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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6화 (56/380)

인조, 명군이 되다 56화

“……흐음.”

김류가 경운궁 대전을 나섰을 때는, 하늘에 창연한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금상의 호출을 받았을 때만 해도 김류는 적당히 일감만 받고서 물러날 줄 알았다.

자신이 지내는 이조의 직과 관련된 문제를 맡는다던가, 아니면 김자점 때처럼 불필요한 인물의 제거를 떠안는다던가.

그러나 김류가 실제로 맡은 일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일이어서, 왕이 세자에게 실전을 가르치겠다고 했을 때 의도와 수위가 가늠되지 않아 내심 잔뜩 헤매야만 했다.

자신이 겪은 실전이 가벼이 논할 수 있는 것이던가?

한데 왕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리를 만든 근본적인 이유야 세자에게 권력의 어두운 면모도 가감 없이 보여주겠다는 것이겠으나, 어디 조정에서 봉록 오래 타 먹은 사람치고 실전이라 칭할 만한 경험 하나 없는 이가 하나라도 있겠는가?

따지자면 더러운 꼴이야 늙어빠진 대북 노신들이야말로 훨씬 많이 봤을 것이다.

만년 비주류인 남인南人으로 영의정 노릇만 다섯 번째인 이원익이라면 더 하겠지.

‘족쇄에 너무 연연한다고?’

그간 대북 천하에서 기축옥사라는 원죄를 지닌 서인이 살아남을 방법은 서로 뭉치고 더욱 교조적으로 변하는 것뿐이었다.

여전히 대북 천하인 것은 아니나…….

“으음.”

당여들의 존재가 안정감을 주는 만큼, 김류 역시 그들을 신경 써야 했다.

족쇄라는 표현도 크게 틀리지는 않지.

그러나 패거리를 쳐낸다는 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적들은 이때다 싶어 달려들 텐데 당여들은 자신을 배신자로 여겨 도와주지 않을 테니까.

그럼 왕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겠지. 달리 어디에 목숨을 의탁할 수 있겠나?

성은이 멀어지면 죽은 목숨이 되니 왕명이라면 그저 고분고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성은이 멀어진 사람 치고 죽지 않을 이 어디 있을까.

설사 공신들이 필사적으로 뭉쳐 저들을 지키고자 한들, 왕의 눈 밖에 나면 다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 토사구팽이라는 고사가 존재하는 이유다.

“쯧.”

김류는 혀를 차고서 발길을 재촉했다.

왕과의 대면은 항상 이랬다. 볼 때마다 찝찝한 고민거리를 안긴다. 그러면서도 왕의 부름을 내심 바라는 자신도 못 말릴 인간이었다.

김류는 왕이 챙겨준 과자를 마저 입에 넣으며 경운궁을 나섰다.

* * *

수도 한양에서 한참 북쪽, 평안도 평안부 외곽.

북방군은 감사가 임시로 내어준 땅에서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둔 초기에는 노지에 최소한의 시설만 갖추어져 체력강화를 빙자한 군영 공사만이 반복되었으나, 덕분에 최근은 주둔지 언저리쯤은 되는 환경이 만들어져 훈련다운 훈련이 행해지는 중이었다.

“기함을 담아서 내질러라!”

군관의 일갈에 장정들이 악을 쓰며 창을 내질렀다. 장시간 거듭된 고강도 훈련에 핼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당차게 내질러진 창끝은 이내 덜덜 떨리면서 내려갔다.

“흔들리지? 흔들리지!”

군관은 그런 창끝을 환도로 툭툭 쳐올리며 외쳤다.

“이 정도 완력으로 어떻게 오랑캐를 대적하겠다는 거냐! 네놈들 모두 오랑캐 칼 밥이 되고 싶은 거냐?! 다시 당겨! 내질러!”

장정들이 훈련장에서 오와 열을 갖춘 채 몇 번이고 창을 내지르는 동안, 멀지 않은 단상에서 훈련을 감독하는 자들이 있었다.

물론 감독이라 봐야 딱히 하는 것 없이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으나 군관들로서는 등 뒤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도원수와 부원수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정신이 팔릴 동안, 장만은 연신 옆을 힐끔거렸다.

부원수 정충신은 특별히 훈련에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빠져들 것처럼 주시하고 있었고, 덕분에 장만은 휴식을 위해 훈련이 잠시 중지된 틈을 타서야 겨우 말을 붙였다.

“부원수?”

“말씀하시지요.”

“병조에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달 말까지 적어도 삼천은 증원될 거라는군.”

정충신은 주둔지 경계 너머를 힐끗 살폈다. 감사가 어디까지나 임시로 마련한 자리인 만큼, 지척에 민가와 논밭이 깔려 있었다.

“자리가 부족하겠습니다.”

“감사에게는 서둘러 부지를 확정해 주던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라도 확장할 수 있게 협조해 달라 말은 해뒀네만……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것 같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기 좋은 땅은 이미 가옥과 농지들이 차지한 지 오래.

그렇다고 대후금 방위의 핵심인 북방군을 산골짜기에 밀어 넣을 수도 없다. 교통이 불편하면 적이 쳐들어왔을 때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고, 수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주둔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정 여의치 않다면 군대를 여러 고을에 분할 수용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차선이다.

나뉘는 만큼 지휘계통이 복잡해지고 시설도 더 필요하니까. 전략적 이익 없이 그저 흩뿌릴 뿐이라면 하책에 지나지 않았다.

“여건이 잘 갖춰진 곳들은 다 임자가 있어서 본읍 수령이 직접 나서줘야 하는데, 수령들도 언제 빠질지 모르는 대군이 주둔한다니 다들 학을 떼고서 마다한다는군.”

장만은 실망감에 쯧, 혀를 찼다. 대군의 폐하가 없지는 않겠으나 북방군의 존재 의의는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거국적인 차원에서 벌이는 사업이거늘 고작 고을 단위에서 질색하며 서로 떠넘기기 바쁘니 어찌 선비 된 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이기심에 부리는 작폐作弊에 불과하거늘, 방백方伯과 각 읍 수령들에게 따끔하게 질책하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다 같은 외관으로서 비슷한 신세에 서로 배려해야 할 상황도 많은데 따끔하게 한소리 하려다간 도리어 곤란해지기 쉬웠다.

“감사에게도 사정은 있겠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지 않습니까? 강하게 말씀하셔야지요.”

“……으음.”

“군이 신설되기 전부터 부지의 확보는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주둔지가 마련되지 않은 건 감사의 잘못이지요. 그의 책임이 아니라면, 언제 짐을 옮길지 몰라 항상 눈치 보고 있어야 할 북방군의 사정은 누구 책임이랍니까?”

정충신의 정론에 장만은 난색만 드러냈다.

“피차 사정이 있는 건 마찬가지이니 어떻게 얼굴 붉히면서 닦달하겠나? 그쪽에서 원한이라도 품으면 곤란해.”

정충신이 곱씹어보니 도원수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당장 닦달하면 고난은 벗어나겠지만,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졌을 때 똑같이 닦달로 협조를 얻어낼 수 있을까?

반대로 감사에게 닦달하게 되면 고개는 들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로 다가온 당장의 고난을 외면할 수도 없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감사와 논의해 보겠습니다. 부원수로서 직책이 크게 낮지는 않으니 감사도 결례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괜찮겠나?”

“예.”

마음을 이미 굳혔다는 듯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대답에, 장만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하게. 부원수가 직접 감사를 만나 봐. 혹시나 트집 잡힐 일이 생긴다면 내가 시켰다고 하고.”

“최대한 폐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 눈치 볼 필요 없네.”

장만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똑바로 해내지 못해 부원수가 나서게 된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교섭의 허락을 받아낸 정충신이 재개된 훈련에 다시 집중하려던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있었다.

“도원수 대감. 부원수 영감.”

두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 곳에 군관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장만이 질문하기 무섭게 군관이 소식을 토해냈다.

“모 총병의 차관인 시가달時可達이 평양에 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쪽으로 오는 중입니다!”

“뭐?”

장만이 도원수로 부임하기 전, 왕과의 밀담을 의식하지 않아도 모문룡은 조선의 중대한 관심사였다.

명나라와의 육로가 끊긴 지금은 모문룡이 오롯이 대국과의 소통 창구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모문룡의 행보라면 조정이 일거수일투족 주시하고 있거늘, 어째서 소식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차관이 대뜸 평양에 떴다는 말인가?

더욱이 그 차관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장만은 매우 놀랐고, 그 감정을 차치할 새도 없이 입구 쪽에서 휘황찬란한 무리가 들어섰다.

“……!”

막 소식을 전한 군관이 물러났고, 훈련장 한가운데를 가르며 다가오던 무리는 위풍당당하게 장만과 정충신 앞에 섰다.

시가달이 분명할 선두의 장수는 마편馬鞭으로 손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막 일어선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귀관들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조선의 지휘관들인가?”

마치 제가 북방군의 주인이라도 된다는 양 무례한 발언에 동행한 조선 측 군관들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임진년 명나라에 큰 은혜를 입었으며 여전히 대국과는 함께 후금과 맞서는 동맹 관계라고는 하나, 시가달은 외부인.

허락은커녕 연락도 없이 무작정 군 시설을 방문한 것도 모자라 지휘관들에게 오만방자하게 떠들어도 저지조차 못 하니 군관들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장만은 그런 군관들을 해산시켰다. 피차 더 부끄럽고 민망해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보는 눈을 덜어낸 장만이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소관과 이쪽의 부원수가 이번에 새로이 창설된 북방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흠, 존함이?”

“소관은 장만이라 하옵고…….”

“정충신이라 합니다.”

두 사람의 통성명에 시가달은 콧김을 픽 내쉬었다.

“나는 도독 합하 밑에서 일하는 시가달이라 하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 대인.”

시가달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훈련장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시가달의 훼방에도 그새 오와 열을 회복하고서 다시 훈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들이 북방군의 전부요? 이래서야 노적의 일군은커녕 한 줌 남은 홀온忽溫조차 감당하지 못하겠소이다.”

“훈련 중인 병력은 일부에 불과하고, 또 더 많은 병력이 집결하고 있으니 대인께서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흠, 그럼 북방군은 규모를 얼마나 갖추는 거요? 고작 수천으로 대명의 전쟁을 거들 생각은 아닐 테고.”

“이 만가량입니다.”

시가달은 흥미롭다는 듯,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투로 내뱉었다.

“이 만이면 그나마 군대 구색은 갖추겠구려. 전쟁에 얼마나 도움 될지는 미지수지만.”

“소방小房이 애를 쓴다고 상국의 대병을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황상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만 가상하게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하!”

시가달은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고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정녕 그대 나라가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지는, 이런 알량한 군대의 편성이 아니라 도독 합하와 동강진을 얼마나 지원하느냐에 달려 있소.”

“…….”

“한데, 도통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려. 굳이 도독 합하께서 마음을 쓰게 만드는 이유가 뭐요?”

사신을 보내어 문안하고 양해는 구했으나, 정작 조선이 모문룡에게 부탁할 때 으레 보이던 성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신을 잡아다가 식량으로 삼거나,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 자금으로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시가달이 갑자기 조선을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과연 새로이 즉위했다는 조선의 왕은 정신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아무리 구왕을 몰아내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 할 게 아닌가.

장만으로서는 모문룡이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사람까지 보내 추궁하는 짓이 적잖이 같잖았다.

왕 앞에서는 모문룡과의 분쟁에 반대했다지만, 그 이유가 모문룡이 예뻐서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심 드는 생각을 내지르고 싶을 따름이나…….

“오해입니다. 폐국이 폐하께 입은 은혜를 가늠할 수 없거늘, 어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고자 하겠습니까.”

“부디 조선국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기를 바라오. 요동의 육로가 막혀 조선과 대명을 이어주는 건 오직 우리뿐인데, 오해가 지속하여서 좋을 건 없지 않겠소?”

“여부야 있겠습니까.”

시가달은 실소와 함께 콧대를 세웠다.

“명심하시오. 그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곧바로 구원의 손길을 뻗을 존재는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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