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62화
한참을 내달린 장만과 기병대는 바짝 긴장한 무리를 마주했다.
죄 무장한 병사들이었으나 복식은 외인이 아니었는데, 다들 땀범벅이 되어서 숨을 헐떡이며 어딘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대오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도원수 대감!”
삼도수군통제사 이수일이었다. 수군을 지휘하고 있어야 할 그가 병력과 함께 지상을 내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만은 고삐를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 통제사께서 여기서 뭐 하고 계시는 게요! 모 적敵은 어디에 두고!”
“모문룡은 바다에 있는 수군이 사로잡을 겁니다! 소관이 선단을 쫓아왔는데, 뒤늦게 배를 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만은 당황하다 못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선단을 쫓아왔다면 진즉 부원수와 합세해 싸우고 있어야지, 왜 여기서 수군과 내달리고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장만의 얼굴에 드러나자 이수일이 질색하며 말했다.
“그 패잔병 찌꺼기들이 다 뒤져보겠다는 심산인지, 저들이 타고 온 배에 불을 놓아버렸는데, 또 바로 근처에 배 댈 곳도 없어서 이렇게 멀리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수일의 말에 장만은 쉽사리 불길을 등지고서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해적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해안에서 배수진도 아닌, 배화진이라니!
“원수께서 기병을 이끌고 나타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해적들이 바닷가에 꽉꽉 들어찼어요, 부원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먼저 가겠소!”
“예!”
장만이 세게 박차를 가하자 말은 기력을 짜내 내달렸다.
이어서 기병들이 도원수를 쫓아가는데, 빠르게 뒤편으로 멀어지는 이수일이 멀리서 외쳤다.
“쫓아가겠습니다……! 우리도 계속 가자……!”
분명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분전의 소음은 작아지고 있었다.
막 이수일에게 전황을 전해 들은 탓일까.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장만은 동행한 제장과 기병들을 향해 외쳤다.
“소리 질러라!”
“와아아아아!”
이에 호응하듯, 원수기도 돌풍을 헤치며 파드드드 울었다.
그 순간이었다.
장만이 숲을 돌아 나서는 순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전장이 펼쳐졌다.
막 함성을 내질렀기 때문인가. 조선군과 해적들 모두 굳어버린 채로 장만과 기병대를 목도했다.
양편의 안색에 희비가 교차했다. 조선군은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었고, 해적들은 죽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단숨에 전장으로 치달은 기병들은 북방군 생존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해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긴장으로 얼어붙고, 공포로 등을 돌린 해적마다 말발굽과 환도가 작렬했다.
해안가의 자갈들이 말발굽에 바스러질 때마다 해적들의 척추와 안면도 뭉개졌고 사지와 머리가 몸뚱이에서 분리됐다.
장만과 기병들이 등장한 순간 전투는 끝나 있었다.
전장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해적들이 있었으나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들은 볕 아래 바퀴벌레들처럼 흩어지기 급급했다.
어떤 해적들은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한 차례 불이 놓인 해안가에서 해적들을 기다리는 건 타다 남은 숯덩이들뿐이었다.
해적들은 그런 숯덩이 위에라도 몸을 내던지고서 해수면을 긁어댔다.
필사적인 움직임이었으나, 화마는 가셨을지언정 타다 남은 열기마저 가신 건 아니었다. 해적들은 이내 옷을 태우고 살점으로 파고드는 열기를 느꼈고, 살아서 해변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어떤 해적들은 숲으로 내달렸다.
나무가 많은 숲으로 피신하면 일단 기병만은 따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해적들은 우르르 전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낙오자가 무수히 발생했으나, 끝내 소수만은 그늘로 파고들 수 있었다.
몸을 내던지듯 쓰러지고 주저앉은 패잔병들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터질 것 같이 박동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저들이 이미 명나라에 도착이라도 한 것처럼 희망찬 미래를 그려 나갔다.
각자 교전한 경험도 많고, 지옥 같은 전장에서도 탈출해 냈으니 조금만 경험을 되살리면 장교가 될 수 있으리라. 싸움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면 한적한 곳에 터를 잡아 조용히 사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와 달리 몸뚱이는 여전히 지옥과 같은 전장에 있었다. 기병들을 쫓아 뒤따라 때마침 전장에 합류한 이수일의 수군들이 수풀을 헤쳐왔고, 패잔병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치 않은 싸움을 일으킨 자들은 이제 당하는 쪽이 되어서, 목숨을 건 술래잡기를 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수가 적발되어 전공으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에도, 극소수만은 다수의 희생을 발판 삼아 더욱 깊숙이 숨어들었으나 그들이 다시 희망찬 환상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병들을 쫓아온 북방군 보병들이 포위망을 좁혀왔으니까.
그리고 교전 한번 없어,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 못한 북방군 보병대의 군관들은 패잔병 사냥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 * *
한양.
오곡백과의 수확을 앞둔 이 시기. 장안의 화제라면 본디 군역의 개정과 선혜법 확대의 실효성이어야 했다.
길게는 수백 년 지속하여, 단순히 제도로 그치지 않고 나라의 정체성에 더 가까워진 것들. 찬반을 떠나 실행을 앞두고 많은 논란이 재점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흘러갔다.
“자네, 나라님 말씀은 들어보았겠지?”
“……그러고도 제일 잘난 놈들을 모아놓은 게 맞아?!”
사내가 본 적도 없는 장면을 과장해서 재현했고, 파안대소가 번졌다.
평소 왕의 동향을 주시하는 사람은 소수의 식자뿐이었다. 대과 급제자의 차등을 나누는 전시殿試의 출제자가 왕이기도 했고, 또 인군의 행보를 알아야 식자로서 촌평을 남기건 찬반을 나누건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최근 왕의 한 발언은 모두의 입에서 회자하고 있었다.
전쟁 때야 왜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고비만 넘기면 내리막길일 줄 알았던 백성들이다.
하지만 임란이 종식하고도 어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조정은 뼈아픈 경험에도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나태해졌고, 뒤이은 왕은 기름까지 끼얹었다.
실정이 거듭되었음에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건 오직 그럴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반정이 있고서 여러 굵직한 변화가 있었다지만, 당장 체감되지는 않았는데 때마침 왕의 일갈이 백성들의 가렵던 구석을 시원하게 긁어준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시지! 나랏일 한답시고 대감이니, 영감이니 대접받을 줄만 알지 언제 우리 사정이 나아진 적 있던가?”
“샌님들에게 우리가 안중에라도 있겠나.”
“흥, 누가 본다면 이 나라에는 대감과 영감밖에 없는 줄 알겠어!”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사내들은 불평을 쏟아내면서 재차 대접을 기울였다.
“아무리 명나라라면 정신 못 차린다지만, 불쌍한 사람을 죄 죽여 버렸다는 데 느긋하게 사정이나 알아보자는 게 말인가 방귀인가?”
“방귀겠지! 평소에도 위아래 구멍 바뀐 것인 양 똥 같은 소리만 해대지 않았던가?”
“하!”
백성 대개는 북쪽의 오랑캐들이 준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젠체하는 양반님네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호들갑을 떨어대니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백성들에게 명나라와의 우호란 닿지 않는 개념이었다.
개인의 단위에서는 덕 본 것 없이 잃고 고생하기만 했으니까. 그러니 대소신료들이 외교 악화를 우려하여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놈의 명나라 타령! 놈들이 그리 대단하다면 왜 임진년 때 힘들던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단 말인가?”
“이 사람 백부님께서는 의병까지 일으켰는데, 포상은커녕 명군 놈들 오니까 수발이나 들랍시고 잡혀가서는 실종되셨네!”
“쳇, 집마다 안 그렇게 된 사람이 없지!”
오죽하면 임진년 때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들이, 정유년 때는 잠잠해졌을까.
“그리고, 어디 사람만 데려갔나? 명군 놈들 먹여야 한다고 종자까지 빼앗아가지 않았나!”
“몇 년 전에 명나라 놈들 돕는답시고 사람들을 잔뜩 강 너머로 데려가서는 모조리 불귀의 객으로 만든 건 어떻고!”
“그전부터는 사신들 접대한답시고 조도사들이 뒷간까지 들쑤셨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것들!”
성토로 목이 따가워진 사내들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축였다.
어쨌거나, 백성들은 명나라의 존재가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 오직 소수의 식자만이 고루한 소리와 함께 황상의 자비가 어떻고 대국의 은혜가 어떻고 떠들어댈 뿐.
그런 식자들에게 공감할 수 없는 백성들로서는, 왕이 난동을 부린 명군 상대로 보인 강경한 대응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싹 쓸어버려야 하는데!”
“……뭐어, 그게 가능하겠나?”
“나도 아네. 어렵겠지! 기왕이면 이참에 아주 쓸어버리는 게 낫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희망을 따름이었다. 가도의 해적들이 소탕되어 마땅하다고는 해도, 그들이 명나라 총병의 군사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명나라를 수백 년 동안 상국으로 모셔 온 상전들이 저들을 속 시원하게 쓸어버리리라 진지하게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한양에 새로이 전해진 소식은 백성들의 입방아를 다시 달구기에 충분했다.
* * *
“전하…….”
영의정 이원익은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고서 백관을 대표해 아뢨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나이다.”
이에 어전에 모인 신하들이 뒤따라 허리 숙였다.
“감축드리옵나이다.”
중신들은 하례를 올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용상의 주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러나 막상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려는 이는 없었다. 금상의 활화산 같은 폭발이 있은 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 탓이다.
무능을 통감한 염치의 발로는 아니었다.
현재 한양의 백성 십중팔구는 물론, 당상에 자리만 만들어내면 제가 꿰찰 줄 아는 참하관과 사대부들이 왕에게 호응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차에 대승의 소식까지 전해졌으니 현재 왕의 위세는 조선에 친림한 황제와 비견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소한 트집거리라도 만들어냈다간, 무수한 여론에 공신이건 재상이건 몰매를 면치 못하리라. 그러니 모두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 채 귀만 세우고서 윤음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가도의 해적들은 국초의 홍건적처럼 패잔병들이 아조의 경계를 넘어와 국가를 전복시키고 저들의 소굴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마침내 소탕하니 내가 앓던 이가 빠진 듯하여 속이 시원합니다.”
대단히 긍정적이고 차분한 발언이어서, 이원익은 내심 안도했다.
이만한 성과를 거두고도 노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다면 왕이 여론을 등에 업고서 어디까지 나아갈지 몰랐으니까.
“경하드리옵니다.”
앓던 이가 빠졌고, 왕의 노기가 다스려졌다면, 남은 일은 명나라에 동강진을 몰살해 버린 것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원익이 보아하니 이 주제는 당장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원수의 장계를 보니 해적이 서로 넘어뜨리고 짓밟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는데 참으로 통쾌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내가 철산부의 고혼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이런 마당인데 어떻게 해명을 닦달하겠는가?
“다만 분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병사가 죽고 상하였다니 마음이 쓰립니다. 전사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고, 부상자들은 꼼꼼하게 돌봐주세요.”
“받들겠나이다.”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부원수 역시 크게 다쳤다는데, 혹 잘못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우니 어의를 보내고자 합니다.”
“그리하시옵소서.”
고생한 병사들을 위무하는 것이야 이론이 없었고, 이원익 역시 정충신이 쾌차하기를 바랐다.
고작 서면으로 접했을 뿐이나 싸움이 얼마나 버겁고 치열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평범한 장수가 맡았더라면 절대 이기지 못했으리라. 다르게 말하면, 끝내 이겨낸 정충신은 얼마나 비범한가. 높아져 가는 국경의 긴장감을 생각하면 조선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인재였다.
“아, 그래요. 죄인은 철산부에서 조리돌리고 난 후에 한양으로 데려오세요. 철산부 사람들도 원수의 낯짝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