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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5화 (55/380)

인조, 명군이 되다 55화

고뇌 끝에 세자가 답했다.

“잘 타일러서 계도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옵니다.”

세자는 그 계도의 대상이 김자점인지 대비인지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족보상 조모가 되는 왕실의 웃어른을 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게 어불성설이라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거겠지.

그런 모호함이 곧 세자 역시 대비가 폐조 때 보여주었던 행보가 부적절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결과만 확실하다면 공을 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힘써 계도하여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도리어 원한만 품는다면 공력과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 아니겠느냐?”

“성인께서도 같은 우려를 하셨겠지만, 끝내 덕을 베풀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폐조가 종결한 뒤 하루살이만도 못하게 된 북인들을 구제하였고, 저들의 세상이 될 줄 알고서 기고만장한 서인들을 토사구팽하지도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안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안고 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더구나.”

얼마 전까지는 평범한 사람이 지나지 않았던 나다.

“북인과 서인을 모두 감싸신 것은, 다 효용이 있기 때문 아니옵니까?”

세자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평소 세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외였다. 충격받은 거겠지. 감정의 기복을 쉽사리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정작 나의 말에서 허와 실을 가려냈으니 안목만은 잘 가다듬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북인을 살려두어 조정의 균형을 맞춘 건 내가 인격자여서가 아니었다. 나는 세자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일단 억눌러 두고서 답했다.

“하지만 기회를 줌으로써 내가 감당해야 했던 대가를 생각해 보아라.”

서인들은 숙청이 불충분하다 여겼고 북인들은 가까스로 부지한 목숨으로 불안에 떨었다. 오늘날에야 왕의 위상이 회복되어 관대함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중립은 누구의 편도 아닌 법이다.

만약 양쪽 모두 불만의 끝을 내게 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공신들을 찢어놓고 북인의 잔존 거두들은 직접 만나 진정시킨 건 대단한 계략이나 음모가 아니었다.

서인이 곧장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건 무리수일 거라는 불투명한 믿음에 기대어, 살아남기 위해 애쓴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조정 안팎은 여전히 불만을 품은 자들로 가득하다. 환국과 숙청의 열기도 가라앉았거늘 누군가는 지금까지도 북인을 백안시하고, 바깥에서는 부정한 이익을 침해당한 자들이 원한을 품었다.

만약 김자점과 대비를 털끝조차 건드리지 않고 안고 가야 했다면 얼마나 더 곤란했을 것인가?

“나는 무한히 은혜를 베풀기에는 재주도 그릇도 작은 사람이다. 내가 그 같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오직 너와 백성들뿐이야.”

나는 용상을 내려가 세자의 손을 맞잡았다. 나의 일면이 너무 의외였던지 세자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한참을 그렇게 있으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면면을 살펴보는 세자의 시선은 마치 내가 과거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지 세심히 살펴보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였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는지, 이내 세자는 다시 눈길을 피했다.

“이 같은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송양지인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양공襄公은 초楚나라와 전쟁을 일으켰다. 이내 송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는 초나라 군대와 대치하였으나, 양공은 ‘군자는 비겁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나라 군대가 강을 다 건넌 뒤 맞붙었다가 끝내 패배하였으니 당대의 사람이 모두 양공을 어리석게 여겼다.

만약 양공이 싸움에서 이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인은 지덕知德을 겸비한 양공을 존경하여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공은 덕은 갖췄을지언정 지모는 그렇지 못했다. 군사는 허무하게 죽었고 국운은 기울었으니, 자질 없는 사람이 베푸는 선정은 이처럼 만용을 넘어 해악이 되는 이유다.

“부디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깨우쳐서 이 아비보다 나은 사람이 되거라.”

그래야만 선정을 베풀 자격이 생긴다.

나는 세자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다시 용상에 올랐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지. 김류가 김자점을 죽이게 된 경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생각할 거리라면 이미 충분히 안겼으니까.

“이게 다 폐주가 나라를 똑바로 다스리지 않아서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세자 시절 반만큼만 했어도, 내가 이 자리에 올랐겠습니까?”

김류를 보며 농을 건넸으나, 김류는 멋쩍게 헛기침만 흘릴 뿐 어울리지 않았다.

괘씸하네.

“세자야. 참의는 반정이 있던 날부터 저렇게 몸을 사렸다. 폐주에게 고변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거사의 때가 되었는데도 한참 나타나지 않았지. 아니, 그럴 거면 반정은 왜 모의한 거야?”

김류 역시 제 한 몸을 위해 반란을 획책했다는 뜻이다. 정녕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거의했다면 그리 눈치 볼 이유가 있겠는가?

뒤늦게 나온 것도 그나마 계산이 서서일 거다. 반정이 실패하면 끼건 끼지 않건 어차피 삼족이 멸할 일이요, 만에 하나라도 반정이 성공했는데 그동안 숨어 있었다면 어떠한 보상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김류는 반정이 성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집을 나섰을 터인데, 정작 나와서는 자신을 대신해 대장으로 추대된 이괄과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참 대단했다.

김자점을 없앨 때 ‘여차하면’ 취급을 한 이유다.

이 같은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놀란 건 소자만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 이 아비가 세자에게 숙제를 내렸구나.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예.”

세자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일어나, 함께 일어나는 김류에게 짧게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김류는 내심 세자와 같이 물러날 생각이었는지 닫히는 문을 어정쩡한 자세로 보다가, 나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앉았다.

“어휴.”

“……송구하옵나이다.”

“농담 좀 받아주지 그러셨습니까.”

“저하의 앞에서 전하의 즉위를 농으로 삼는 건…….”

“후환이 될 것 같아서 그래요? 세자가 얼마나 착하고 순한데.”

권력의 비정함은 말해 무엇하랴. 역사서 어디를 펼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세자라고 모르지 않을 터거늘 김자점이 죽고 대비를 견제한 것에 놀라지 않았던가.

그 주체가 나였다는 데 놀란 기색이었지만.

“만약 경이 세자였다면, 부왕이 이리하였으니 나도 눈에 거슬리는 인간은 마구 죽여야겠다며 신나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품성이 세자만은 못할지라도 살인광은 아니옵니다.”

“농담 조금 보태서 한 말이지요, 거 참.”

“…….”

“천사 같은 세자에게 너무 독한 이야기를 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빠가 이런 사람일 줄 몰랐다면서 앞으로 피해 다니는 거 아니야?

근심하니 김류가 위안했다.

“세자는 장차 보위를 이을 신분이니 독한 이야기라고 안 할 수는 없지요. 다소 놀란 기색은 신 역시 보았으나, 세자는 명석하므로 전하의 진심을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훗날 장성하여서는 오늘날의 가르침에 감사하겠지요.”

그때가 나 죽고 난 다음일까 봐 걱정되는 거지.

하지만 김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차 보위를 이을 세자인데 독한 이야기라고 안 할 수는 없다. 수위가 높다고 왕업에서 차포를 다 떼고 가르친다면 시강侍講에서 가르치는 고리타분한 소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애초에 실전을 간접 체험시키고자 만든 자리다.

그러니 뒤늦게 자식에게 밉보일까 전전긍긍하는 것도 궁색 맞은 짓이어서, 염려는 차치해 두고 김류를 바라보았다.

“참의.”

“예.”

“욕심 많이 나지요?”

김류에게는 꽤 뜬금없었던지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예.”

“여전히 당상을 차지한 대북 당여들, 노관들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눈과 귀를 막고 사는 것도 아닌데 젊은 서인들은 공공연하게 불만을 토로하니 모를 수가 없다.

왕의 면전에서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여서 그 정도라면,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성토가 이뤄지고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을 사람이 나와 당여들 사이에 낀 김류다.

그 역시 염불보다는 잿밥이나 타 먹을 생각으로 반정을 모의하였는데, 정작 얻어낸 것은 많지 않고 위험부담 없이 성공한 반정의 낙수만 타 먹은 십중팔구는 호사가 부족하다고 채근일 테지.

안 그래도 좋다고는 못할 인품이 더 망가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 묻어갈 요량으로 슬쩍 신세 한탄할 법도 하건만 김류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신경 쓰지 않사옵니다.”

“……그래요?”

어울리지 않게 무슨 배짱인가 싶었더니 김류가 이유를 말했다.

“시간이 흘러 신이 그들의 연배가 되었을 때, 전하께서는 지금처럼 늙은 신하를 계속 중용해 주시겠지요.”

“하하.”

“아니옵니까?”

김류가 은근히 짓궂은 목소리로 말하여서, 그가 이제야 농을 건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농담 치고는 진심이 많이 담겨 있을 테지만.

“맞습니다. 비록 경의 인품이 이항복 같지는 않고, 재주는 이원익 같지 않더라도…….”

나는 씨익 웃었다.

“권력을 잡으면 그 질서가 흔들리지 않게 노력할 욕심은 가지고 있지요.”

천하가 다 제 것인데 분란을 원할까.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김류는 인조 정권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북인 잔당들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김신국처럼 유능한 사람이라면 당색에 관계없이 발탁했다.

과욕이 지나친 나머지 도리어 포용하게 된 것이다.

“패거리 정치만 안 해도 참 좋을 텐데요.”

권력과 정권의 안정은, 다르게 말하면 아군을 많이 만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원 역사에서 김류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굳히기 위해 정치적인 우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덕에 아들 김경징은 부족한 자질에도 요직에 올랐으며, 김류의 주구 노릇을 해온 김자점 역시 간사한 품성에도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 결과가 어땠던가?

김자점은 왕을 두 번 배신했고, 김경징은 비록 호랑이는 못 되어도 비슷한 줄무늬는 있었던 제 아비만도 못해 최후까지 손가락질만 당하다가 죽었다.

“경은 당여들을 품고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혼자 잘해야 더 높게 오를 사람이에요.”

쓰레기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지만 않아도 못 써먹을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부작용에 가깝다지만 과하게 탐욕스럽고 오활한 면모도 나름대로 용처가 있는 덕이다.

“지금 나의 눈에는 경이 족쇄에 너무 연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폭풍 같았던 폐주 때라면 발목에 찬 족쇄 덕에 날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같은 때라면 도리어 발목만 잡을 뿐인데 말입니다.”

김류는 가벼이 답하지 않았다. 당여들은 그에게 족쇄이면서도 지지기반이기도 했다.

제 수족 같은 이들을 잘라낼 각오가 쉽게 들 리 없었다. 당장 그들을 쳐낸 다음에는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뻔한 소리야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지만, 김류가 고민하는 이유를 다르게 보면 그는 나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왕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섭스레기들 같은 당여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누가 믿음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서로 믿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차피 내가 더 떠들지 않아도, 족쇄가 갈수록 무겁게 느껴질 거다.’

한계가 다가오면 알아서 족쇄를 잘라낼 생각이 들겠지. 그전까지는 소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그래서 노파심은 미뤄두고 함께 세자를 교육하느라 진땀 뺀 김류를 치하하기로 했다. 아직 대비의 명을 받아 김자점을 제거한 사정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세자 눈치를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숙수들이 제법 신경을 썼는지 오늘 건 특히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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