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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9화 (59/380)

인조, 명군이 되다 59화

“뭐, 뭐야……? 왜놈들인가?!”

춘식이 목석처럼 굳어버린 채 얼빠진 소리를 내자 대식은 미역 담은 바구니를 내던지고 물러났다.

“무슨 한심한 소리인가! 가도의 명나라 놈들이잖나!”

“가도의……. 아아!”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도망치게!”

“……명나라면 같은 편 아닌가?”

“한심한 소리! 명나라 놈들과 엮여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네!”

임진년 왜군에 이어 들이친 명군의 행패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양반님네들이야 은혜를 입었다지만 그건 양반님네들의 사정.

가족과 이웃을 수호하고자 창칼을 들었던 가장과 사내들은 명군의 수발이나 들어주는 시종으로 전락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무수한 가정이 배를 곪아가면서도 지켰던 종자도 명군을 먹인다며 빼앗아가니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었다.

이 같은 과거를 모르지 않았던 대식은 숲으로 뛰었다.

덩그러니 해안에 남겨진 춘식은 다가오는 명나라의 전선들과 내던져진 해초 바구니를 번갈아 보다가, 주춤거리면서 이내 대식을 쫓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대식과 춘식이 내던진 바구니 앞으로 전선들이 선수를 들이쳤다.

“이런, 제기랄!”

뭍으로 뛰어내린 공유덕이 신경질적으로 투구를 내던졌다.

“아까 그놈들이 내가 오는 걸 사방팔방에 떠들어대겠군! 서둘러 움직여라! 조선 것들이 어찌할 새도 없이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한다!”

* * *

도망친 조선인을 의식한 공유덕은 원래부터 거의 있지도 않았던 인내심과 침착함을 상실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기로 했고, 외방의 속민들이 징발에 저항하자 곧바로 징죄했다.

덕분에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약탈에 취한 명군들이 창칼을 내지르고 불을 붙이면서 연기와 함께 비명이 퍼졌으나 공유덕은 그런 사소한 문제는 도외시한 채 마을 한가운데 공터에 모아놓은 약탈품을 편치 않은 인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고작 이게 전부인가?!”

“……예.”

“누가 딴 주머니 차지는 않았겠지!”

공유덕이 핏발 선 눈으로 돌아보자 장교들이 시선을 피했다.

몰래 딴 주머니를 차고자 해도 작고 값비싼 귀속은 한 톨도 나오지 않은 마을이다. 그야 번성한 거읍도 아니고 변방의 일개 어촌에 불과하니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니 장교들로서는 억울한 의심이었으나, 그것에 불만을 드러내어 좋은 일이 일어날 분위기는 아니었다.

“젠장!”

공유덕의 발길질에 독이 깨지며 염장한 생선들이 흘러내렸다.

“나는 고작 밥반찬이나 필요해서 이 촌구석에 행차한 게 아니란 말이다! 고작 이따위 성과를 내고서 무슨 면목으로 귀환하라는 말이냐!”

기실 공유덕의 임무는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일벌백계 차원에서 몇 명만을 본보기 삼아 죽인 뒤, 약간의 물품만을 징발하고 가도로 귀환함으로써 조선 조정은 감히 저들을 막을 자격도 능력도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더 피 보기 전에 곧 있을 수확의 소출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공유덕은 기왕 군사를 내어 변방의 괘씸한 왕을 징치하고자 행차했으니 형식적인 성과만을 가지고서 귀환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호주머니부터 두둑하게 채운 다음 승전보와 함께 개선해야지 않겠는가? 그것이 동강진에서 자신의 위상과 체면을 드높일 방법이었다.

잔머리나 살살 굴려대는 놈의 생각이야 어떻건.

“더 깊게 들어가야겠어!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공유덕의 일갈에, 한 장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공유덕의 시선이 근처의 무릎 꿇린 조선인들에게로 향했다.

말이야 포로일 뿐 실상은 노예로 삼고자 저항하는 장정과 노인들은 죽이고 나머지를 붙잡아 놓은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평화와 가족을 잃고 사로잡힌 조선인들은 공유덕에게 자비를 애원하고 간청했으나, 공유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조선어를 몰라서는 아니었다.

“시끄럽게 빽빽대는군……. 이런 짐 덩이들을 데리고 움직일 수는 없다! 모조리 죽여 버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장교가 칼을 빼 들고서 포로들에게로 향했다.

비명과 애원이 한층 더 거세졌으나 공유덕은 이미 포로들에게서 시선을 뗀 채 안장에 오르는 중이었다.

더 많은 승리와 전리품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하였으니, 공유덕의 시야에서 못마땅한 건 오직 약탈에 취해 미적대는 병사들의 한심한 꼴뿐이었다.

* * *

철산부사가 소식을 듣고 군사와 함께 현장에 들이쳤을 때.

공유덕의 무리는 이미 뭍을 떠난 뒤였다. 그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폐허로 전락한 마을과 거리마다 흩뿌려진 피와 시신들, 그리고 수확을 앞둔 채로 망가진 논밭뿐.

곳곳에서는 가까운 사람을 잃은 이들의 대성통곡이 줄을 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철산부사와 휘하의 군사들은 입술을 씹은 채,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오후가 되어서는 북방군의 지휘부와 평안감사 이홍주가 현장에 합류했다.

그동안 철산부사가 참상을 최대한 정리하였으나 폐허의 지경이 달라질 수는 없었고, 사람들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일대에는 타다 남은 잔해들 사이로 울적한 침묵만이 감도를 따름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마주한 장만 앞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의 이홍주가 입을 열었다.

“각 읍 수령들에게 예외를 두지 말고 방비를 단단히 하라 일러두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아닐 듯하외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모毛군이 치고 빠졌다는 건 장만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철산부사가 미처 참극을 막아내지 못한 사정이었고, 이는 평안감사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정이 무슨 소용일까?

변명을 듣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뿐더러, 누군가 변명을 듣더라도 그게 장만 자신은 아니리라.

“병사들을 해안에 주둔시키고, 배를 띄워 가도를 감시해야겠소이다.”

“수사에게 요청하겠습니다.”

장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감사께서는 감영으로 돌아가서 일을 보시오. 이곳에서는 놀란 수령들과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어려우니.”

“그럼 도원수께서는…….”

“이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주둔해 가도를 감시할 거외다. 전하의 의향에 따라서는, 곧장 배를 타고 가도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러겠소이다.”

이홍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장만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그간 조용히 있었던 정충신을 돌아보았다.

“부원수.”

“말씀하십시오.”

“내가 평안도에 오기 전에 전하와 대면할 기회가 있었네.”

“예.”

“그때부터 전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셨네. 나는 믿지 않았지. ……어떻게 받아들여도 좋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어심이 확고하셨다는 거야.”

“가도 정벌 말입니까?”

장만은 그동안 부원수라고 밀명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빚을 진 평안감사에게도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간접적으로만 왕의 의사를 드러냈을 뿐.

그러나 막 이홍주와 오간 장만의 대화는 내막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사건에 가까웠습니다.”

정충신이 위로를 건네자, 장만은 쓰게 웃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이상하군.”

“철산부사도 즉각 움직였는데 도적의 꽁무니를 잡지 못했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가도와 인접한 모든 해안마다 병력을 주둔시킬 수도 없지요.”

정충신은 장만을 위로하면서도 내심 생각했다.

자신이 왕의 확고한 예견을 들었다면 어떻게든 대응을 준비했을 거라고.

미리 수사에게 도움을 청해 가도 주변에 배를 띄웠다면 피해를 줄이고 대응마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지적이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후회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지요. 마치 변명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듯이 말입니다.”

“…….”

“지금 원수께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북방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감께서 좌절한 모습을 보인다면, 제장과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겠습니까.”

“부원수의 말씀이 옳네.”

“전투를 앞두었다면 병사들에게 교전의 가능성을 밝히고, 즉각 실전에 대비한 훈련에 돌입하는 게 맞습니다.”

연이은 정론에 장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동원하게.”

“화약을 많이 쓸 생각입니다.”

정충신의 단호한 발언에 장만이 일순 흠칫했다. 화약은 고가치 소모성 전략 자산이니까.

그간 북방군이 설립된 이래 강도 높은 훈련이 거듭되었으나 화약을 쓴 적은 없었다. 이유야, 시쳇말로 먹고 죽을 화약도 없는 탓이었다. 명 황제가 보낸 초석으로 비축분이야 넉넉하다지만, 쓰는 건 쉽고 다시 채우는 건 어려우니까?

그런데 실전도 아니고 훈련에서 화약을 녹이겠다니.

장만은 우려하면서도 겉으로 밝히지는 못했다. 제 입으로 필요한 건 모두 동원하라며 방금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만의 우려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아도 얼굴에는 근심하는 낯빛이 역력하니, 정충신이 이유를 말했다.

“새로운 공법으로 가공된 화약은 보관성만 아니라 성능도 크게 개선되어, 이전 교범대로 장약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병조에서야 바뀐 지침을 하달했다지만, 포수들에게는 막연하게 몇 돈에서 몇 돈으로 바뀌었다고 말로만 전하는 것보다 실제로 사격해 보는 편이 빠르게 손에 익겠지요. 또한 실전에 압도되어 경거망동하는 실수도 줄어들 것입니다.”

오위제五衛制와 갑사甲士로 대표되었던 조선의 중앙군은 임진년 대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붕괴했다.

기존의 중앙군이 조직과 구성원 모두 사라지자, 조선은 새로운 중앙군의 육성과 더불어 달라진 국가 상황과 전쟁 양상의 반영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설된 도감군都監軍은 임진년 이전부터 왜구와 교전했던 명 장수, 척계광의 최신 절강병법을 기반으로 한 삼수병三手兵 체제로 구성되었다.

삼수병이란 각기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사용하는 사수射手, 창검을 사용하는 살수殺手를 일컫는 용어로, 절강병법은 이들 삼수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해 각 병종의 장단을 강화 및 보완하여 적을 상대하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임란 중 신설된 도감군은 전쟁이 끝나자 급속도로 유명무실해졌다.

오죽하면 사관이 삼수군은 모두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고 첨언을 남겼을까.

그래서 정충신은 북방군을 혹독하게 훈련해 왔다. 북방군은 도감군의 삼수병 제도를 그대로 본떠 만들었으니, 군사를 성실히 조련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례가 현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강도의 훈련은 반복하면서 사람만 굴리고 물자는 아낀다면, 정녕 그 의도가 북방군의 전투력 강화라고 할 수 있을까?

기실 오래전부터 포수들에게 실제 사격 연습을 시키고 싶었던 정충신이다.

다만 열의만으로는 화약을 보충하지 못하니 못내 미루다가 실전을 앞둔 지금에야, 명분과 효용 모두를 잡고서 겨우 해보려는 것이었다.

부원수의 의지가 이러하니, 장만이라고 마냥 화약만 아낄 수는 없었다.

“알겠네. 편한 대로 쓰시게.”

분명 중앙에서는 화약이 뉘 집 안방에서 굴러다니냐고 따져 물을 테지만, 그런 걸 상대해 주는 게 원수의 역할 아니겠는가. 허락이 떨어지자 정충신은 눈을 감고서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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