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60화
그로부터 며칠 뒤.
두다다다다…….
철산부 앞바다에서 콩 볶는 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그럴 때마다 뭍에서는 초연硝煙이 구름처럼 일어나니, 멀리서 해도海島의 무리가 보기에는 분위기가 보통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 멀리까지 어렵사리 시야를 밝히지 않아도 당장 섬 주변에는 조선의 군선들이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상황이 이러한지라 등골이 서늘해진 동강진의 지휘부는 연일 굳은 얼굴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군병은 아직도 돌아갈 조짐이 없나?”
유일하게 높이가 다른 상석에서 모문룡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정말 알지 못하여 의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요, 누구 하나라도 제발 자신의 짐작과는 다른 소리를 해주기를 바라고서 괜히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자무식으로 눈이 옹이구멍이나 마찬가지인 공유덕조차 상황을 모르지 않았으니, 모문룡이 듣기 바라는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고 회의장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조선군이 막 시위를 벌였을 때는 그러려니 했던 모문룡과 이하였다. 꼴에 변방이 노략되기는 하였으니 어떻게든 반응은 있으리라 짐작했으니까.
그러나 뭍에서 실전을 각오한 것이 분명한 훈련이 거듭되고, 바다에서는 철저한 감시가 이뤄지는 동안 조선은 어떠한 외교적 접촉도 보내지 않았다.
쉽게 풀어보자면 동강진은 맞을 만한 짓을 저지른 참인데 조선은 군소리 삼가고서 주먹만을 쥐락펴락하는 꼴이라,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곧 벌어질 일이 어렴풋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중명仲明!”
모문룡이 그나마 머리가 좀 돌아간다는 참모를 불렀다.
“……대인께서는 조정의 관직을 지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조선은, 후금을 앞둔 채 본국과의 관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나를 치지 못할 거다, 그런 뜻이야?”
“가능성이 작다는 뜻입니다.”
“그럼 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경중명은 누군들 이 상황에서 ‘절대’를 보장하겠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불안에 떠는 모문룡의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못했다.
“사신을 보내심은 어떻겠습니까.”
“……조선이 작정했다면 사신도 소용없는 것 아닌가?”
“정녕 작정했다면 무엇인들 소용 있겠습니까. 저들의 생각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일단 저들이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알아야, 다그치든 대비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모문룡은 자신이 세상 불합리한 일은 다 당한다는 듯 괴로운 인상을 지었다. 그리고 동강진에 존속의 위기를 가져온 공유덕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공유덕이 시선을 피하자 입을 열었다.
“그래. 보내보자. 누가 좋겠는가?”
경중명이 허리를 숙이고서 작게 답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좋겠습니다.”
조선이 기어코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자리.
그 말에 모문룡과 제장은 일제히 주변을 살폈다. 마침, 일전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귀환한 자가 지금 자리에 없었다.
시가달.
따지자면 이 모든 게 그의 무능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시가달이 조선왕을 잘 다뤘다면 모문룡은 비어가는 창고에 분개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모문룡을 달래고자 시가달이 위험한 제안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이를 수행하게 된 공유덕이 쓸데없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모두의 이해관계가 이렇게 들어맞으니 모문룡은 마음을 굳혔다는 듯 등받이에 기대고서 답했다.
“자네가 책임지고 보내도록 해.”
“받들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예.”
조선의 저의에 대한 건과 사신의 건이 모문룡의 쓴 한숨과 함께 일단락되자 눈치만 보던 공유덕이 제 발을 저렸다.
“염려치 마십시오, 총병 어르신. 설령 조선 놈들이 동강진을 위협하더라도 섬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가도에 머무르는 명나라의 유민들은 많았고, 모문룡과 휘하의 장수들은 마음껏 병사들을 징발해 쓰고 있었다. 섬 주변만 철통같이 지키면 조선군은 상륙할 수 없으리라.
이에 모문룡이 받아 물었다.
“그래. 조선이 섬에 한 발도 붙이지 못한다고 치자.”
“예.”
“대신 우리도 섬 바깥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
“먹고 마셔야 할 주둥이는 수없이 많은데, 농사도 똑바로 안 지어지는 이 섬에 갇히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이야!”
모조리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수백 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뼈에 한 줌 붙은 고기로 전락한 동족의 시신으로 연명하게 되겠지.
그동안 본국과 조선이 보낸 양식과 재물은 막대하였으나 죄 사치로 허비해 버린 모문룡과 동강진의 식량 사정은 좋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일 없으면 다 나가 봐! 혹시나 뾰족한 수가 생기면 찾아오고!”
“예.”
휘하의 장수들이 볕이라도 본 쥐새끼들처럼 흩어지자, 모문룡은 자신이 상정한 최악의 상황이 실현될까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씹었다.
* * *
가을도 중반에 이르러 선선해진 한양에서, 갑자기 모두가 반신반의할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게, 명나라가 왜 조선을 공격했다는 말인가?
명이 후금에 빼앗긴 요동 땅을 내버려 둔 채 육로마저 끊긴 조선이나 친다는 건 미치지 않고서야 상상조차 힘든 발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소문을 반신반의한 건 아니었다.
소문의 진원지인 철산부의 수령은 물론, 평안감사와 북방군 도원수마저 입을 맞춘 것처럼 ‘믿기 힘듦은 아오나,’ 라는 같은 서문으로 동일한 내용을 치보했으니까. 비현실적이라도 일단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 이원익은 재상급 임시직을 파견해 전말을 상세히 파악한 뒤 처결하기를 주문했다.
사건의 수위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있었으나, 요체는 북방군 도원수와 평안감사가 이미 높은 수위로 대응했는데 중앙에서까지 긴장감을 얹으려 들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이에 경관京官 대부분은 당색을 막론하고 이원익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물리치고 곧장 삼도수군통제사에게 명하여 하삼도의 수군을 평안도로 올려 보냈다.
가도를 철저하게 봉쇄하자는 도원수의 제안을 따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외교 파탄을 우려하였으나 왕의 명령은 뒤집히지 않았다. 저들처럼 쳐들어가 학살을 벌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봉쇄만 하는 데 무슨 문제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어전 회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원익의 요청과 함께 시작했다.
“시가달이 모 장의 서신을 가지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어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모두의 이목이 모인 가운데 용상의 왕이 답했다.
“들라고 하세요.”
전언은 이원익이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모문룡의 차관인 시가달이 좌우로 조선의 위사를 낀 채 들어섰다.
시가달은 조선의 수군이 제 배에 탄 병사들을 쏴 죽이고 자신을 사로잡기 전부터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덕분에 이전과 달리 몸가짐은 극히 조심스러웠으며, 감히 용안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소인 시가달이 조선국 전하께 인사 올리옵나이다.”
“일전에 그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찾아왔었는데, 참으로 공교롭습니다.”
“……소인이 그 시가달이옵니다.”
“그래요? 일전과는 언행이 너무 다르셔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왕은 마냥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면에 드러난 화색과 달리 발언의 의도는 너무나 명확했던지라, 몇몇 신하는 민망함에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도 간혹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헛기침을 터뜨리는 자가 있으니 왕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환절기라.”
시가달이라고 눈과 귀가 장식은 아니었으나 그저 공손하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는 기체후 만강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시가달은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바쳤다.
“모 총병의 서신입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이 편지를 가져다 왕에게 바쳤고, 왕은 곁눈질로 편지를 확인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이항복에게 돌려주었다.
그 광경에 시가달의 호흡이 가늘어졌다.
“…….”
아무리 모문룡 패거리가 난처해졌다고는 하나 개인적으로 보낸 연통이 아니거늘 이같이 취급하였으니까.
어쩌면 그로써 왕은 답신을 갈음하였는지도 몰랐다. 공손하게 글귀를 주고받을 호시절은 이미 지났으며, 모문룡과는 반드시 끝을 봐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설령 왕의 의사가 그 같을지라도 시가달은 뻔뻔하게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총병은 철산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크게 유감을 표하였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약조하셨습니다.”
“유감이라!”
“……예.”
시가달도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동안 대후금 동맹을 빙자하여 막대한 재물과 식량을 지원받아놓고, 이제는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변방을 약탈해 버리지 않았던가?
유감 운운할 게 아니라 개처럼 바짝 엎드리고서 자비를 구걸해야 할 판이었다.
뒷배는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고 가까운 조선은 주먹을 들었으니까.
느긋하게 또 황제나 대명을 팔아먹으려다간 면상이 찌그러질 판이거늘 이 지경이 되어서도 모문룡은 자존심을 꺾지 못했다.
모문룡은 여전히 조선의 왕을 자신보다 아래로 생각했으니까.
그간 모문룡에게 조선의 왕은 화수분 같은 존재였다. 흔들고 걷어찰수록 더 많은 재물을 토해냈는데, 이제 와 조금 위험해졌기로서니 한참 깔봐 온 호구에게 엎드려 자비를 간청할 수 있겠는가?
쉬운 일은 아니었고, 모문룡은 해내지 못했다.
이에 왕은 느긋하게 일렀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졌으나.”
“나는 앞으로도 가도를 봉쇄할 예정입니다. 조선의 왕이 조선의 군사로 조선의 땅을 봉쇄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명과의 관계를 재고해 주십시오, 전하.”
“흠. 혹 총병이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아 철산부를 공격했답니까?”
당연히 아니었다.
“폐하께서 이 땅을 정벌하기로 마음먹으신 게 아니라면, 총병이 대국의 동맹을 독단으로 공격한 건 반역이지요. 내가 황상에게 충성하는 신하로서 역도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관계를 재고하라는 말입니까?”
시가달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총병이 비록 대죄는 저질렀으나 직접 폐하께 충성하는 신하이니, 만약 전하께서 나서서 벌하신다면 오해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흐음.”
“전말을 가감 없이 밝혀 합당한 결과를 보여드리겠으니, 부디 성심으로 재고해 주십시오. 세상의 유이한 문명국이 발호하는 대적을 앞둔 채 이 같은 일로 불화가 생기는 건 천하 만방에 이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가달은 간청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어쨌거나 그의 발언이 완전히 헛소리만은 아니었던지라 신료들은 용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보를 단행하겠다면 외교가 어디까지 악화할지 모르나 인내심을 발휘하면 이 이상으로 나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왕은 저울질을 끝낸 지 오래였다.
“이국의 무고한 백성들을 참살하고도 고작 유감이라는 심성을 보니, 역적들은 참으로 극악하여 한 시라도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
“그러나 만에 하나 도독이 생각을 고쳐먹고 자신을 포박하여 나의 궁궐 앞에서 대죄하겠다면, 차마 죽은 백성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으나 차관의 말대로 천하의 안녕을 위해 인내심을 가져보겠습니다.”
시가달은 감히 전언하겠다 확언하지 못했다. 모문룡은 도리어 조선 왕이 분수를 모른다며 방방 날뛸 테니까. 그리고 대책도 없이 자신의 목부터 날려 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시가달이 외통수에 이르러 유구무언이 되자 조선 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거봐.”
“……?”
“빈말로도 전하겠다는 소리가 안 나오는 걸 보니 동강진 내부가 어떤지 여기서도 알겠다! 그런데 뭐, 내가 참으라고? 또 때리게?”
왕은 당치도 않다며 시립한 신하들에게 외쳤다.
“너네도 정신 똑바로 차려! 면전에서 칼을 맞았는데 아직도 눈치나 살살 보고 있네, 등신들 같이!”
좌중이 경악하였으나 일갈은 그치지 않았다.
“고작 그따위 정신 상태를 가지고서 자랑이랍시고 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그러고도 천이백 만 백성 중에서 제일 잘난 놈들 모아놓은 게 맞아?!”
노기 가득한 왕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려대자 신하들은 숨을 삼키며 허리 숙였다.
반박이나 망신에 대한 감정이 어떻건 당장 부는 태풍은 피해야지 않겠는가. 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시가달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저놈은 가둬 버리고, 도원수에게 똑바로 전해! 가도에서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