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63화
세자를 즉조당으로 부르니, 금세 찾아온 세자가 내부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아직 안 왔나 봅니다.”
“…….”
뜨끔했다. 그동안 내가 아비가 아니라 교육자로서만 세자를 불렀다는 뜻이니까.
오죽하면 오자마자 동석할 선생님부터 찾았겠는가.
‘내가 죄인이구나!’
이게 다 모문룡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다만, 고작 호주머니 더 털어줄 생각 없다는 말에 먼저 공격할 줄이야!
그 미치광이에게 정신이 팔려 아비 노릇을 다하지 못했다. 만약 모문룡의 목을 베게 된다면 그 때문이다.
“아바마마?”
“크흐흠, 흠. 미안하구나. 내가 세자를 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솔직하게 사과하니 세자가 빙긋 웃었다.
“아니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대업을 염두에 두실 수밖에 없으신데, 미안하게 여기실 일이겠사옵니까?”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아비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궁인과 신하들에게 거의 떠안기고서 지내왔는데, 이리 고운 심성을 품고서 잘 자랐으니 마냥 가상할 따름이었다.
“오늘은 선생을 부르지 않았다. 네가 장차 왕업을 이을 사람으로 교육도 중요하지만, 하늘이 정한 우리 부자의 인연에 비하겠느냐?”
부자로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보자는 말에 세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그래. 그저, 인연을 위해 불렀다.”
용상에 비껴 앉아 옆자리를 두들기니 세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앉았다. 처음에는 마다하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눈치 볼 타인이 없다면 세자도 꺼리지 않았다.
“소자가 이렇게 아바마마와 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구나.”
이유 없이 얼굴 한번 보자고 불렀다는데 이처럼 좋아해 주니 더 미안했다.
“서둘러 온 듯한데 지치지는 않았느냐?”
“조금도 지치지 않았사옵니다.”
“얼굴은 조금 빨간데.”
“소자가 비록 서두르기는 하였으나 기쁜 마음에 서둘렀으니, 어찌 지침이 있겠사옵니까? 무방합니다.”
“다행이구나. 내, 마침 사람들에게 일러 북악산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조금 쉬었다가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꾸나.”
“예!”
세자는 활기차게 답하고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바마마께서 기왕에 만드신 자리인데, 어마마마와 동생들도 함께했으면 좋겠사옵니다.”
가상한 말이었지만, 마침 거론된 중궁은 내게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쉬이 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자 세자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되옵니까?”
“아니다. 부르자.”
마냥 아비를 좋아해 주는 세자다. 그러니 흔치 않게 찾아온 시간을 독점하고픈 마음도 없잖아 있을 터거늘, 가족 전체의 우애를 위해 크게 양보했다. 어떻게 내가 곤란하다고 사양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부르마.”
“망극하옵니다.”
세자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멋쩍게 웃었다.
“대비마마께서도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외유를 나가는데, 궐에 혼자 남아계시면 얼마나 적적하시겠습니까?”
“그래. 옳은 말이구나.”
문득 세자가 가상해져서, 나는 나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이리로 오거라.”
일순 육중한 무게가 다리를 짓눌렀다.
“어이구!”
“아…….”
“앉아 있거라. 부쩍 자란 게 체감되어서 그랬다.”
평생 꼬맹이로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만큼이나 몸도 빠르게 자라났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아주 훤칠해지겠지. 그때가 되면 이렇게 무릎에 더 올릴 수도 없을 터였다.
“무겁지 않으시옵니까?”
세자는 나의 반응이 의식되었던 듯,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가 살짝 가벼워졌다. 딴에 다리에 힘을 주어서 나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한 모양인데, 앉은 자세에서 체중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금세 다시 다리에 무게가 전해졌다.
“나보다 네 무릎이 먼저 나가겠다, 세자야.”
“…….”
그렇게 세자를 껴안고서 한참 머리를 쓸어주다가, 이제는 내 무릎이 먼저 나가겠다 싶어 일렀다.
“어머니를 데리고 오거라. 나는 대비마마를 모시고 먼저 가 있으마.”
온 가족이 함께 움직여도 좋겠지만, 왕가의 사람이 일제히 이동한다면 큰 소동이 벌어질 수 있었다. 백성들만 아니라 신하들도 똑같이 소란을 일으키겠지.
“금방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어디로 오면 될지 사람을 보내두마.”
“예.”
나는 서둘러 떠나는 세자를 배웅한 뒤, 대비가 있는 석어당으로 향했다.
“주상께서는 어인 일이시오?”
“대비마마께 나들이를 청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부자의 단출한 바람 쐬기에서 일가족 나들이로 번진 사정을 밝히자 대비가 안색을 밝혔다.
“세자의 마음 씀씀이가 참 착하고 선하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 왕위를 이으면, 너무 선한 마음에 나라와 백성들을 단호하게 다스리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실전 수업을 거듭해 오고 있지만…….
타고난 성정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무기를 들려 주어도 차고만 다닐 뿐 꺼내 들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우가 심하시오. 세자가 아직 어리고, 학문이 다 성취된 것도 아니며, 주상께서도 당장 내일 양위할 것도 아니잖소?”
“그렇기는 하지요.”
“주상이 이미 세자의 교육에 크게 신경 쓰고 있고, 또 세자도 총명하여서 부왕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 않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흠, 흠.”
애가 총명하긴 해…….
“……그리고 내가 보아하니 인군의 자질이 마냥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만 있지도 않소이다. 물론 왕재도 중요하겠지만, 선유先儒가 이르기로 덕이 자질보다 크면 군자라고 하였고 자질이 덕보다 크면 소인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걸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십니까.”
“소인보다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더 평안하지 않겠냐는 말이오.”
그 의도만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추궁하지는 않기로 했다.
“한데, 주상의 가족만 가족이요?”
“예? 아…….”
공주 부부를 말하는 거로군.
“대비께서는 이미 하루걸러 공주와 부마를 부르시지 않습니까? 아마 부마도 제집보다 궁궐이 더 익숙할 겁니다.”
누가 보면 정기행사인 줄 알 거다. 처음 며칠은 나에게 문안까지 하려고 했다니까? 입궐했는데 의빈이 되어서 왕에게 인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공주와 부마를 대동하고서 북악산을 가 보겠소?”
“음…….”
나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움직이는데 여기에 정명공주와 부마까지 더해진다면 나들이가 아니라 피난처럼 보이지 않을까?
더욱이, 대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와 가족에게 정명공주는 남이나 마찬가지다.
안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과장 조금 보태서 세자에게는 가족 나들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고모와 고모부가 끼는 꼴이라…….
한참 고민을 하고 있으니 대비가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주상께서는 제 자식들을 사랑하면서, 나에게는 하나뿐인 자식마저 사랑하지 말라는 게요?”
* * *
왕의 행차에 더불어 나들이 규모가 훨씬 커진 관계로, 북악산은 때아닌 점령을 당했다.
내금위內禁衛에 겸사복兼司僕과 우림위羽林衛, 그리고 선전관청宣傳官廳까지 왕의 경호에 관련이 있다 싶으면 모조리 불려 나온 것이다.
‘동학군들이 앉으면 죽산이고 서면 백산이라더니 삐까뻔쩍한 인간들 다 모아놓은 여기는 꽃놀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위사들이 죄 색색의 갑주를 걸친 채 휘황찬란한 군기를 들고 섰으니까. 한양 사람들이 보면 늦가을에 꽃이라도 핀 줄 알 테지. 덕분에 참석자들은 쉽게 자리를 찾아왔다.
“불러주셔서 망극하옵니다.”
영안위永安尉 홍우원과 정명공주가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의 방문에, 동석한 대비가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서 앉게.”
대비가 근처 방석을 가리키자 홍우원이 나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소신이 함부로 왕실 분들과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될 게 어디 있나. 주상께서는 가까운 사람끼리 과하게 격식 차리는 건 도리어 결례라고 하였네. 그렇지 않소?”
대비는 나를 보면서 물었다.
예전에 내가 비슷한 소리를 하긴 했지…….
그래서 밥 먹듯이 문안 인사도 째고, 그러면서도 말도 없이 불쑥 찾아가 대비를 긁곤 했다.
‘업보로군.’
나는 대비가 가리킨 방석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자리하시게.”
“망극하옵니다.”
홍우원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먼저 움직이는 대신 살짝 비켜서서 정명공주를 안내했다. 대비는 그런 광경이 보기 좋다는 듯 환하게 웃었고.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다.
만약 홍우원이 아닌, 원래 역사처럼 이미 혼약자가 있는 홍주원을 강탈하듯이 공주에게 붙여주었다면 이 같은 모습은 보기 힘들었겠지.
“제게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대비에게 툭 던지듯 말하니, 대비가 실소했다.
“누가 아니랬소?”
……쩝.
어쨌거나 대비가 달라진 삶에 만족한다니 다행이다. 원래 역사처럼 정치에 간섭하려 들지도 않고, 또 폐주를 죽이겠다는 열망도 까맣게 잊은 듯했으니까.
원 역사의 대비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원한을 갚으려 하면서도 정작 행복하지는 못했겠지. 이 정도면 인생 하나를 수렁에서 건져준 셈이다.
대비는 근처에 홍우원과 정명공주가 앉자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영안위께서는 자손 생산을 위해 힘써주고 계시나?”
워낙 직설적인 질문이었던지라, 홍우원은 얼굴을 붉히며 숙였다. 정명공주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지라 금슬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대비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지.
“광산부부인께서 많이 연로하시니, 서둘러 증손을 보여드려야지 않겠나?”
“……예.”
“영안위만 믿고 있겠네.”
“망극하옵니다.”
“거, 중궁과 왕자들이 오면 말씀은 가려 해주셔야 합니다.”
민망하다고.
“왕실이 부응해서 무엇이 나쁘다고 말을 가리라는 거요? 주상께서는 손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소?”
“……있긴 하지요! 그런데 세자와 왕자들은 아직 어립니다.”
“왕자들은 몰라도, 세자는 관례를 치렀으니 성인이요. 내가 보기엔 당장 세자빈 간택을 시행하여도 늦소만.”
“아직 아기들입니다!”
“콩깍지 단단히 씌셨구려.”
“콩깍지가 아니라……. 열두 살이면 아직 핏덩이지요!”
정신은 그보다 훨씬 성숙하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다. 고작 열두 살에 두 발로 서서 돌아다닌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실환가?
“세자빈……. 세자가 저 좋다는 사람 간택해 놓으면 경운궁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주나 씀풍씀풍 낳겠지? 그리고 못난 아버지는 경운궁에 처박아둔 채 서궐에서 자기들끼리 오순도순 잘 살겠지? 으악!”
“정신이 나갔구려.”
“아직도 핏덩이 같은 세자를 시커먼 남의 집 딸내미에게 주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세자는 작고 소중해…….
“중궁과 왕자들 앞에서 말조심할 사람은 내가 아닌 듯하오.”
나는 핏덩이 같은 세자가 장가, 라는 혼미한 미래에 정신이 아득한데, 대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홍우원에게 일렀다.
“나는 공주에게 저리 극성이지는 않으니 부담 느끼지 말게. 광산부부인께서만 아니라 나 역시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
홍우원은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답했다.
“……예에.”
적적한 마음에 산 아래 풍경이나 돌아보니 경치가 좋기는 했다.
금세 집중할 수 없게 되어서 그렇지.
“수절한 과부도 아니거늘 지아비 보기가 어찌 이리 어렵답니까?”
중궁과 세자, 봉림대군이었다.
막내 인평대군은 너무 어려서 데려오지 않았나.
세자는 양해를 구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정무로 바쁘신 와중에 어머니를 위해 만든 자리이옵니다.”
이에 중궁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가족의 단란한 나들이치고 어울리지 않는 손님들을 돌아보았다.
대비까지는 그렇다 쳐도 정명공주는 엄연히 출가외인.
그런데 부마인 홍우원까지 있으니 세자의 해명도 어색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애쓰는 세자가 가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중궁은 더 토 달지 않고 다가왔다.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분위기를 읽고 정명공주와 홍우원도 슬쩍 일어섰지만, 나는 두 사람을 만류할 여유도 없이 해명해야 했다.
“이야……. 그게,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잘 지내지 못했어요…….
“도적으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대명의 군사들과 싸우는 일이니 사소하지는 않지요.”
“아유……. 예에. 그렇지요.”
“한데, 전하께서 친정하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직접 명나라로 가 이번 일을 알리실 것도 아니겠지요.”
……명나라로 가야 하나?
찌그러져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주변을 살폈다.
갈색, 노란색, 붉은색.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라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자,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나는 손바닥을 보이고는 누각에서 훌쩍 뛰어내려, 숲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왕의 돌발행동에 정신없이 따라붙은 위사들과 보물찾기를 한 끝에, 마침내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 이름이 뭐지요?”
막 꺾어낸 한 떨기 녹음을 위사들에게 보여주었으나. 다들 난처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댈 뿐이었다. 칼질이나 할 줄 알지, 무식한 친구들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적잖은 시간을 지체한지라 서둘러 누각으로 귀환했다.
졸지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된 중궁은 싸늘한 눈빛으로 반겨주었고, 나는 내시처럼 구질구질하게 다가가서 등 뒤로 숨겨둔 선물을 바쳤다.
“이건……?”
“꽃입니다.”
중궁은 의아한 눈빛으로 꽃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버리지는 않는군…….
다행이다.
“무슨 꽃입니까?”
중궁의 말에, 침이 돌멩이라도 삼킨 것처럼 힘겹게 넘어갔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소리를 지껄였다.
“분명 위사들에게 이름을 듣고 왔는데, 중궁을 보니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