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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8화 (58/380)

인조, 명군이 되다 58화

“전하께 적절한 지원을 받아내지 못했다며 오해를 더 키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징발에 협조하라지 않겠습니까?”

평안감사 이홍구의 말에 장만은 황당할 뿐이었다. 침략자도 아니고 남의 나라에서 무슨 징발 타령인가?

장만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동안 이홍구가 덧붙였다.

“말로만 징발 운운하였다면 차라리 치부하고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한데 백성을 윽박질러서는 시종처럼 대동하고서 관창官倉의 재물을 강탈하려 들었으니…….”

이홍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장만은 긴장해서 물었다.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아무리 본질은 왈패나 다름없다지만 시가달은 모문룡의 차관이었다. 그것을 이홍주도 모르지 않는다는 듯 질색했다.

“군졸은 대동하였으니 무찌를 수는 없으니 일단 포위했지요. 그러니 차관이 칼을 뽑아 들고서 겁박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비키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고……. 아예 사람이기를 포기한 건 아닌지 끝내 소관을 베지는 못하였으니 망정입니다.”

이홍주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붙들린 백성들은 해산시키고 차관 일행들은 엄중하게 호위하여 돌려보냈지요.”

장만은 쓰게 신음하자 이홍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장 차관의 무리는 물러났다지만, 도적 같은 작자들이 원을 해소하지 못하고 가게 되었으니 필경 다시 돌아와 재물을 채근하지 않겠습니까?”

“……음.”

“저들이 차마 소관은 베지 못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모문룡 측이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면 이번에는 방해받지 않도록 조선 측에 알리지 않을 터다.

오직 미약한 백성들만이 저들의 ‘징발’에 맞서게 될 텐데, 과연 우국의 고위 관료 앞에서 칼을 뽑아 드는 작자들이 백성들 앞에서는 친절할까?

딱, 따각…….

장만의 손끝이 소반을 두드렸다.

모문룡 패거리의 행패는 부원수의 일과 달리 조선 측 관리들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로써 다스리자니 저들은 도리를 망각한 지 오래다. 폐주가 가도에 모문룡 패거리를 들여놓고서 반정으로 쫓겨나기까지 한참이나 분수에 넘치는 대우를 해주었으니까.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거듭 수신하였다면 모를까, 도리어 인면수심으로 전락하여 벌이는 일이 이와 같은데 과연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겠는가? 대개 짐승에게 통하는 수단은 정해져 있는 법이었다.

‘전하께서는 이처럼 될 줄 아셨다는 말인가.’

밀담을 나누었을 때는 그저 터무니없는 일로 치부하였지만, 보라. 지금은 진정으로 모문룡 패거리가 변방을 노략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계절 이른 한풍이 누각에 맴돌았고, 급변한 분위기가 어색해질 즈음 장만이 고개를 들었다.

“해반의 방비를 강화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강화를 하더라도…….”

이홍주가 질색하고서 말끝을 늘어뜨렸다. 모문룡 패거리는 단순한 적이 아니니까. 방비를 강화하는 것과 저들과 맞서는 건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왕명이 있었던 장만으로서는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작정 싸움을 벌이자는 게 아니라, 위세를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

장만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홍주로서는 위세 운운이 가당찮을 따름이었다. 저들이 금수나 다름없다지만 진정 금수는 아닐진대 두 팔 벌리면 멧돼지가 달아난다는 소리도 아니고 병사 몇 세워두어서 겁먹겠는가.

그리 생각하는 것이 장만의 눈에도 보였던지라, 그는 옅은 헛기침과 함께 어조를 바꾸어서 말했다.

“내 감사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안의 경계를 강화하세요.”

“……?”

“단호하게 대응하셔야 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이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해주세요. 즉각 원군을 보내겠습니다.”

장만이 180도 달라진 태도로 확언하자 이홍주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일군의 도원수라지만, 모문룡 패거리와 교전을 일으킬 자격은 없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하는 말인가?

이홍주의 의심에 장만이 속삭였다.

“이 사람이 부임하기 전 전하와 대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

그 한 마디로 이홍주는 쓴 물 내려간 사람처럼 세상 편해진 미소로 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도원수 대감의 당부를 따라야지요.”

뒷배로 어심이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왕이라고 명나라와의 충돌에 있어 정치적으로 무적은 아니겠으나, 먼저 쳐들어가자는 것도 아니고 대응 정도야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반드시 책임져야만 했다. 나라의 주인이 신하와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거늘 무책임하게 당하고만 있으라 할 수는 없잖은가?

금상이 이미 각오하였다니 이홍주로서는 도리어 속이 시원했다.

자신이라고 칼을 뽑아 들 줄 몰라 목숨으로 막아섰겠는가.

만약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실속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명군의 거죽만 덮어쓴 도적에 불과한 모문룡 패거리는 두려울 게 아니었다.

“부원수가 일을 잘 중재하여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신 것이 참 다행이었는데, 도원수 대감께서는 저의 이십 년 묵은 체증까지 없애주시니 소관이 북방군에 진 빚이 적지 않습니다.”

“이 사람 역시 감사 덕에 큰 근심을 덜었으니 치사만 받을 입장은 아닙니다. 다 이렇게 상부상조하는 것이지요.”

“백번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마음이 가벼워진 이홍주가 환하게 웃자, 마찬가지 기분이었던 장만이 술병을 내밀고서 말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떨쳐냈으니, 편한 마음으로 자리를 즐깁시다!”

“예에!”

* * *

절기는 처서處暑를 지나 매섭던 더위도 한풀 꺾이고 너른 들판에는 금빛이 스며들었다.

외방의 장수들은 가슴 푸근해지는 광경을 앞두고서 경계를 낮췄다.

농번기 말미에 이르러 바빠진 향군을 닦달하기 곤란해진 탓도 있으나, 수확을 앞둔 시점에서는 도적과 오랑캐들의 기세도 여름철 더위처럼 꺾이는 덕이었다.

저들이라고 목숨 건 노략질만을 생업으로 삼지는 않기에.

그러나 식량 사정이 나빠지는 춘궁기가 되면, 향군鄕軍도 다시 창칼을 들어야 하리라.

이 같은 판단으로 각지의 군영이 숨 고르기에 들어갈 동안, 어느 섬의 무리들은 대개의 예상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에게 교훈을 내리시겠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경중명耿仲明이 말했다. 모문룡 휘하에서 군수를 맡은 인물로, 주변에는 모문룡과 이하의 다른 참모들이 향후 전략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화제는 단연 조선의 태도였다. 왕이 바뀐 뒤로 극도로 무례해져 줄곧 보여온 성의도 상실한 채 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당장 모문룡과 참모들이 모인 장소도 조선의 재물을 들여 지었고,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도 조선에서 바친 것이었으니, 조선이 이제 와 안면박대하는 건 생존에 대한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결행하시지요!”

군사의 조련을 맡은 공유덕孔有德이었다.

그는 군직에 오른 지금까지도 글자를 익히지 않아, 혹은 못 하여서 일자무식이었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모문룡이 양자로 삼아 크게 기용한 자였다.

자질이 이러한지라 공유덕도 다른 참모와 마찬가지로 은혜를 망각한 지 오래여서, 조선의 이 같은 행보도 그저 괘씸하게만 여길 따름이었다.

“우리가 저들의 변경을 지켜주고 대국과의 소통을 도맡고 있는데, 갑자기 입을 싹 닫다니요?!”

쾅!

공유덕은 탁자를 내려치고는, 모문룡에게 몸을 뻗으며 고했다.

“이게 다 지금 조선의 왕이 반란을 일으켜 자리를 차지한 놈이라 그렇습니다. 근본이 없는 만큼 사리분간도 안 되는 것이지요!”

공유덕의 일갈에도 모문룡은 턱만 문질렀다.

“총병 어른……. 교훈을 내리자는 게 어디 우리를 위해서겠습니까? 조선이 지금 같은 불충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황제께는 물론 조선에게도 좋은 일이겠습니까? 교육은 이를수록 좋습니다!”

공유덕의 채근하자, 모문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곁에서 난리를 피워대는 공유덕이 아니었다.

“중명仲明?”

“예.”

“정작 가달이 박대를 당하고 왔을 때는 내게 참으라고 하지 않았나? 왜 지금은 입장이 달라진 거지?”

“추수가 머지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중명은 허리를 숙이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그때 조선을 징치하였다면 얻을 것이 많지 않았을 테고, 또 조선의 왕이 불충한 태도를 고쳐먹지 않는다면 이즈음에는 경계만 심해졌을 텐데 지금 나선다면 곧 있을 수확의 소출을 요구할 수 있으니 참으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흠.”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지요.”

“본국에서 난리 치지 않을까?”

“새로 즉위한 조선 왕이 후금과 결탁할 조짐이 있어 선제 조치했다고 둘러대십시오. 이전 조선 왕은 그런대로 잘 따르지 않았습니까?”

옛 조선의 왕은 명나라에 잘 보이고자 막대한 뇌물을 살포했고, 개중 상당분은 모문룡과 동강진이 착복하였으나 일부만은 어쨌건 해로를 통해 본국까지 전해졌다.

“구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금상은 그렇지 않고요.”

“그렇지.”

“설령 조선의 왕이 조정에 항의하더라도, 폐하와 대신들이 고분고분했던 구왕을 쫓아내고 불충하는 찬탈자의 말을 맹신하겠습니까?”

“……아니겠지.”

그제야 모문룡은 그림이 제법 갖춰졌다는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경중명이 보기에 자신의 계획이 9할은 채택된 듯하여, 이쯤에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저들은 응분을 치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총병을 잘 받들어 모셨다면 이런 논의가 나올 일도 없었겠지요.”

“흐흠…….”

* * *

가도를 마주한 철산부의 한 해안가.

그곳에서 나고 자란 춘식과 대식은 평소처럼 해변으로 나와 해초를 줍고 있었다.

“하얀 고봉밥에 뜨끈한 고깃국 해서 먹으면 여한이 없겠네. 도대체 언제까지 미역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지.”

“어업계漁業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러고 살아야지.”

어선과 어망이 값비싼 탓에 가난한 어민들은 계를 만들어 배를 마련했다.

하지만 계에 들어가는 것도 빈손으로는 불가능했다.

“하늘에서 배 한 척만 툭 떨어져도 앞으로 착하게 살 텐데.”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 테니 배 한 척 달라 발원하면 하늘이 들어주겠나? 괘씸하다고 벼락만 내리지 않아도 다행이지.”

대식의 쓴소리에 춘식은 허리를 세웠다.

춘식은 하늘을 보며 벼락이 떨어지는지 보자, 시답잖은 농을 할 생각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어어…….”

춘식의 실없는 반응에, 대식도 실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새 벼락 한 방 맞고 정신이 나가아았……?”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나는 수평선에서 한 척도 아닌 수십 척의 배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배마다 펄럭이는 색색의 군기를 보아 전선戰船은 분명한데 죄 작고 납작한 것이 조선의 전선은 확실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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