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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64화 (64/380)

인조, 명군이 되다 64화

끄아악!

내가 내뱉고도 혀가 오그라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명나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흐흠.”

중궁은 옅게 헛기침하더니 꽃을 소매에 넣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건가?

당장 화를 낼 기색은 아니어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크흠, 흠. ……편하게 앉으시지요. 너희도, 와서 앉거라.”

중궁에 이어 세자와 봉림대군까지 앉혀놓으니 비좁은 누각이 제법 북적였다.

그간 눈치만 보던 영안위 홍우원은 세자에게 인사를 올렸고, 정명공주는 자리를 중궁 쪽으로 살짝 옮겨 무어라 속삭였다.

생각보다는 잘 어울리는군.“

나는 엉덩이를 뒤로 빼서 난간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게, 한숨 자기 좋았다.

“……아바마마? 주무시옵니까?”

“아빠 안 잔다.”

난간에 기댄 채 눈 감고 팔짱까지 낀 채였지만, 아직 잠들지는 않았다고.

잠들기 일보 직전이기는 한데…….

이런 여유도 있어야지.

모문룡 때문에 잘 지내지 못했다는 건 변명이 아니었다. 그놈 때문에 얼마나 피곤했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더 바빠졌다. 사형감이야, 아주.

그리고 한 5분쯤 쉬었을까.

“……엇차!”

기합과 함께 일어났다.

아빠의 역할이란 게 가족을 데리고 나오면 보통 혼자 피곤해서 잠드는 거긴 한데, 정말로 그랬다간 중궁에게 바친 꽃이 내 콧구멍에 쑤셔 박힐 거다.

생각해 둔 것도 있었고.

“세자야. 슬슬 출출하지 않으냐?”

“그러하옵니다.”

나는 주변을 보고서 말했다.

“다들 식전이라 시장할 텐데, 내가 가장 노릇을 하고자 마련해 온 것이 있습니다. 여봐라!”

바깥을 향해 이르니 내시가 다가와 허리 숙였다.

“부르셨사옵니까.”

“화로와 고기는 가져오셨지요?”

“예에.”

“준비해 주세요.”

“즉시 이행하겠나이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보자, 함께 명령을 듣고 있었던 뒤편의 궁인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그저 짐 보따리처럼 놓여 있던 함에서 화로와 숯, 고기와 집기가 차례대로 놓였다.

왕이 직접 고기를 굽는다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으나 가족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고기를 구워준 적이 있으니까.

대신, 위사들이 놀란 기색이었다.

마치 말로만 접한 신기한 광경을 직접 본다는 듯이.

신기한 광경은 맞겠구나.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질걸?

고생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가족들만 맛있게 먹으면 미안하겠다, 싶어서 고기를 넉넉하게 가져왔다.

왕이 친히 선온宣醞을 내리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왕이 직접 구워준 고기를 먹는 건 가문의 영광이지. 과장 조금 보태서 물렁뼈와 심지를 따로 챙겨두었다가 가보로 삼아도 될 정도다.

숯에 불을 붙이고, 번철판이 달아올랐을 즈음 고기를 올렸다.

과연 예상한 대로 맛있는 소리가 울렸다.

‘기름…….’

한동안 용포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겠군.

기왕 고생하는 김에 침방나인들 고기도 구워놓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 * *

“아바마마, 고기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올라오시지요.”

세자의 가상한 말에 영안위 홍우원도 찬동하고 나섰다.

“예에, 전하. 고기는 신이 굽겠습니다.”

“어허.”

나는 누각이 있는 뒤편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앉아 있으시게. 그리고 아빠 고기 구우면서 먹고 있다.”

“……망극하옵니다.”

홍우원은 꽤 부담스럽기는 하겠다. 부마라고는 하지만 종친은 아니거늘 왕가와 함께 앉아서 대접을 받게 됐으니까.

“망극하면 돌아가서 시구나 하나 쓰든지 하게. 전하께서 친히 구워주신 고기 한 점마다 일 배 올리면서 먹었다고.”

“……예에.”

가족들은 고기를 제법 먹었겠다, 싶어서 작은 접시마다 갓 구워진 고기를 소분했다.

“최 상선?”

“예, 전하.”

“당상들부터 한 접시씩 돌려주세요. 궁인이라고 빼놓지 말고.”

그러자 상선이 민망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신은 전하께서 마음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족하니, 안쪽으로 보내시지요.”

“종친이면 위장이 열 개쯤 된답니까? 다들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러는 것이니, 두 번 마다하지 말고 나눠주세요.”

“……망극하옵나이다.”

최 상선이 사람들을 불러 접시를 나눠주었고, 덕분에 왕이 직접 구운 고기를 맛보게 된 신하들은 한마디씩 하고서 물러났다.

뿌듯하군.

노을 아래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기는 차에, 언덕 아래에서 한 사람이 올라왔다.

“전하……?”

도승지 이덕형이었다.

손님이 싫은 건 아니었으나, 그의 역할을 생각하면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일단 딴소리하지 말고 와서 맛이나 보세요.”

“전하…….”

이덕형은 사양하는 투였으나, 주변에서 일제히 건조한 시선이 쏟아지자 말을 끊고는 다가왔다.

그리고 갓 구워진 고기 접시를 받으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소식이 있사옵니다.”

“뭐, 명나라나 후금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답니까?”

“그것은 아니옵니다.”

“내가 당장 나서지 않으면 누구 가랑이가 찢어지기라도 하고요?”

“……그 또한은 아니옵니다.”

나는 식어가는 고기를 향해 손짓했다.

“그럼 접시부터 비운 다음에 알려주세요. 왕이 친히 구워준 고기가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덕형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기를 보고는 예, 하고 답했다.

“그렇다고 허겁지겁 드시지는 말고요. 입천장 데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이덕형은 잠시 고기를 우물우물 씹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께서 친히 고기를 구워주시니 각골난망이옵니다.”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이덕형은 한 발자국 다가와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막 모문룡이 북소문을 넘어온 참입니다.”

이제 보니 불청객은 이덕형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그건 그리 시급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의금부에 처박아두고 시간 널널할 때 알려주지.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졸지에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내가 인조라서 그런가?

그런 거면 인정인데.

“모문룡이 수년간 도독으로 떠받들어진지라 얼굴 한번 보겠다는 구경꾼들로 대로가 가득 찼사옵니다.”

“…….”

“일단 판윤이 군사를 부려 길을 트게 하였으나, 전하께서 명확한 조처를 내려주시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이덕형이 덧붙였다.

“또한, 많은 재상이 전하께서 신속히 국문鞫問을 주재하시어 죄인의 처분을 정해주시기를 청하였사옵니다. 모문룡의 죄상이야 어떻건 오래 가둬놓을 자는 아니지 않사옵니까?”

죽이건 살리건 명확하게 정해놔야 여러 사람이 편해진다.

“그래, 그래. 알겠습니다. 당장 내려가도록 하지요.”

“예.”

더는 손을 댈 수 없게 된 불판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문룡을 여기로 데려와서 면상을 구워버리는 건 어떨까, 하고.

감히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다니.

하지만, 세자와 봉림대군의 정서발달에 좋지 않을 듯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최 상선, 내가 급하게 일이 생겨서 미리 내려가야겠습니다. 나 대신 가족들을 챙겨주세요.”

“예에.”

누각에 가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니, 다들 앞다투어 일어나길래 만류하고서 발을 돌렸다.

* * *

한양은 때아닌 소란을 맞았다.

최근 장안의 화제는 단연 철산부의 기념비적인 전투와 가도의 평정이다.

그런데 오늘, 두 사건의 중심에 선 죄인이 한양으로 압송된 것이다.

웅성웅성

함거檻車에 태워진 죄수가 대로를 지나가고, 그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구경꾼들은 연신 고개를 기웃거렸다.

“언제는 총독이니 도독이니 대단한 놈이라 띄워주더니 별것 없구만?”

“그러게 말일세.”

가는 곳마다 구경거리가 된 모문룡은, 이전처럼 구경꾼들에게 성질낼 기력조차 없어 고개를 숙였다.

“이봐!”

함거 곁에 선 군관이 모문룡을 찔렀다.

딱딱한 방망이 끝이 늑골 아래의 내장을 짓눌렀고, 모문룡은 마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숨기지 말고 보이라는 것. 왕이 철산부의 유족들을 달래기 위해 내린 조치는, 엄명이 되어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한양에 도착해서도 고수하라는 당부까지는 없었지만 군관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모문룡은 무고한 인명을 무수히 살상한 죄인. 명분을 들먹이지 않아도 패고 싶은 놈이니까.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커다란 얼굴이 드러나자 구경꾼 하나가 팔짱을 풀었다.

“면상이 보름달만 한 게 잘 먹고 잘 살았군!”

“저것도 빠진 것일 테지?”

“뱃가죽 축 늘어진 게, 불붙여 놓으면 달포는 타겠다!”

이에 갓 쓴 선비들도 발언은 삼갈지언정 혀는 찼다.

동강진은 요동의 패잔병과 유민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동안 그 어려움을 호소하며 폐주에게 막대한 재물과 식량을 거듭하여 강탈해 갔는데, 정작 동강진의 수장이라는 작자는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한눈에도 보였으니까.

그렇게 모문룡은 한양 사람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어 나아갔다.

그리고 출발이 있으면, 도착이 있는 법.

“내려라.”

군관이 함거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광해군 시기 재건된 종각鐘閣의 맞은편, 의금부義禁府였다. 가히 국적이라 칭해질 만한 중죄인을 심문하기 위한 장소로, 전범인 모문룡의 운명을 논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

모문룡은 함거를 나서며 주변의 빼곡한 구경꾼들을 흘겨보았다.

화낼 기력이 뒤늦게라도 생겨서는 아니었다.

모문룡은 갑자기 뛰쳐나가면 도망칠 수 있을까 내심 고민했지만, 상상을 채 현실로 옮기기 직전 군관이 팔뚝을 붙들었다.

“멍청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모문룡이 신경질적으로 답하고는 팔을 당겼으나 군관은 놓아주지 않았다.

재차 구경꾼들을 의식한 모문룡이 외쳤다.

“나는 대명제국 황제께 친히 총병으로 제수된 몸이니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모욕하느냐?”

“호송인.”

“……익!”

군관은 비틀거리며 버티는 모문룡을 붙든 채 의금부로 들어갔다.

그렇게 구경거리는 사라졌으나 구경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대신, 의금부의 담장 너머에 귀를 기울이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고 쑥덕거렸다.

과연 모문룡은 어떻게 될까.

“명나라 장수라는 데 죽이기야 하겠어?”

“이미 싸움까지 벌였다는데, 명나라고 자시고 의미가 있겠나? 당연히 죽여야지!”

“기왕 죽일 거라면 볼거리나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신분이 있으니 조용히 죽이지 않겠는가?”

거리에서 구경꾼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

의금부 안쪽에서는 그 결과를 정하기 위해 왕과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모문룡은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멍석에 꿇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용상의 주인을 보고자 했으나, 채 자세히 살피기 전 군관이 정수리를 찍어 내렸다.

“큭!”

“전하께서 윤허하시기 전에 감히 고개 들지 마라.”

“나는 대명제국의 총병이야!”

모문룡이 이런 대우는 정당하지 않다는 듯 따지자, 기다렸다는 듯 정면의 어좌에서 말했다.

“내 앞에 무릎 꿇린 총병이지요.”

“…….”

“덕분에 눈엣가시 같았던 해적 소굴을 깡그리 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뭐라고?”

“다 도독께서 변경을 어지럽혀 주신 덕분입니다. 만약 도독께서 덜 멍청하고 덜 야만적이었다면 폐주의 실수를 수습하는 데 훨씬 고생했겠지요.”

조선의 왕은 빈정대고 있었다.

모문룡은 노기가 끓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구차해지더라도 목숨은 건지고 싶었다. 오직 살아남고자 동강진의 모두를 철산부로 던져 버리고 혼자 내뺐던 그였다.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좋은 법.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치욕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기에, 모문룡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동강진은 오래전부터 사특한 자들이 결탁하여, 소관을 에워싸고서 방자한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질러왔습니다.”

터무니없는 변명에 조선의 신하들이 웅성거렸고, 모문룡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조선 국왕 전하께옵서 부정한 무리를 일소하시니, 천하에 홍복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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