단위에서의 실전이야 말해 무엇할까?
‘그걸 세자도 알아야지.’
최근 세자에게 중요도가 낮은 업무를 이관하면서 기초적인 감각은 길러주었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들과 앉아 수천 년간 외워진 경전을 또 외는 것보다는 유의미한 교육이 되었겠지.
이제는 수위를 높일 때가 됐다.
물론, 대리청정이나 왕업을 맡기에는 한참 부족하니 곧바로 중대한 업무를 맡길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실전을 겪은 인물을 초청해, 그들이 위기를 극복한 방법을 가르친다면 예시로 새겨두었다가 훗날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응용할 수 있겠지.
일종의 백신인 셈이다.
“그리고 실전이라면, 그대만 한 적임자도 없지요.”
호출의 이유를 알게 된 김류는 눈이 가늘어져서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신의 생애에 우여곡절은 많았으나 장차 나라를 이끌게 될 세자에게 가르칠 사연이 있을지 모르겠나이다.”
“경이 목석이 아니고서야 인간으로서 가진 위기가 있을 테고, 또 신하로서 가진 위기일지라도 세자가 배워두면 장차 왕이 되어서 백관을 대할 때 그들의 잘 사정을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마침 밖에서 내시가 불렀다.
“전하, 세자 입시하였사옵니다.”
“들라고 하세요.”
윤허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아바마마!”
세자는 환하게 인사하고는, 나와 대면한 김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참의.”
“저하.”
나와는 다르게 건조한 인사였다. 아암, 세자는 바르고 총명하니 아직 어리더라도 김류가 못된 소인배임을 짐작했을 거다.
그런 김류를 통해 가르침을 전수하려니 새하얀 도화지 같은 아들에게 먹물을 묻히는 꼴은 아닌가, 내심 고민도 해보았으나 다양한 사례를 익혀두는 게 실전을 대비한다는 목적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앉아라. 내가 세자를 부른 이유는 참의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라서이다. 참의?”
“예.”
“세자에게 가르칠 만한 사연이 없다고 했는데, 그럼 김자점에 대해서 말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거론될 만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김자점 세 글자가 호명되기 무섭게 김류의 눈이 커졌다. 반응이 대놓고 수상한 곡절이 있다고 시인하는 수준이어서, 세자는 꺼림칙한 투로 물었다.
“김자점이라면…… 공신으로 녹훈되고도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이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단다. 참의?”
김류는 자신의 행적을 고백하는 게 썩 달갑지 않았는지 난색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세자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게 했고, 나는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 언제까지고 시치미를 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크흠……. 흠. 아뢰겠습니다.”
김류는 여전히 이 주제로 말하는 게 편치는 않다는 듯 헛기침을 연발하면서 고했다.
“김자점은 우계牛溪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로 재주는 있었으나 인품이 부족하여 과거에서 빈번히 낙방했습니다. 그리하여 폐주 대에 이르러서는 대과에 급제할 뜻을 꺾고 음서로 출사했는데, 계모計謀가 없지는 않았던 만큼 직이 병조좌랑에 이르렀습니다.”
“세자는 자점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니 풀어서 설명해 주시지요. 그에게 어떤 계모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적당히 끼어들어 의문을 던지자 김류는 입술을 한 번 말고서 답했다.
“우계 선생은 부친 성수침成守琛을 통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서 내려온 조선 학맥의 정통입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동문수학한 인간들과의 학연을 잘 팔아먹었다는 뜻이다, 세자야.”
조선에서 학연, 지연, 혈연을 빼면 섭섭하지.
“계속하세요.”
“……예. 김자점은 요직에 올랐으나 폐주가 패륜과 실정을 일삼자 동지들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거의 발각되었다가 천운으로 불분명하게 넘어가, 사직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소관이 김자점과 교우하게 된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 인연으로 전하께서 거의하실 때 김자점도 백신白身의 신분으로 참여하게 되었지요.”
김류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식견은 짧고 천성은 탐욕스러웠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인품이 부족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과연 반정이 성공하자 김자점은 안하무인이 되어 동지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전하와 대비 사이를 이간하였으니 사람들은 김자점을 크게 쓰일 수 없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반정까지의 사정을 요약한 뒤, 김류는 본론에 들어갔다.
“하여 전하께서는 종사를 바로 잡으신 뒤 김자점을 부르지 않으셨는데, 이에 김자점이 앙심을 품고서 국혼에 훼방을 놓았습니다.”
나와 김류가 김자점을 제거한 당위가 잘 갖춰진 내막이다. 그러니까…….
“참의.”
“예.”
“그건 세간을 위해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세자에게 가르침을 주겠다는 이 자리의 취지와는 맞지 않아요.”
“……신이 이실직고한다면, 도리어 세자를 가르치는 데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자는 세간의 누구와도 다릅니다. 장차 나를 이어서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니, 왕업에는 이런 것도 있음을 알아야지요.”
김류는 나와 긴장한 세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이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니 외부에 발설하시면 아니 됩니다. ……기실, 전하께서는 김자점을 처음 마주하셨을 때부터 그가 간신에 불과함을 간파하셨습니다.”
“김자점이 다른 재주는 몰라도 저같이 못난 소인배들에게서 점수 따는 법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폐주 때는 서인의 학맥을 잇고도 벼슬이 병조좌랑까지 이르렀고, 분에 넘치는 요직을 맡았음에도 이귀를 끌어들여서 반란을 기도했지. 간신히 살아남아 직을 버린 다음에는 참의의 주구가 되었다.”
나의 부연에 면전에서 소인배 소리를 듣게 된 김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참 세자에게 피와 살이 될 교훈을 전하는 중이었으므로, 금세 안중에서 김류를 지워 버리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김자점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아득바득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한 것이지. 자점이 비록 나의 반정은 거들었으나 역적에 불과한 이유다. 단지 부귀와 출세만을 위해 왕을 배신한 자가 두 번이라고 배신하지 못하겠느냐?”
그래서 김자점은 과연 왕을 또 배신한다.
“그리고 나는 대비의 발호를 우려하고 있었다. 대비는 반정의 명분이었으나, 품행이 나쁘고 덕망은 부족하였으므로 미리 다스려 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비록 대통을 이으며 생긴 인연이라지만, 어머니는 어머니. 그런 대비를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견제할 생각이었다는 고백에 세자는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대비마마는 폐주에 의해 몇 년이나 억울하게 유폐를 당하셨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좋고 나쁜 건, 인품이 좋고 나쁜 것과는 별개이다. 물에서 건져놓으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 것이야.”
“…….”
“대비의 처우는 동정할 여지가 충분했으나 인품은 그렇지 않았다. 처신도 그랬지. 영창대군이 탄생한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폐주가 오래전부터 세자를 맡아왔음에도 언행이 매우 부적절하였지. 유영경이 선왕의 교지를 은닉한 사건이 드러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대비마마께서 무엇을 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연흥부원군을 통해 유영경의 처단을 상주드렸어야 했다.”
“……하오나 대비마마는 선대왕을 막 떠나보내신 참이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폐주와 대비가 서로를 알고 지낸 지 수십여 년인데 처신을 잘못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겠느냐? 정녕 몰랐다면 왕실의 어른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이고, 알고도 처신을 잘못했다면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너무 가혹하십니다.”
“대비는 왕실의 어른 중에서도 어른이야. 그 같은 사람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왕가와 여염이 구분되는 건 왕가가 구중궁궐에서 살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뭇 왕가의 일원이 가져야 할 책임감에 대해서도 설파할 수 있겠지만,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썩어도 준치라고 행보야 어떻건 대비는 대비다. 더욱이 반정의 명분으로서 다루기 민감한 존재인 만큼 함부로 견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 번 쓰고 패를 버릴 각오를 한다면 못 할 견제도 아니요, 때마침 이이제이하기 좋은 표적이 있었으니 때마침 찍힌 김자점이었다.
“내가 부덕하게 보이느냐?”
세자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