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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7화 (57/380)

인조, 명군이 되다 57화

장만이 깊게 허리 숙였고, 시가달은 마지막으로 병사들을 돌아본 뒤 발을 돌렸다.

잠시 후.

불청객 무리가 훈련장에서 완전히 사라져 웃고 떠드는 소음마저 없어진 뒤에야, 장만은 지친 얼굴로 탄식했다.

“아이고, 두야…….”

동강진이 가도에 자리 잡은 건 전적으로 조선의 배려 때문이었다. 유민들의 바닷길을 통한 위험한 귀환을 만류하고, 섬을 내어 그곳에서 살게 해주었으니까.

그런데 시가달을 포함해 모문룡 이하는 지금 저들이 딛고 선 땅의 주인을 망각하고서 도리어 재물을 바치라며 윽박지르니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니냐?’

말 그대로였다. 보통 속담을 인용하더라도 현실과 정확히 부합하는 경우는 잘 없거늘, 서해의 물귀신이 될 뻔한 모문룡 이하를 뭍에 붙들어놓으니 이제는 언제 맡겨놓기라도 한 양 뻔뻔하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장만은 그 뻔뻔하게 내민 손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가벼이 저지를 일은 아니었다.

저들이 무엇을 믿고 그리 뻔뻔한가를 생각해 보면, 조선의 재상으로서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밀명을 따르기로 각오를 고쳐먹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고 말이다.

‘저들이 먼저 트집 잡힐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주시만 해야 하니…….’

하지만, 모문룡 이하 떨거지들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조를 노략할까?

왕은 그리 예상했다지만 장만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저들이 탐욕스럽고 이익을 위해 인면수심이 되었다 한들 대단히 돌아버리지 않은 이상에야 명나라 총병의 직함을 달고서 조선을 치겠는가?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왕의 계획은 너무 극단적이었고, 그래서 비현실적이었다.

‘……정녕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장만은 왕의 걱정과 기대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현시점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모문룡의 침략이 아니라 별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왕의 성정이었다.

금상의 심성이 본디 이러하다면 앞으로 이어질 조선의 명운도 그리 순탄치는 않을 터. 이 같은 모습을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뭐든지 처음만 어려운 법 아니겠는가?

이런 마당에 기고만장한 시가달이 왕에게 찾아가 개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을 하니, 진정으로 앞날이 염려스러울 따름이었다.

* * *

보름이 지났고, 장만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군무를 보았다. 과연 병조판서의 말대로 달포의 절반이 지나자 천 오백 가량의 병력이 충원되었고, 비좁아진 군영에서 사건 사고의 발생은 배로 늘어났다.

북방군은 태생부터 피역자들을 잡아서 모아 만든 군대.

부원수가 혹독한 훈련과 확실한 신상필벌로 열심히 기강을 잡아나가고는 있다지만, 근본이 넝마주이인 군대를 하루아침에 비단처럼 탈바꿈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덕분에 장만의 머릿속에서 시가달의 행패는 잊힌 지 오래였다. 북방군이 단 하루도 조용하지 못해서 갖은 소동이 격류처럼 쏟아지니, 보름 전 지나간 일이야 무슨 상관이랴?

해결되지 못한 채 산적한 골칫거리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살겠군. 시간이 반나절이라도 멈춰서 편하게 쉴 수는 없을는지…….”

장만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현실에서 도피했지만, 현실은 장만을 놓아주지 않았다.

“도원수 대감.”

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게!”

장만은 반색하며 허락했고, 이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선 이는 부원수 정충신이었다. 그는 몇 개의 권자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는데 곧바로 장만에게 내밀었다.

“각기 병조판서, 평안감사, 안주부사에게 확정을 받은 문건들입니다.”

장만은 각기 권자를 풀어 훑어보고는, 놀란 얼굴로 정충신을 바라보았다.

“주둔지를 구했군? 그것도 안주부에.”

“예.”

이보다는 더 골머리 썩을 줄 알았던 장만이다. 그런데 그새 평안도의 이름 한 글자를 담당하는 안주부에 주둔지를 확보했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충신은 성과에 비해 너무하리만치 짧은 대답으로 응했고, 그래서 장만은 재차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잡음은 없었던가? 무리하지는 않았겠지?”

“적절하게 설득했습니다.”

“적절하게?”

“병조판서와 평안감사는 이전부터 확실하게 지원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었고, 소관은 도원수 대감을 대신하여 나섰으니 안주부사도 부득불 마다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대감과 영감 소리 듣는 사람이 셋이나 모였다. 아무리 당상관에 준하는 부사라도, 곧 낙향할 게 아닌 한이야 양보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령과의 분쟁을 염려했던 장만으로서는 썩 뒷맛 깔끔한 방법은 아니었다.

“조만간 안주부를 다녀와야겠군. 부사에게 감사도 표하고, 체면도 세워줘야지.”

그렇게 일정을 잡고서 안주부의 문건을 읽어가던 장만이 재차 감탄했다.

“부원수가 후보로 말했던 왕산王山 북쪽, 구청산旧靑山 기슭, 안융安戎을 전부 확보했군?”

“예.”

왕산과 구청산은 각기 청천강 상류와 중류에 자리한 산이며, 안융은 고려 시대 강 하류에 세워진 고성古城이다.

마침 청천강이 평안도를 남북으로 반분하는 중요한 강이며, 이남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충신의 안목보다도 결과물이 놀라웠다.

금은보화가 빛난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금은보화를 가질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정충신은 후보지로 삼았던 요해처 세 곳을 모두 받아냈다.

“아주 알뜰하게 확보하셨네. 세 곳에서 모두 군사가 주둔하면 북적은 꿈에라도 청천강을 건너지 못하겠지.”

“그러하옵니다.”

장만은 문건을 툭툭 두드리고서 덧붙였다.

“여기서는 땅을 내어준다는 말만 있고, 얼마나 내어줄 것인지는 나오지 않는군. 방어선을 유지하려면 병력 배분이 중요한데 말이야.”

“각기 오천씩은 무방합니다.”

“……그래?”

셋 다 합쳐서 오천까지도 각오했던 장만이다. 안주부의 위상이나 얻어낸 땅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절대 부지를 넉넉하게 확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평안도에서 두 번째로 번성한 고을의 강 주변에 주인 없는 땅이 있겠는가?

그런데 각기 오천이라니…….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하신 건가?”

“아닙니다.”

정충신은 의심을 단호하게 부정했으나 장만은 쉬이 믿지 못했다.

수령이 아무리 고을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다지만, 왕이라고 안하무인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수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한 상충하니 아무리 사소하고 가벼운 일일지라도 일일이 공박이 생겨나고 적아가 분별되니, 이를 간과한다면 설령 왕일지라도 인망을 잃고 배반당하게 된다.

군주라도 그러할진대 수령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더 했다. 고을의 사정에 해박하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유지들이 모두 등을 돌린다면 관청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리는 판이다.

군소한 고을마저 그러할진데 안주부처럼 번성한 고을이라면 유지들의 입김이 얼마나 더 세겠는가?

“내가 부사였다면 절대 말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걸세.”

하물며 강변의 수시로 침수하는 땅에도 주인이 있다. 갈대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 주변에 있어 물 길어오기는 쉬우면서도, 군영을 차릴 정도로 침수 걱정은 없는 알짜배기 땅이다?

십중팔구는 유지들의 소유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빼앗아 군대에 주자는 건 고을 전체의 유지들과 척을 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일이었고 대단한 성과를 이뤄낸 것도 맞네만,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이미 안주부 직인이 찍혔으나 장만은 도저히 낼름 받아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사가 요구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조건?”

“예. 이상의 주둔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청천강 남쪽 경계 제방을 주둔 기간 보수를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주둔지 모두 강에 인접하였으니 마다할 조건은 아닙니다.”

“음…….”

제방의 보수는 필요한 일이면서도 많은 품이 들어 백성들이 질색하는 일이었다.

그런 백성들을 다독여 공사에 투입하는 것도 수령의 몫이었으므로, 군대가 그 수고로움을 도맡는 조건도 충분히 걸 수 있었다.

북방군이 주둔하는 동안 치수가 안정적으로 된다면 그간 불성실하게 관리된 제방으로 인해 침수될 위험이 있는 땅들도 논으로 개간되겠지.

“음……. 그뿐인가?”

“북방군에서 담당할 건 그뿐입니다. 중앙에서는 토지의 원소유주에게 십여 년간의 소출을 보장했고, 감영에서는 부사의 양보를 고과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더군요.”

장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만하면 땅주인들도 위안은 삼을만하고, 부사도 극구 마다할 일은 아니었다. 당상관이 코앞인데 고과를 놓칠 수야 있겠는가.

다른 두 곳에서도 나서주니 북방군이 오롯이 주둔의 대가를 치르는 결과는 면했다. 그러나 따지자면 청천강 제방을 보수하는 건 주둔지의 침수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요, 대가라고 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대가는 중앙과 감영이 도맡은 셈인데, 과연 두 곳이 배려심이 넘쳐 부담을 자처하였을까?

당연히 그럴리는 없는지라, 장만은 자신이 부임하기 전에 했던 평가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서나 이괄이 부원수를 맡았다면 이 문제를 이렇게 잘 해결할 수 있었을까. 직접 나설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나섰더라도 성급한 마음에 여러 사람의 감정만 상한 채 문제는 답보, 어쩌면 퇴보했을 터였다.

“고생하셨네, 정말로 고생하셨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조차 못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나라고 결코 예외라 할 수 없고.”

장만이 멋쩍게 웃자 정충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도원수께서는 소관을 믿고 전권을 맡겨주셨습니다.”

“……아니야. 항간에 도는 말로는 병판이 전하께 유능한 사람을 부원수로 삼으라 추천했다는데, 사실인 모양일세.”

그리고 왕은 처음부터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았다. 비록 모문룡을 향한 경계심만은 유별나게 심하다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만은 거짓이 아니리라.

장만은 정충신을 한껏 추켜세우고는, 부원수도 민망하겠다 싶어 서둘러 덧붙였다.

“수고하셨네. 오늘은 다른 일하지 말고 푹 쉬게. 군관들에게는 내가 말해두지.”

“예. 감사합니다.”

정충신은 깊게 허리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섰고, 장만은 부원수가 받아온 확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정충신이 비군사적 대승을 이뤄낸 후 장만은 북방군을 소집해 안주부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평양의 임시 주둔지는 포화됐고, 그럼에도 계속 신병이 증원될 예정이라 서둘러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장만이 해둘 일이 있었다.

부원수가 소임을 훌륭하게 해낸 건 사실이지만, 평소 그의 출신을 트집 잡아 시기하는 자가 많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 정충신이 새로운 주둔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사소한 오명이라도 얻었다면, 소인배들에 의해 큰 흠결로 번질지 몰랐다.

그래서 장만은 먼저 병조판서 김신국에게 서신을 보냈다. 같은 문제를 두고 함께 고생했을 판서의 노고를 인정하고 협조에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병조판서는 당적이 나빠 이 같은 사소한 연락도 분위기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금상은 나라를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다.

다음으로 장만은 평양을 방문했다.

그가 성 밖까지 번화한 거리를 가로질러 읍성에 다다르자, 성문 밖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던 평안감사 이홍주李弘胄가 환대로 맞아주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방문한다고 괜히 감사께 부담만 드린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영광이지요. 자, 듭시지요.”

장만은 감사와 기수를 나란히 하고서 나아갔다.

“이 사람이 알기로 전 감사 박엽朴燁가 패악해 평양의 사정이 심각하다 들었는데, 정작 부민들 얼굴은 나쁘지 않군요.”

다 새로 부임한 감사인 당신 덕분 아니겠느냐는 아부에 이홍주는 뻔뻔하게 수긍하는 대신 겸양했다.

“조정의 간적들이 일소되고 백성들을 수탈하던 분호조가 철폐되었으니, 어찌 부민들의 얼굴이 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추켜세우면서 감영에 이르러, 형식적으로 공무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주안상을 들였다.

그리고 빈병이 늘어나 양편 모두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왔을 즈음 장만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부원수가 감영을 방문했었는데, 혹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전혀요! 예전부터 원수께 확실한 도움을 드리지 못해 가시방석이었는데, 부원수 덕분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습니다.”

“그래요?”

장만이 눈썹을 치켜뜨며 재차 묻자, 이홍주는 질색하면서 손을 저었다.

“염려치 마십시오! 부원수가 소관이나, 원수께 폐가 될 만한 언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에요.”

“부럽다니요?”

“유능한 수하를 두지 않으셨습니까.”

이홍주가 덧붙인 말에 장만은 과연 별일은 없었겠구나, 안심하고서 말했다.

“감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덕분에 근심을 덜었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홍주는 당차게 확언하였다가, 이내 안색이 바뀌어서는 한숨을 흘렸다.

거듭 괜찮았다고 했으니 그 문제는 아닐 터인데…….

“……혹, 감사께서도 근심이 있으십니까?”

이홍구는 입맛을 쓰게 다시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일전에 모문룡의 차관이 군영을 방문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아니요! 뭐, 이 사람이었더라도 별 수 있었겠습니까?”

일군의 원수 앞에서도 안하무인인 작자를 어떻게 감사가 저지할 수 있겠나. 정말로 별 수 없던 상황인지라, 새삼 오늘날에야 언급하는 건 뒤늦은 사과를 위함만은 아니리라.

“한데, 무슨 일입니까? 그 작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라도 쳤습니까?”

“그게…….”

시종 온화했던 이홍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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